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유 (문단 편집) ==== 적도와 도수[* 洮는 '조'로 읽을 수 있지만 호삼성의 주에 의하면 '토도(土刀)의 번(翻)'으로 되어 있어서 '도'로 읽는다.] ==== 대장군 비의가 죽었으나 내정 파트 진지와 군사 파트 강유 중 그 누구도 비의의 자리를 고스란히 물려받지 못한다. 녹상서사는 강유도 비의가 죽기 전 비의와 함께 맡고 있었으나, 강유 자체가 원정 중이었으니 달리 권한을 행사할 수도 없었다. 또한 비의의 자리였던 대장군과 익주자사는 그대로 공석이 되었다. 덕택에 내정의 진지와 군정의 강유라는 이원체제로 촉이 운영된다. 황호가 황제의 뜻을 받드는 환관임을 감안해보면 이전에 제갈량이 세운 한중막부에 쏠려있던 촉의 권력이 성도의 황권으로 점차 이동하는 과정이라 보아도 좋을것이지만, 근본적으로는 한중패부의 권력을 이어받은 강유는 북벌에 뜻을 두고 이 흐름에 저항했고 이는 강유의 이후 10여년간의 북벌 캠페인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된다. 비의가 정월에 사망한 직후 오의 대권을 잡은 제갈근의 아들이자 제갈량의 조카인 [[제갈각]]이 신성으로 출병한다. 비의가 죽기 직전 유선의 명령을 받아 한중에 대장군부를 개설한 후 군사를 이끌고 한중으로 갔다는 기록을 본다면(비의전), 오와 촉이 연계해 북벌을 감행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강유는 설사 충분한 준비가 안 되어 있더라도 오의 출병을 외면할 수 없었던 듯하다.[* 실제로 위나라의 우송은 동흥 전투의 대패에 이어 촉과 오의 대대적인 협공을 받아 근심하는 사마사에게 당시 강유군을 규모만 크지 현군(보급로가 위태로운 군대)일 뿐, 뿌리가 깊은 구적이 아니라고 표현했다.] 따라서 강유 역시 출병하여 수만 명을 동원해서는 석영(石營)과 동정(董亭)을 지나 남안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곽회에 이어 옹주자사가 된 [[진태]]가 낙문(천수군 기현)으로 와 상대하다 오가 신성에서 위나라에게 막히고 군량마저 떨어져 곧바로 퇴각한다.[* 촉장인 장억은 북벌론자면서도 제갈각의 출진이 실패할 것이라 예견하였는지 제갈량의 아들이자 제갈각의 사촌 동생인 제갈첨(성도방어전 때 죽는 그 사람)에게 오에 편지를 쓰라고 해 제갈각의 출진을 막으려 하였으나, 제갈각은 이를 듣지 않았고 결국 대패한 뒤 손준에게 구족이 멸족당했다.] 강유가 북벌 전문으로서 확실하게 전과를 올리기 시작한 때는 254년 출병부터다. [[254년]], 그는 독중외군사(督中外軍事)를 더하였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이해 6월부터 10월까지 강유는 적도로 출병하여 대승을 거둔다. 4월 적도현의 장 적도 현장 이간의 밀서를 신뢰해서 북진한 강유는 6월에 군사를 움직여 농서를 공격해 이간의 항복을 받고 적도를 전초기지로 활용할 수 있었다. 게다가 성공적으로 기습해서 그런지 강유가 양무마저 포위하는 상황에서 곽회와 진태의 동향이 기록되지 않은 채로 이에 오로지 대응해 나온 대촉 전담군인 정촉호군[* 혹은 토촉호군(討蜀護軍)으로 표기된다.]을 격파하고 지휘관인 [[서질]]의 목을 베고 대승을 거두는 데 성공한다. 강유는 승세를 틈타 항복시킨 곳이 많았고 적도현, 하관현[* 강유전 원문의 하간(河間)은 오기이다.], 임도현의 세 현의 많은 성들을 함락시킨다. 그리고 이 무렵 옹주자사 [[진태]]가 도착하기 전 퇴각하며 큰 전과를 올렸으나, 이 전투로 인해 촉군의 선봉이었던 탕구장군 [[장억]]이 서질과의 교전 중 전사한다. 이후 강유는 오래 있을 수는 없다 여겼는지 항복한 적도, 하관, 임도 세 현의 주민들을 데려왔다. 이후 광한군 면죽(綿竹)현, 촉군 번현(繁縣)에 거처하게 했다.(후주전) 그리고 1년간 병사를 쉬게해서 차후의 북벌을 준비한다. 토촉호군을 전멸시킨[* 이 당시 토촉호군 서질은 독자적으로 군사력을 이끌고 강유의 기습을 맞서는 모습을 보이는데 옹주자사-토촉호군 양두체제 시절에 비하면 약할지언정 그래도 나름의 독자지휘권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강유와의 전투에서 서질은 참살당하고 토촉호군은 격퇴당하는 큰 피해를 입는다. 그래서 그런지 이런 독자지휘권을 행사하는 모습은 다시는 보이지 않고 이후론 정서장군과 옹주자사에게 종속된 듯한 인상을 준다.] 강유는 255년, 다시 한 번 적도로 출병한다. 이 시기 출병에 앞서 강유는 북벌에 대한 반대 여론에 부딪힌다. 반대파의 대표 주자는 [[장익(삼국지)|장익]]인 듯 한데, 장익전에 따르면 강유는 이들과 설전을 벌여 모두 굴복시키고 더불어 반대했던 장익을 강유의 북벌에 종군시켰다. [[파일:도수 전투도.png]] 255년 8월, 강유는 장익까지 끌고 수만명으로 다시 한 번 적도로 갔는데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일단 기산, 석영, 금성(金城) 세 군데로 진군한다며 거짓 [[정보]]를 흘리고는 수만 명을 통솔해 부한현(枹罕縣)으로 갔다가 적도로 내달렸다. 곽회 사후 정서장군을 이은 진태는 여기에 속지 않고 옹주자사 왕경 더러 일단 적도로 나아가 자신을 기다리라 명하였다. 그러나 강유는 기다릴 시간도 주지 않고 도수 서쪽에서 야전을 통해 [[왕경(삼국지)|왕경]]을 격파하여 적군 수만 명을 죽여 사람 잡은 수로만 계산을 하자면 제갈량의 북벌을 능가하는 성과를 거뒀다. >왕경의 정예병사는 서쪽에서 실패하여 참사를 당했고, 적들의 사기는 더욱 왕성합니다. 승기를 탄 병사는 감당할 수 없고, 장군은 오합지졸로 방금 전쟁에서 진 군사들의 뒤를 잇고 있으며, 장수와 병사들은 사기가 떨어졌으며, 농우는 매우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옛사람은 '독사가 손을 물면 장사는 손을 자른다' 고 했고, 《손자병법》에서는 '군대가 공격하지 않는 적이 있으면, 지키지 않는 곳이 있다' 고 했습니다. 대체로 작은 손실로써 큰 것을 보존하는 까닭인 것입니다. 지금 농우의 재난은 독사에게 물린 것보다 심하고, 적도 땅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강유의 군대는 그의 예봉을 피할 수 있습니다. 요충지를 차지하고 안전하게 보존하면서 적의 쇠함을 기다린 연후에 진군하여 구조하는 것만 못합니다. 이것이 승리를 얻는 방법입니다. >---- >위서 진태전中, 조수전투 이후 등애의 의견 당시 위나라의 패배는 정사 등애전에 따르면 '''"옹주 전체가 함락 직전의 상태"'''에 이르렀다고 하며 등애는 아예 적도에서 철수하고 기회를 봐서 다시 싸우자고 했을 정도이다. 대패를 당한 왕경은 만여 명을 수습해 적도성으로 물러났다. 한편 장익이 지금의 크나큰 공적도 훼손될 수 있다며 작전을 더 지속하는 것은 사족(蛇足)이라고 말렸지만 강유는 그대로 적도를 에워쌌다.[* 장익전에서는 장익이 말리자 강유가 노하면서 장익의 발언을 뱀에다가 사족을 그리는 것이라고 했다고 되어 있으나 일단 여기선 《화양국지》7권과 《[[자치통감]]》76권을 따른다.]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제갈각]]의 동흥제 전투의 대승의 경우에는 오 입장에서 매우 유리한 지형에서 전개된데다가 위군이 공격측에 오군이 방어측에 그것도 승리를 거둔 결정적 요인이 불리한 지형에서 퇴로가 끊기자 위군이 혼돈에 빠지면서 붕괴한 전투였다. 그에 비해 조수전투는 촉한이 원정을 나간 상태인데다가, 병력차도 거의 동일하고, 강유가 왕경을 공격하는 입장임에 불구하고 학살에 가까운 교전비로 이런 대승을 거뒀다. 거기에 당시 진태의 표현에 따르면 강유의 병사들은 가볍게 무장한 경장병사이고 왕경의 군대는 잘 무장된 정예병사였으니 강유의 전과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가능하다. 전술적인 성패에만 국한한다면 촉한이 위를 상대로 치룬 북벌 중 가장 성공적인 북벌중 하나라고 봐도 무방하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8월 22일에 장수교위 등애에게 조서를 내려 행(行)안서장군으로 삼아 진태와 함께 힘을 합쳐 강유에 대항하도록 했고 이후 태위 [[사마부]]가 뒤를 잇도록 했다. 진태는 상규에서 주둔했다가 [[등애]], [[호분]], [[왕비]]와 삼군으로 나누어 농서에 진을 쳤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등애뿐만 아니라) 제장들이 모두 왕경이 패전해서 강유의 무리가 대단히 왕성한데 오합지졸을 가지고 공격하면 안된다면서 땅을 조금 잃어버리긴 하지만 크게 보면 전체를 지키는 것이라며 험한 곳을 지키다가 적들이 지치기를 기다리자고 하였는데 진태가 반대했다고 한다. 당시 위나라에서 옹주를 포기하자는 의견이 만연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태가 강유가 경무장한 병력을 가지고 깊히 들어온 것은 바로 위나라 군대와 들판에서 한번 싸워 이기자는 것이고 왕경이 격파되어 도망쳤는데 강유가 만약 전투에서 승리한 위세를 가지고 병사를 진격시켜 동쪽으로 가서 가득찬 곡식을 가지고 병사를 풀어 항복한 자를 받아들이고 강족, 호족을 받고 관중과 농서를 다투면서 주위의 네군[* 농서, 남안, 천수, 광위를 뜻한다. 제갈량의 1차 북벌 당시 제갈량이 노리던 지역과 대충 들어 맞는다.]에 격문을 보내면 우리가 싫어하는 일이라면서 강유군이 보급이 없고 공성 장비도 없어서 공성에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진군을 감행하여 강유군의 적도 포위를 푸는 데 성공한다. 이때 진태는 신속하게 부풍군 진창현(陳倉縣)과 천수군 상규현을 경과하고 몰래 고성령(高城嶺)도 넘어 밤중에 적도의 동남쪽 산에 당도하였다. 매복한 병사들이 진태의 군대가 갑자기 적도 남쪽에서 나타난 것을 보고하자[* 진태전에 따르면 강유와 촉군이 이런 진태의 갑작스런 진격에 놀랐다는데 배송지는 강유가 복병을 미리 배치해 둘 정도라면 강유가 이 진격을 예상했다는 것이므로 놀랐다는 건 앞뒤가 안 맞는다고 진태전 본전을 비판했다.] 강유는 일부 군사를 인솔하여 산을 타고 진태의 군사를 습격했으나, 이미 고지에 자리잡은 진태에게 이길 수 없어 돌아갔다. 이어 양주의 위군까지 금성을 지나 적도로 오고 있었고 진태와 왕경이 비밀리에 날짜를 정하고 함께 강유의 퇴로를 막으려고 하자 이 계획을 들은 강유군은 즉시 퇴각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강유가 물러난 것은 9월 25일이었다. 구원받은 왕경은 "식량이 열흘 분도 안 남았습니다. 만일 때에 이르러 구원병이 오지 않았다면 성을 들어 궤멸해 옹주를 잃었을 것입니다."라며 진태에게 감사했다니(진태전) 자칫하면 강유에게 옹주 전체를 빼앗길 뻔할 정도로 위나라의 피해가 정말 막대했던 것이다. 강유전에 따르면 전사자가 물경 수만 명이고 진태전에 따르면 왕경이 만여 명이나 남은 병력을 통솔하여 돌아와서 위나라 영토 깊숙한 곳의 적도성을 지키고 있었음에도 상황이 매우 위급했으며, 그 나머지 병력은 그냥 격파되어 흩어진 정도가 아니라 (통제를 벗어나)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 보면 전사자 수만에 모두 도주한 나머지 병력을 빼고도 패잔병으로만 만여 명이 남았을 정도라면 가히 수만~5만명 이상[* 5만을 넘으면 자칭 10만이라고 일컬수도 있는 대병력이다.]의 대 병력이 강유에게 뼛속까지 탈탈 털렸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당시 격파된 옹주군은 중요물자인 식량이 열흘 분도 못 남았을 정도로 철저하게 물자가 털렸고 진태는 강유가 종제로 후퇴한 이후 상규에 주둔해 남은 병력들을 위로하고 이들을 모두 본국으로 소환시킨 다음 따로 사람을 보내 지키도록 하였으며(=기존 병력을 전력으로서 쓸 수 없어 새 병력을 투입해야 했으며), (망가지고 부숴진) 성채와 보루를 수리하는 등 이 지역 수습에 상당한 공을 들여야 했던 것으로 봐서 남은 만여 명도 전투를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상했고 방어시설도 많이 망가진 것으로 보인다. 사실 강유의 북벌을 살펴보면 부족한 자원과 본인의 전략적 열세를 한판의 대승으로 타개하려는 의도가 역력한데 실제로 조수전투에서는 순수한 전술적 승리로 등애마저 농서일대를 포기하자고 건의할만큼의 전략적 승리를 거둘 뻔했다. 다만 강유의 전략적 식견을 파악하고 있는 인재들이 곽회, 등애, 진태를 비롯해서 위측에 여럿 있었기 때문에 강유는 결코 성공을 거둘 수 없었다. 어쨌든 강유는 완전히 퇴각한게 아니라 이 해의 전공으로 위나라 영토의 좀 더 깊숙한 곳, 종제까지 진출할 수 있었으며 이는 강유가 최소한 관중의 일부분을 점유하고 있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더불어 비의 사후 공석이었던 대장군으로까지 승진한다. 이 무렵 위나라 입장에서 강유의 위협은 단곡전투 후에 조모의 조서에서 "역적 강유가 해마다 교활한 행동을 하여 백성들과 만족을 동요시켜 서쪽 땅은 편안할 수 없었다."로 언급될 정도로 적극적이며 지속적이었다. 이 시기 강유의 행적은 촉한에게 있어선 마지막 절호의 기회였다고 평가받는다. 촉한이 북벌에 나서 이정도의 성과를 거둔 적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고, 또 대승을 거둔 곳이 적도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 가치는 더욱 커진다. 촉한의 북벌은 위나라에 큰 선을 그어 량주 일대를 먹어 버리는 것에 중점을 둔 적이 많았는데, 이런 목적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때가 바로 이 때였다. 하지만 위나라에는 진태, 등애와 같은 대촉 전문 장수들이 있었다는 점. 그리고 그들의 전략적, 전술적 시야가 강유를 앞선다는 점 때문에 촉의 북벌은 실패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