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유 (문단 편집) === 유선 시대 (258년~263년) === 단곡 전투의 성공으로 [[등애]]는 진서장군[* 등애전에서 256년의 군공으로 등애가 도독농우제군사에 진서장군으로 임명되었다고 서술된 것이 무색하게 [[자치통감]]에서는 굉장히 다른 내용을 서술한다. 자치통감에 의하면 257년에 이르어서는 사마망이 진태를 최종적으로 승계해서 정서장군 도독옹양제군사를 맡았으며 안서장군에서 진서장군으로 승진했다던 등애는 도로 안서장군으로 강등당했다. 중요한 점은 사진장군과 사정장군은 직관지상 사정>사진으로 서열이 정해져있다 한들 서로 한 전선을 총괄한다는 역할은 동일해서 진서장군이 존재한다면 정서장군을 임명하지 않는게 관례였다. 요상하게도 250년대의 위나라는 이 관례를 어기는 모습을 보인다. 만약에 [[자치통감]]의 기록이 오기이며 257년의 등애가 안서장군이 아닌 진서장군이 맞다면 대촉전선에서도 정서장군 사마망과 진서장군 등애라는 괴상한 인사배치가 단행된 셈이다.]으로 승진했으며 도독농우제군사로 임명되고 양주 서쪽 지역의 방어시스템을 안정적으로 구축할 수 있게 된다. 강유와의 전쟁을 통해 처음으로 검증된 등애의 방어시스템은 상당히 효과적이었던 걸로 보이는데, 이 시스템은 이후 진나라까지 계승돼 서북방에서 준동하는 강인들을 막는 데 활용될 정도(등애전)였다고 한다. 이는 뒤집어 말하자면 강유 개인의 경험과 흥세 전투 등으로 확보되어 온 관서지역에서의 강유의 영향력이 단곡전투 이후 상당히 약화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단곡전투의 결과 농서 지역에 이민족의 소동이 있었다는 정사 기록으로 볼 때, 255년까지 강유의 북벌에 큰 부분을 차지했고, 본인도 북벌의 유리한 요소라 판단했던 이 지역 이민족과 주민들과의 강고한 연결고리가 상당 부분 약화된 것으로 보인다. 257년에 강유는 [[제갈탄]]이 봉기한 틈을 타 수만 명을 이끌고 장성을 습격했지만 [[사마망]]과 [[등애]]는 방어만 하고 싸움에 응하지 않았다. 이때 회남의 제갈탄을 막고자 관중의 병력이 동쪽으로 차출됐다고 하는데, 강유는 이 틈을 노려 진천(秦川) 지방을 목표로 수만 명을 이끌고 낙곡을 나서 침령에 다다랐다. 이 때 진천의 관문격인 성채 장성(長城)에는 비축된 양곡만 많을 뿐 수비병이 적어 관원 대다수가 몹시 두려워했지만, 진태의 후임 정서장군 [[사마망]]이 투입되고 진서장군으로 옮긴 등애도 농서로부터 적시에 지원을 오는 바람에 강유는 또 막히고 만다. 강유는 망수(芒水)에 군영을 설치하고 연거푸 싸움을 걸었으나, 회전을 벌이기에는 다소 병력이 적다고 판단한 사마망과 등애는 미동도 하지 않고 방어로만 일관[* 사실 제갈탄의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사마씨 정권은 20만 대군을 동원해 대촉 전선의 전력이 필연적으로 감소했을 것이므로 257년에 이뤄진 강유의 북벌에서 256년 단곡전투에서 확립된 등애의 방어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기 어려웠다. 따라서 257년 당시 관서지역 내에서 군세 자체는 이전 단곡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촉군의 우위로 볼 수 있다. 그래서 257~258년 서북 전선의 대립은 전력이 부족했던 위군이 사마의식 견벽거수를 고수하고 강유가 이끄는 촉군은 계속 싸움을 거는 구도로 과거 제갈량의 북벌 시대의 고전적인(?) 조위과 촉한의 싸움 형태로 복귀한 것이다.]한다.[* 257년에 강유를 막아낸 공로를 인정받은 등애는 정서장군으로 승진한다. 그러나 도독옹양제군사에 대한 언급이 없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이 해, 연이은 출병으로 촉한 사람들이 근심하고 고뇌해 [[초주]]가 [[진지(삼국지)|진지]]의 협조하에 <구국론>을 짓는다. 요약하자면 조위가 비교적 안정적이고 백성들도 전쟁에 피곤을 느끼니 조위에 변란이 생길 때까지 촉한은 기다려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정작 <화양국지>에 따르면 초주의 <구국론>을 '사람들이 살펴보려 함이 없었다(人莫察焉).'라고 적었다. 당대의 촉한 내정의 1인자인 진지의 협조를 받아 지은 논문이었는데도 왜 사람들의 호응이 없었는지는 의문이지만, 초주는 툭하면 부정적인 도참을 내뱉는 사람인데다가 [[양희]]전 기록엔 대놓고 사람들이 그를 낮게 평가해 존중하지 않았다는 얘기까지 있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당시 위나라가 천하를 잡을 것이라는 당도고 도참이 다시 성행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나 촉인들이 강유를 원망하는 마음이 깊었다는 일련의 서술을 보면 당대 강유의 무리한 북벌이 상당한 내부 불만을 일으킨 것은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강유 북진 이전인지 이후인지는 다소 애매하지만 아무튼 강유는 북진했다. 257년의 북벌은 253년 북벌의 재림이라고 할 만한데 조위는 제갈탄의 봉기로 인해 관서지역의 병력까지 차출하면서 양면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으니 강유 입장에서는 나름 호기였을 것이지만, 아쉽게도 강유 역시 이전처럼 전쟁을 진행할 정도로 여유로운 상황[* 253년 북벌에서 제갈각의 요청으로 갑작스럽게 나선 것처럼, 257년도 조위의 갑작스러운 정세 변화에 기인한 북벌로, 당시 강유는 준비가 충분치 못함에도 상당한 위군이 대오 전선에 동원된 것을 알고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해 무리해서 나선 면이 있다. 사실 강유가 단곡에서 이기거나 최소한 손해 없이 돌아왔더라면 257년 북벌에서 강유가 나쁘지 않은 사기와 촉한 중앙의 지원을 받아 훨씬 큰 성과를 거둘 가능성도 있었겠지만, 촉한 조정과 군부에서도 강유와 북벌에 대한 비판 여론이 한창 고개를 들었었으며 단곡에서 중간 장수급들을 꽤 잃은 상황이었기에 상황이 그리 좋은 것은 아니었다. 물론 진지와 초주가 연계한 <구국론>이 북벌에 대한 촉한 사람들의 여론 설득에 실패해 강유가 북벌 자체는 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은 아니었다. 결국 258년이 밝았고 제갈탄의 패배 소식을 듣고 강유는 퇴각한다. 그리고 성도로 돌아와 다시 대장군에 오른다. 이 때 강유가 대장군직에 다시 오른것은 촉한 군부의 체제 변경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한마디로 장익, 요화 같은 군부 원로 인물들에게 거기장군을 나누어 좌거기, 우거기 고위직으로 나누어 주었는데 촉한에서 가장 뛰어난 상장인 강유가 후장군으로 남아 있으면 그것도 모양새가 보기 안 좋으므로 강등 이후 단곡 전투의 패배를 만회할 만한 전공이 없음에도 다시 대장군으로 복직했다는 설이다. 확실히 촉한 군부의 명령 체계의 혼란을 막기 위해선 강유의 위치를 다시 바로 잡을 필요성은 있었다고 보여진다. 문제는 258년, 강유가 대장군에 복귀할 무렵 진지와 거기장군 하후패가 같이 죽[* 다만 하후패의 죽음은 약간 복잡한데 이는 [[하후패]] 문서 참조.]는다. 강유가 대장군에 복귀하기 전의 직책으로만 본다면 진지가 내정 1인자, 하후패가 명목상으로나마 군정 1인자라 내정과 군정에 모두 공백이 생긴 셈으로 이전의 전례로 따지면 강유가 맡는 것이 촉의 권력구조상 합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강유의 연이은 북벌은 결국 마땅히 유의미한 땅을 늘리는데 실패했고 병사와 물자의 소모만 가중시켜 촉한에선 강유에 대한 불만이 많은 상태였으며 그가 그것을 뒤집을 만한 기반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때문에 강유는 점차 성도 조정에서 고립되어 자신의 군권만 믿는 신세가 된다. 강유는 유선에게 황호를 처단하라고 건의까지 했으나 유선이 거절하면서,[* 이 때 역사서에서 황호와 유선의 관계를 나뭇잎과 가지에 비유했다. 그 친밀함이 이와 같았다.] 내정을 확고히 틀어쥐기는커녕 성도에 머물기도 어렵게 된다(강유전). 즉, 강유는 대장군에 녹상서사를 겸직하고 있어서 형식상으론 조위의 사마소/사마사 형제와 같은 절대권력의 지위였지만, 이미 황실에서나 조정에서나 신뢰를 다수 잃어버린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일단 촉의 군권을 틀어쥔 위치에 있었고 이는 촉 조정에서 강유를 탄핵해서 그의 군대남용을 막아야 한다는 시작이 일치하고 있었음에도 강유를 막지 못하는 원인이 된다. 애초에 무관이자 제갈량 시절부터 북벌에 참여했던 강유는 귀순 직후를 제외하면 필연적으로 변방에 나가서 전투에 참여하거나 촉한 내외의 강족들 같은 이민족들을 회유하고 그들과 친선을 다져 북벌에 유리한 여지를 만들면서 군권을 쥐었을뿐이지 정치적 기반이 튼튼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더욱 북벌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할 필요가 있었고 실제로 몇몇 전술적 성과 덕분에 그는 대장군까지 권력을 틀어 쥘수 있었다. 그러나 역대급 패배인 단곡 전투 패전까지 뒤집을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 이후로도 눈에 띄는 전공을 세우지 못한 강유는 중앙 정계에서 큰 발언권을 얻지 못했으며 황호 세력과 형주 사인계층의 우두머리격인 제갈첨 세력 등은 이제 촉에서 그의 소용은 다했다고 보고 그를 탄핵하려 했다. 결국 이 당시 강유가 믿을 것은 군권 뿐인데 요화, 장익 등 군부 내에서의 원로들조차도 강유를 반대할 정도로 그의 지위는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오히려 이러한 위태로운 정치적 기반과 불리한 정세 하에서도 녹상서사 겸 대장군 벼슬을 유지한 것이 신기할 정도이다. 다만 240년대에 장완과 비의는 각각 개부의 명령을 받고 북벌을 준비했었고 강유는 비의와 진지의 태클에도 불구하고 계속 승진하면서 북벌을 진행하는데 [[내민]]의 아들 내충(來忠)이 참군이 되고 상서 상충(尙充) 등과 함께 대장군이 된 강유를 보좌했는데 이걸 유선이 강유에게 개부치사를 허락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적어도 유선이 강유를 대장군 직에서 물러나게 하기엔 강유가 군권을 지닌 시간이 너무 길었고, 당시 촉군의 중추인 촉 북벌군은 오랜 기간 강유가 장악한 상황이었다. 즉 강유가 지나치게 오래 군권을 잡고 그 독선적인 행보로 인해 조정과 한중막부의 군부 원로들에게 경시되면서 오히려 이 무렵의 강유는 조정과 한중막부와 유리되어 독자적인 준군벌이나 다름없은 좀 이상한 상황이 되었다.[* 다만 강유의 247~249년 강족 연계만 북벌만 해도 조정의 허락없이 북벌을 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니었고 강유가 북벌을 강행했다고 보긴 어렵다, 적어도 비의 생전에는 북벌을 무작정 강행할 수 없는 위치였다. 강유의 장기간 북벌이 지나치다는 평가를 받은것은 254~258년 북벌이었다.] 그가 군권을 홀로 이끌던 시기에 원래 제갈량이 머물던 한중이 아니라 무도, 음평 지역에서 머물던 것만해도 이는 분명해지고 황호와의 갈등 이후 답중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촉 조정에서 강유 탄핵의 여론이 불고 있었음에도 그를 어쩌지 못한 것에서도 이는 분명해진다. 그래서인지 유선은 황호를 강유에게 보내 사과시키고 대충 끝내려고 했고, 유선의 복심인 황호는 강유에게 사과하는 형태를 취하며 강유는 답중으로 가서 둔전을 하겠다고 하는데 아마 서로를 위협하지 말자는 협상, 혹은 강유에 대한 촉 중앙정부의 통제력 상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의는 여기에 약간 살을 붙여서 강유를 존경했던 [[극정]]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묘사한다. 실제 역사에서도 극정이 강유를 매우 고평가한것은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촉 조정은 강유를 제거하여 국정을 안정시키는 최선책이 실현 불가능하자, 타협을 통해 강유를 방치하고 둔전을 통해 촉 북부에서 위군을 대비할 수 있는 역량을 마련하게 하는 차선책, 혹은 강유의 답중 주둔을 실질적으로 막을 방도가 없어 방치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이 무렵 강유는 후에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게 될 일을 하게 되는데... 바로 '''한중의 방어 시스템을 바꾼 것이다.''' 원래의 한중의 방어 시스템은 [[유비]]가 과거 한중을 [[조조]]에게서 빼앗은 후 [[위연]]과 [[왕평]]이 확립했던 [[우주방어]] 시스템인데, 이 제도에 강유가 손을 댄 것이다. 기존 한중 방어체계는 한중 천혜의 험요지를 이용한 것으로, 매우 견고해 방어가 쉬우며 들어가기조차 힘들어 위군이 함부로 침입할 수가 없었다. 조진과 조상이 각각 쳐들어왔으나 모두 막히고 적지 않은 피해만 입고 회군하였다. 그러나 강유는 이 시스템으로는 적의 포위섬멸을 노릴 수 없어 조위에게 회복불능의 타격을 입힐 수 없으니 북벌의 활로를 찾으려면 기존 시스템을 변경할 것을 주장하였다. 일단 정사 강유전에 나온 강유 자신의 설명을 보자면 다음과 같다. >이 방법은 《[[주역]]》의 중문격탁(重門擊柝)에는 부합하지만(여러 진영을 교차시켜 수비하는 것은 방어할 수는 있지만) 큰 이익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흥세 전투는 뭐냐고 할 수 있지만 그건 조상이 이미 진 싸움임에도 철수를 미루다가 비의군에게 궤멸당한 것이고 진태나 등애 같은 장수들이면 그런 피해를 입힐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당장 그들의 선임 곽회가 '크게 패하지 않아 절을 수여받았다.'라고 기록이 남아 있다.] ……만약 적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여러 진영에서 모두 군사를 거두고 곡식을 모아 한성과 낙성으로 물러나 적이 평지로 들어오게 하고[* 자치통감 기준, 정사 삼국지엔 '적이 평지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정사 삼국지의 말 대로라면 이전 방어체계와 바뀐 것이 없으므로 자치통감의 기록이 더 개연성이 있다.], 중요한 곳에 병사를 주둔시켜 수비하도록 하는 것만 못합니다, 유사시에는 유격병을 투입해 빈틈을 노립니다…… ……적군은 관소를 공격해도 함락시키지 못할 것이고 들에 흩어져 있는 식량이 없어 천리 떨어진 곳까지 식량을 운반해 와야 되므로 자연스레 피폐해질 것입니다. 적군이 퇴각하는 날, 여러 성에서 일제히 나와 유격대와 함께 힘을 합쳐 치도록 하십시오. 이것이 적군을 전멸시키는 방법입니다. >이에 독한중 [[호제]]는 물러나 한수에 주둔하게 하고, 감군 [[왕함]]은 낙성을 수비하고 호군 [[장빈]]은 한성을 수비하게 하였다. >서안(西安), 건위(建威), 무위(武衛), 석문(石門), 무성(武城), 건창(建昌), 임원(臨遠)에도 수비 거점을 마련하였다. 즉, 외부의 요충지에서 적을 격파하는 대신 한중 내부 주요 거점[* 특히 낙성과 한성, 종회전에 따르면 촉나라는 각 보루에 주둔해 있는 병사들에게 명령하여 모두 싸우지 말고 물러나 한과 낙 두성으로 돌아와 지키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요충지에 병력을 배치하고 광범위한 청야작전을 실행하여 적을 끌어들이게 한 다음 굶주리게 하고 적이 군량을 소진하면 후방으로 빠진 기존 주둔군과 별동대가 전후에서 포위해서 섬멸한다는 계획이었다. 강유는 점차 조정에서 군권외에는 자신의 권력을 뒷받침할 기반이 사라지자 이같이 촉의 강역을 열어 위군을 섬멸한다는 도박적 계획에 심취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유비, 위연, 왕평이 촉의 객관적인 약세를 냉정히 판단해 수립했던 상식적인 작계가 아니었다. 이에 대해 호삼성 등 여러 사람들이 고래로부터 현대까지 험요지를 내준 강유를 비판하고 있다. 이들이 가장 잘 내세우는 이야기가 흥세 전투다. [[흥세 전투|조상의 대대적인 침입으로]] 유비의 방어 시스템을 작동시켜야 했던 243년 당시 한중에는 주둔 병력이 3만 내외로 매우 적었으므로 대부분의 장수들은 한중 기존 방어 시스템을 포기하고 낙곡까지 후퇴하여 적을 맞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왕평이 분연히 요격을 주장하며 한중 내부 요새들의 방어 병력 및 자신 직속의 3,000명으로 유격전을 벌여 7만 대군의 조상군 본대를 지체시키고 그 사이에 비의의 증원군이 도착하자 아예 박살낸 것이다. 강유는 흥세 전투에서의 처참한 패배에도 불구하고 곽회의 현명한 판단으로 운 좋게 보존된 3만 여의 옹주군을 10여년 후, 후임 옹주자사인 왕경과의 전투를 통해 대파하였다. 흥세 전투에서 조수전투까지 대략 10여 년이란 기간이 있기에 어느 정도 교체가 이루어졌겠지만, 그래도 조수전투 당시 왕경이 이끄는 옹주방위군은 흥세 전투에서 조상 본대가 위험에 처하자 독자적으로 철군을 감행한 곽회의 현명한 판단으로 운 좋게 보존된 옹주군과 대략적으로 일치할 것이다. 오히려 등애가 옹주를 포기하자고 할 정도로 대패를 당했음에도 만여 명이나 위군이 남은 것으로 봐서 강유가 격파한 왕경의 군대는 곽회가 보존한 3만 명의 군대를 훨씬 상회하는 병력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문제는 그 정도까지 강유가 조위의 관서 방어군을 대차게 갉아먹어도 하북과 중원을 장악해 삼국시대 기준으로 넘사벽 물량을 자랑하는 조위의 특성상 그 피해를 조위가 회복해버린다는 것이었다. 적도 전투에서 숙장 장억을 희생시켜가며 서질의 정촉호군을 대파했지만 위의 지원병을 상대하기에는 무리라 퇴각, 왕경과의 전투에서 수만 명을 때려잡는 엄청난 타격을 주었음에도 또 진태가 지원 와서 퇴각, 왕경의 패배가 너무나 심각해서 등애가 단곡 전투 당시 '거의 망할 지경이고 병력지원이나 병기 상태도 부족한 허약한 상태다.'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래도 당시 등애 휘하엔 네 곳의 요충지에 분산시켜 수비시킬 병력이 또 있었다. 257년에도 제갈탄의 난 진압을 위해 대촉 전선의 병력이 많이 차출되어 '수비병이 적어 사람들이 근심하였다.'고 기술되어 있지만 진서장군 등애와 정서장군 사마망이 어떻게 또 꾸역꾸역 지원을 와서 촉군과의 전면전까지는 아니더라도 수비는 가능한 상황을 만든다. 2년 간 종횡무진하며 옹주를 피로 물들인 강유였다. 강유의 군재에 대해 이래저래 논란이 있지만 삼국의 정립 이래 조위가 국력 면에서 확실한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구도가 확립된 상황에서 조위에 수만에 달하는 인적 손실을 안겨 준 인물은 삼국시대를 통틀어 손에 꼽을 정도이다. 만 명의 수급을 취했다는 석정전투의 육손, 수만 명을 전사시켰다는 동흥제 전투의 제갈각, 흥세 전투에서의 왕평과 비의 정도이며 조위가 아직 건국되진 않았으나 그 세력은 형성되어 있던 조조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적벽대전에서의 유비와 주유, 때마침 일어난 수해를 철저히 이용해 포로로만 3만 명을 사로잡은 관우, 동관전투에서 조조 군에게 만 단위의 피해를 입혔다는 리즈시절의 군벌 마초 정도이다. 이 중 대부분은 수비의 입장이었고, 강유 같은 공세 입장이었던 경우는 마초와 관우이나 최종적으로 위에 의해 패해 그 세력을 모두 잃어버렸다는 것을 감안할 때 강유의 전과가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강유의 스승격인 제갈량의 경우 북벌 기간 전체를 통틀어 마땅한 성과 없이 광회나 비요를 몇번 물리치고 위나라가 백성을 다 빼간 무도와 음평을 손에 넣는것외엔 성과가 없었다. 사마의와 야전에서 맞붙은 노성전투에서 수급 3천개, 갑옷 5천 벌, 각노 3,100 장을 노획한 것으로 볼 때 상당한 피해를 입히긴 했으나, 이후 퇴각과정에서 사마의에게 사로잡히고 참수당한 인원이 만으로 헤아리는 대패도 당했다. 즉 제갈량은 1차 북벌의 기습을 제외하고는 강유나 관우처럼 조위의 한 지역 자체를 완전히 뿌리채 흔들릴 만한 타격을 입히지는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위의 국력은 크고, 요화가 지적했듯이 강유가 그를 기반으로 한 대촉 방어선의 위장들을 이길 정도로 전술적, 전략적 능력이 뛰어나지도 못한 상황에서 이를 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강유는 단곡 전투, 257년 북벌을 통해 뼈져리게 깨달았어야 했다. 이미 강유가 1만명의 군사를 거느린 시절부터 비의가 은근히 제갈량과 비교하면서 강유가 그런 능력이 되지 않는다고 우회적으로 얘기했는데도 해당 기록에 나오듯이 강유는 자신의 재능을 지나치게 과신했다. 설상가상으로 자신과 더불어 촉한 군부를 지탱하는 숙장들인 요화, 장익도 북벌에 부정적이고 황호와 타협을 통해서 군권 1인자도 겨우 사수할 정도로 냉랭한 촉한의 정계 등 모든 것이 강유에게 불리하였다. 강유의 비판자들은 그렇기 때문에 더욱 촉은 태생부터 한중을 내주지 말고 단단히 수비해야 했다고 이를 비판한다. 이미 정면에서 강유 자신의 능력으로든 촉의 국력으로든 위를 뚫는 것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수세에 몰린 상황이라면 좀 더 단단한 수비를 구축해야 마땅하지 촉한의 목숨줄이라고 할 수 있는 한중을 내주는거 자체가 도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강유는 이런 상황에서 촉이라는 칩을 걸고 단곡 이상의 더 위험한 도박에 발을 디뎠다. 따라서 강유의 한중 방어체계 변경 의도는 1.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던 공격보다는 수비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 반 강유파들의 불만을 가라앉히고 2. 대규모 위군이 쳐들어오면 이를 퇴각할 수 없게 만들고 섬멸하여 위의 대촉 전선 공백을 초래하게 해 북벌의 활로를 찾고 3. 설령 북벌의 활로까지는 아니더라도 위가 당분간 촉을 공격하지 못할 상황을 만드는 큰 전공으로 군부에서 실추된 자신의 입지를 회복하며 여차하면 안전해진 전방을 잠시 비우고 중앙 정계로 들어와 발언권을 확실히 세운다 라는 발작적 도박의 의도였던 것이다. 이에 강유는 실제로 촉한 멸망까지 소규모 접전으로 추정되는 후화 전투를 제외하면 적극적 공세로 나서지 않는다. 또한 여러 사람들의 비난을 받던 강유였는데 정작 방어체계 변경에 대한 반대 기록이 없는 것으로 봐서 일단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에 찬성하여 무난하게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바뀐 방어 시스템의 개념과 이전 시스템의 차이를 설명해보면... 지도를 보면 [[왕평]]이 만든 방어선(정군산 부근이다)보다 강유의 방어선(한중 남쪽이다)이 남쪽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이는 이전 방어선과 아주 다르다고 할 수도 없는것이 한성은 면양현, 낙성은 성고현에 세워진 성인데 이 두 성은 제갈량도 주둔했었고 특히 성고는 조진의 촉정때 제갈량이 주둔했었다. 게다가 황금성은 흥세 전투 당시 왕평이 주둔하던 곳인데 촉한멸망전 당시 이 성을 수비하던것은 강유의 오른팔 [[유은]]이다.] 이는 위군의 공격 시 각 촉군의 배치 및 맡았던 임무가 달라졌음을 뜻한다. 왕평이 한중독을 맡고 있을 때 일어났던 낙곡전투 당시 한중군은 험요지를 점거해 외곽 방어선을 유지하며 후방 교란을, [[비의]]가 이끌고 올라온 중앙군은 위군의 포위 섬멸이라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강유의 전략은 유사 시 한중군은 험요지를 버리고 주요 거점의 수비를 맡고, 강유가 직접 이끄는 답중군, 혹은 중앙군이 적의 교란과 포위섬멸을 맡았으며 중앙군은 여기에 더해 각 요충지 지원과 점거, 필요 시 한중의 주요 거점 지원의 역할을 맡고, 만약 강유가 중앙군이 아닌 답중군을 이끌 경우 기동로 확보의 역할도 맡는다. 이러한 방어선 재배치와 역할 변화는 위의 대군을 한중 내지로 깊숙히 끌어들이기 위한 의도도 있지만 강유가 이끄는 답중군의 병력을 증강하기 위해 한중군과 중앙군의 전력을 감소시킬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왕평 시절까지만 해도 한중은 최전방 사령부에 가까웠지만 강유 시절에는 한중에서 서쪽으로 음평을 지나야 있는 답중이 최전방 사령부이며 북벌부대 본진의 성격을 띄었다. 한정된 촉군의 규모(9~12만)를 생각하면 답중으로 전력이 집중될수록 한중지역 전력은 감소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를 대비해 강유는 한중 내부 각 요충지에 여러 수비거점을 많이 만들고 강화시켜 한중분지 내부의 방어력을 향상시키는데 주력했다. 또한 한중의 방어가 무너지면 자신이 이끄는 자신이 이끄는 답중군은 물론 촉한 내지도 큰 위험에 처하게 되므로 단곡에서의 실수(?)로 인해 작전 하나를 화끈하게 말아먹은 인물인 호제를 일치감치 후방으로 물러나게 하였다. 다만 이 당시 한중에 세웠던 수많은 방어기지는 사마소 촉정에 무기력하게 무너졌고 장서의 배신으로 양안관구도 무너짐으로써 강유가 제대로 된 인선을 했다고 볼 수는 없게 되었다. 결국 한중은 촉정 당시 주요 방어거점 가운데 한성, 낙성, 황금성만 간신히 함락되지 않고 버티는 수준이었다. 종회는 양안관구의 식량을 획득했음에도 강유가 예상한 대로 보급에 난항을 겪었으나 만약 종회가 한중으로 돌아가 한중에 남은 촉의 거점을 함락시키고 한중을 완전히 장악했을 경우 강유로썬 마땅한 대책이 없었다. 실제로 강유가 계획했던 청야는 사실상 실패했고 위군은 한중 분지 대다수를 차지함으로써 당초 강유의 계획은 완전히 뒤틀려버렸기 때문이다. 258년, 수비 시스템을 바꾼 강유는 262년까지 답중에서 둔전하며 지낸다. [[황호]]를 죽이라고 건의하지만 거절하는 유선 덕택에 감히 성도로 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강유는 본래 항장으로 나라에 의탁하였는데 여러 해 공적(功績)을 세우지 못하였는데다가 황호가 국정을 농단하고 우대장군(右大將軍) 염우가 황호와 더불어 결탁하니 대장군 교체 시도가 있었다. 강유 또한 이를 의심하니 이 때문에 스스로 두려워하여 다시 성도로 돌아가지 않았다.(강유전) 설상가상으로 [[제갈첨]], [[동궐]]등은 강유가 공적이 없다하여 그를 소환하여 익주자사로 삼고, 그 병권을 빼앗아야 한다고 표를 올렸다. 그러나 유선은 제갈첨, 동궐의 주장과 황호의 찬성에도 강유를 여전히 대장군으로 놔두었다. 자리를 보전한 강유는 262년, 적도를 향해 마지막 북벌을 감행했으나 출발하기 전에 [[요화]]의 디스만 듣고 [[등애]]에게 또 다시 대패한다. 강유의 주요 패배에 '단곡', '후화'가 함께 언급될 정도이니(종회전) 단곡의 패배 규모를 감안한다면 후화 전투에서의 강유군 패배 규모 역시 작지 않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