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유 (문단 편집) === [[촉한멸망전|촉한의 멸망]](263년~264년) === 262년 무렵, [[사마소]]는 자꾸 귀찮게 구는 세력을 없애 사마 씨 왕조를 만들 목적으로 본격적으로 촉을 치기로 결심한다. 사마소는 강유가 변방지역을 자주 소란하게 하자, 촉나라의 국토는 작고 백성들은 피곤에 지쳐 있으며, 자원과 재력은 매우 적어 다 썼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병사를 대거 출동시켜 촉나라를 취하려고 했다. 사마소는 다른 이들에게 알리지 않고 오로지 종회하고만 정촉을 논했으며(종회전) 결국 무려 16만(정사 삼국지, 자치통감)~18만의 대군(진서 문제기)을 편성하고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촉을 억지로 단행했는데 심지어 촉정의 불가함을 아뢴 장군 하나를 죽여버리고 그 목을 사방에 보여 경고의 의미로 삼기까지 했다. 정촉 기간 중 사마소는 진공이 되었고 촉한 정벌 직후엔 곧바로 진왕이 되어 제위 찬탈로 가는 길을 확고히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촉한 정벌의 공을 진나라 개국의 반석으로 세울 생각이 확실했던 듯 싶다. 사마소는 선박을 건조하여 [[오(삼국시대)|오]]를 치러가는 척 하며, [[종회]]를 도독, 등애와 제갈서로 하여금 촉 정벌 군단을 편성한다. 종회는 이 시기부터 배를 만들어 오를 친다는 소문을 내고, 이 때 즈음에 강유가 후화 전투를 벌인다. 물론 오를 친다는 소문은 거짓이었다. 본디 위의 방침 자체는 내부적으로 막장 테크를 신나게 타고 있던 오를 먼저 치고, 촉 전선은 방어에 전념하는 것이었다. 사마소가 정촉으로 방향을 튼 것은 강유의 연이은 북벌에 질린 나머지 일단 공세라도 꺾자는 생각으로 단행한 것으로 보는 게 맞다. 이에 종회가 정촉의 가능성을 언급하고 등애를 설득시켜서 정촉이 이루어진 것. 또 사마소는 촉한의 역량 자체를 과소평가하고 있었는데 촉한의 병력을 실제 보유 병력보다 적게 계산하거나[* 사마소는 촉한의 전병력을 최전방 배치 5만명+각 지역 수비군 4만명 정도로 보았다, 실제로 정촉이 끝나고 촉한에 남은 병력이 10만 2천인데 위나라와의 전투에서 소진된 병력을 생각하면 적어도 12만 정도는 있었을 거라 보인다.] 촉이 소국이니 백성들이 피곤하고 그 역량이 다 했을 거라고 여기는 모습을 보였다. 사마소는 유선이 어리석기 때문에 강유를 잡아두고 [[검각]]만 돌파하면 촉을 정벌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사실 유선이 어리석다던가 촉의 역량이 다했다는 일종의 사족에 가깝고 '''근본적으로는 강유가 지나치게 서쪽 답중에 병력을 집중시켜 촉의 최중요 요지인 한중의 방어선이 약해지고 답중에 강유를 고립시키기 쉽다'''는 점을 사마소가 간파하고 이를 이용하면 정촉도 가능하다고 여긴 것이 컸다. 당시 오의 사신 [[설후]]는 [[손휴]]에게 '촉의 중신들은 자기 보신에 바빠 바른말을 하고 있지 않으며 백성들의 얼굴빛이 채소빛이다'[* 다만 설후의 이 보고는 비록 유선의 촉한조정을 보고 말한 것이지만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손휴에게 넌지시 권하는 것이라는 권중달 교수의 평가가 있다.]라고 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오나라의 [[장제(손오 승상)|장제]]는 '촉한은 환관이 전횡하여 나라에서는 정령을 내리지 못하고 군사활동을 즐겨 백성들은 고단하고 병사들은 지쳤다는데 밖에 있는 이익을 다투어 지킬 준비를 못하였소'라고 평가하고 있어서 환관의 전횡과 강유의 북벌로 인해 백성들은 힘들이고 병사들은 지쳤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다. 그렇지만 같은 오나라의 [[육개]]는 비록 군주는 사치스럽고 백성들의 힘을 긴급하지 않은 곳에서 고갈시켰다고 까긴하나 촉한의 멸망 당시 병사들은 대부분 정예이고 강하였으므로, 문을 닫고 굳게 지키면 만대를 보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하고 촉군의 강함을 증언하고 있으며 [[화핵]] 역시 적이 서쪽으로 개미때처럼 몰려들었을때 걱정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했으며 촉나라는 토지가 험하고 견고하며, 게다가 유비의 통치 방법을 이었으므로, 그들의 수비는 오랜 시간 지탱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지, 하루 아침에 갑자기 전복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평가하고 있는데[* 화핵의 이 발언은 유비의 한중 수비체계가 당대인들이 보기에도 정상이고 강유가 벌언 최후의 방어 캠페인은 어째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 이해하기 힘들다는 증거기도 하다.] 실제로 촉한이 멸망하고 나서도 금/기/채견 60만필의 [[비단]]이 쌓여 있었다.[* 혹은 금/기/채/견의 80만필로 보기도 한다.] 위나라의 정서장군 [[등애]]는 촉한을 치기엔 저들이 아직 틈을 보이지 않는다고 정촉을 계속 반대했었고 정촉 이후엔 촉한의 소금, 철 자원을 잘 활용하면 내년 가을, 겨울 안에 오를 정복할 수 있다고 누누히 끝까지 자기 주장을 강조하다가 결국엔 누명까지 썼는데 촉한의 내정 상태가 생각보다 양호하다는 증좌로 볼 수 있다. 익주의 자원과 노동력은 여전히 풍부했다, 등애가 언급한것들 중 소금은 식량, 철은 무기 생산, 배 건조는 노동력과 관련이 있다. 강유의 북벌이 무조건적인 자원 고갈과 노동력 감소를 불러 일으켰다면 등애는 저 발언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역시 강유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비의 사후 강유가 벌였던 이런저런 북벌 캠페인은 10년 동안 죄다 처참한 실패로 판명났다. 하다 못해서 제갈량 마냥 일촌의 땅을 더 늘리기라도 한 것도 아니었다. 촉한 말기에 이르면 성도의 조정대신들이나 한중에서 강유와 함께 막부를 운영했던 군 원로들이나 강유가 가장 문제라는 인식을 공유했다. 제갈첨은 최후의 전투에서 강유를 탄핵하지 못한것을 깊게 탄식할 정도였다. 다만 답중에 틀어 박혀서 북벌군의 군권을 잡은 강유를 어떻게 탄핵해야 할 지 내부적으로도 의론이 통일되지 않은 상태였고, 군권을 잡은 강유에 대한 섣부른 숙청은 오히려 내란을 일으킬 여지가 있었기에 다들 주저했던 것으로 봐야한다. 강유의 비상식적인 작계가 통과된 것도 이렇게 강유를 어떻게 처리할 방도가 없는 상황에서 북방방비를 맡길 사람이 강유밖에 없었던 연유에서 였을것이다. 당시 원자에서 [[원준]]도 당시 위나라도 앞에 수춘전투가 있고 뒤에 촉을 멸하는 공로가 있으니 백성들은 가난해지고 창고가 비었다고 했으며. 오나라 인물들도 사마씨가 국정을 다스린 이래로, 큰 재난이 자주 이르러, 지력이 비록 넉넉해도, 백성은 아직 복종하지 않고 있다. 지금 다시 그들의 자력을 다하여, 파촉을 원정하며, 병사는 힘들고 백성은 피곤하나 가엾게 여김을 모르니, 무엇을 할 겨를도 없이 패할 것인데, 어찌 성공할 수 있겠느냐고 했을 지경이니 위나라 역시 군사를 동원하는데 사정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촉한도 나라 사정이 좋지는 않았지만 꾸준이 요지에 기대어 위를 방비하면서 촉한이 이기면 오히려 역전의 교두보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즉 당시엔 촉이 굳이 나라의 강역을 열어 스스로 위험을 자초할 이유가 없었다. 어쨌거나 이 무렵 사마소의 정촉 계획을 파악한 강유는 유선에게 [[요화]]와 [[장익(삼국지)|장익]]을 각각 음평교두와 양안관구(연의에서는 양평관)[* 지도상에서 표시된 두 곳이 다르다. 양안관구는 한중을 지나서 남쪽 길목에 있는 관문이며, 양평관은 한중에 도달하기 전에 위치한 관문이다. 연의에서는 양평관으로 통일되어 나오며, 자치통감도 양평관으로 통일되어 있으나, 정사 삼국지에서는 이 두 관문을 따로 표기하고 있다. 만일 이 두 곳을 같은 곳이라고 한다면, 조조가 장로를 칠 때와 종회가 부첨과 싸울 때의 설명이 모순된다. 조조는 한중으로 가는 상황이었고, 종회는 한중을 지나쳐서 진군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에 파견해 달라고 요청한다. 강유의 한중 방어 전략의 두 가지 핵심은 한중의 방어 거점들이 잘 버텨주는 것과 중앙군이 제 때 답중군과 유사 시 한중의 거점들 지원에 투입되는 것이었으며 특히 한중과 답중을 잇는 통로인 음평교두의 확보는 강유군의 기동로를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유선과 황호는 황호가 잘 아는 무녀가 위가 절대 안 처들어온다는 예언을 했다는 이유로 이 요청을 씹어버린다. 당시에는 강유의 보고를 받은 황제가 묵살했으니 중신들은 강유의 지원 요청이 있었는지도 알지 못했다고는 하나, 애초에 촉 조정에서 강유의 태도에 불만을 가진 이들이 소수가 결코 아니었으므로 강유가 또 군사를 남용하려 든다는 중신들의 불만이 다시 일어나 내분이 또 일으키지 않으려는 시도로 봐야 할 지도 모른다. 263년 여름, [[사마소]]는 정촉(征蜀)을 개시한다. 당시 정서장군 등애가 대촉방어체제의 마지막 실무자가 된 것은 확실해 보이나 263년에 단행한 촉정벌에서 총사령관은 서열상 정서장군 등애보다 낮고, 실무적인 경험도 등애에 비해 부족하며, 대촉전선에서의 공헌도 자체가 없는 [[종회]]가 역임하게 된다. 이는 종회가 사마소와 함께 직접 촉정을 기획한 최고 기획자이기 때문일듯 싶다. 이 정벌에 옹주자사 제갈서 또한 독자적인 군사력을 이끌고 참전한다.[* 이는 대오전선에서의 사정장군/사진장군 남발도 그렇고 진서장군 종회에게 총사령관을 맡게 한 것도 결국에는 지휘체계를 꼬아놓아서 지방관의 반란획책을 더욱 어렵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냐는 추측도 존재한다. 이런 의도성을 갖고 출범된 체제인지는 불명이나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결성하기 어려웠으리라는 점은 확실하다.] [[촉후주]]는 등애가 답중으로, 제갈서가 음평교두에서 강유의 뒤를 차단하기 위해 기산에서 무가로, 종회가 낙곡으로 진격한 이후 [[요화]]를 답중의 강유를 지원을 위해, [[장익]]과 [[동궐]]을 한중 지원을 위해 출발시킨다. 일단 요화는 답중에서 등애를 상대중인 강유를 돕도록 하였으나 이미 애초부터 답중에 지나치게 고립된지 오래인 강유군은 강천구[* 호삼성(胡三省)은 ‘강천구(彊川口)는 강대산(嵹臺山) 남쪽에 있었다. 강대산(嵹臺山)은 곧 임조(臨洮)의 서경산(西傾山)이다. 감인(闞駰)은 강수(彊水)가 음평(陰平) 서북쪽의 강산(彊山)에서 나오며 (강수를) 강천(彊川)으로도 부르는데 강유(姜維)가 돌아갈 때 등애(鄧艾)가 왕기(王頎)를 보내 추격하게 하여 강구(彊口)에서 패주시킨 곳이 바로 이 땅이라고 했다.’라고 하였다. 중국역사지도집 및 삼국지사전에서 비정하는 바에 따르면 강천구는 답중(沓中), 감송(甘松)의 서북쪽 또는 북쪽에 해당하므로 등애전이나 강유전 등에 기술된 당시 상황과 딱 들어맞지가 않는다. (강유가 퇴환하다가 싸운 곳이 답중의 서북쪽?) 이 지명 비정들에 어딘가 잘못된 점이 있거나, 아니면 강유가 답중에 쭉 머물며 등애군을 맞이한게 아니라 위군의 심상찮은 움직임을 포착한 뒤에 답중으로부터 북진해서 등애군을 요격하기 위해 조서 방면으로 출진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기는 정면으로 강유군을 직공, 견홍은 강유군의 예상 진격로를 차단, 양흔은 감송 쪽으로 향하면서 강유군의 뒤를 끊으려는 움직임. 그러다 종회의 대군이 이미 한중지역으로 진입했다는 소식을 접하고서 서둘러 남쪽 방면으로 퇴환하며, 선박을 이용해 조수-강수(강천)를 거쳐 백수를 타고 내려가려다 강천구에서 양흔 등과 조우해 전투)]에서 등애군에게 쫓겨 퇴각하고 있었다. 이 당시를 기술한 자치통감의 내용을 보면 '음평(陰平)에 당도할 무렵 위의 장수 제갈서가 건위로 향한다는 소식을 들었으므로 이에 대처하기 위해 주둔하며 기다렸다.'는 기술이 있는데 상황을 봤을 때 이는 답중에서부터 부리나케 한중을 지원하기 위해 퇴각하던 강유에 대한 설명일 수도 없고, 후술할 것이지만 장익과 동궐은 아직 한수현도 못 다다른 상태이므로 장익과 동궐일 가능성도 없다. 또한 음평은 답중으로 향하는 길목이므로 당시 답중으로 가다가 등애에게 쫓기고 제갈서에게 퇴로를 저지당하려 하는 강유군의 상황을 보고 강유군의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음평에서 요화가 벌인 군사 행동에 대한 서술로 보인다. [[촉한멸망전#s-3.1]] 문서 참고. 그러나 제갈서가 음평교두를 점령해 강유의 길을 막았다는 등애전의 내용으로 봐서 요화군은 제갈서군에게 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강유는 답중에선 등애의 3만, 뒤에선 제갈서의 3만을 상대해야 하는 처지에 몰린 것이다. 촉의 주력이었던 강유군이 그렇게 포위된 상태로 섬멸당한다면 [[검각]]이고 뭐고 곧바로 게임오버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강유는 그 길로 공함곡, 즉 답중과 옹주가 연결된 곳으로 북진한다. 당시 옹주 자사였던 제갈서는 강유의 움직임 그를 좆아 음평교두에서 공함곡으로 향한다. 30리가량 이동했던 강유는 곧바로 회군해서, 제갈서군을 기만하고 포위망을 빠져나와 한중을 지원하기 위해 움직인다. 제갈서는 급히 강유의 뒤를 쫓았으나, 약 하루 차이로 강유를 놓치고 만다. [* 이 부분에서 제갈서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은데 강유가 옹주를 털고 한중을 지원하기 위해 진격한다면 본인의 관할은 관할 대로 쑥대밭이 되고, 강유가 이끄는 촉의 주력을 묶는다는 자신의 임무는 임무 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이 되므로 딱히 제갈서가 잘못했다고는 볼 수 없다. 적도전투 이후 10년이 지나 어느정도 인프라가 복구된 상황인데 비어있는 옹양주를 강유가 먹어서 징발하고 다시 올라온 길 그대로 한중으로 내려가기만 해도 역으로 제갈서와 등애가 포위당하는 꼴이 되버린다. 제갈서가 공함곡으로 퇴각하지 않았다면 역으로 침공을 했다가 옹양을 먹히고 본인들은 포위섬멸이라는 길밖에 남지 않게 되는 것.] 강유의 본대를 고립시키고 본인의 주력이 허술해진 방어진을 통과하여 입촉한다는 종회의 전략이 거의 성공했을 무렵에 순간적인 강유의 기지는 본인의 파멸적인 전략안으로 몰살당할 뻔한 군대를 간신히 살리는데는 성공했다. 비록 파멸적인 전략안으로 촉한의 멸망을 부른 강유지만, 등애와 제갈서의 협공으로 전멸당할 뻔한 위기에서 적의 심리를 이용하여 기동전을 펼치며 포위망을 벗어나 주력 부대를 보존한 강유의 전술적 기지 자체는 한때 위나라 농서를 함몰시킬 뻔하기도 했던 전술가로써의 강유를 보여주는 대목 중 하나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겨우 하루 차이로 제갈서의 포위망을 돌파해 요화와 합류한 강유는 기뻐할 순간도 없이 양안관구가 이미 내부의 배신으로 [[종회]]의 대군에 의해 돌파된 사실[* [[장서]]가 성을 열고 나와 항복했고, [[부첨]]은 장서가 나간 것을 믿고 방심하다가 위군이 장서의 항복으로 예상 외로 빨리 들이닥쳐서 급히 저항하다 전사했다.]을 알고는 백수에서 장익과 합류하여 검각으로 간다. 강유전에 따르면 강유가 요화와 함께 음평에서 퇴각할때, 장익, 동궐이 이제 막 한수(가맹관)에 이르렀는데[* 사실 이 부분이 정사와 자치통감이 모순되는 부분 가운데 하나인데 자치통감에 따르면 장익과 동궐은 음평에서 제갈서의 움직임을 보고 근처에 주둔하였다고 하는데 정사 강유전은 이들이 이제서야 한수에 도착했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자치통감의 오류로 보이는데 자세한 것은 [[촉한멸망전]]을 참고할 것] 이들은 군사를 합쳐 익주의 검각에서 농성한다.[* 당시 종회는 한중의 낙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는데 양안관구가 이미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낙성공략을 내버려두고 이를 통해 전진했다. 한 마디로 양안관구 함락 이후 강유가 먼저 도착하느냐, 종회가 먼저 도착하느냐의 싸움이 된 셈인데 여기선 강유가 먼저 도착한 것이다.] [[검각]]에서 강유와 종회는 약 1개월에 걸쳐 지리한 공방을 벌이는데, 공방 끝에 불리해진 종회는 잠시 퇴각한다. 종회는 안 되겠다 싶었던지 강유를 회유하기 위해 편지를 보내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후(公侯)는 문무의 덕을 갖추고 세상을 초월한 지략을 품고 공을 세워 파(巴), 한(漢)을 구제하여 화하에까지 명성을 드날렸으니 멀고 가까운 이들 중 그대의 명성에 귀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소. 늘 지난날을 생각하면 일찍이 (그대와 나는 위나라의) 큰 교화를 함께 입었으며 오찰과 정교가 우리의 우호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오.” 강유는 대꾸할 가치가 없다고 느꼈는지 서신에 답하지 않고 군영을 벌려세우고 검각을 수비하였다. 이렇게 되고 보니 종회는 곧 이전부터 정촉을 시도할때 가장 큰 문제였고 강유 역시 예측했던 정촉군의 문제인 한중으로부터 이어지는 험한 길을 통한 군량보급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종회와 사마소의 이런 전략은 역사에서 자주 나오는데 성공한 예는 백제 멸망전과 [[병자호란]] 등이 있고 실패한 예는 [[살수 대첩]]과 [[귀주 대첩]] 등이 있다. 이러한 전략은 성공하면 굉장히 인적, 물적 손실이 적지만 반대로 실패하면 '''그대로 대첩이 일어나는''' [[날빌|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의 [[올인]] 전략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적군을 등 뒤에 두므로 안정적인 보급선을 포기하는 대신 한 국가의 머리, 다시 말해서 적국의 군주와 조정을 제압한다는 것인데 글자 그대로 시간과의 싸움으로 아군이 보유한 군수물자가 다 떨어지기 전에 승부를 봐야 하며 적국이 완벽한 청야 전술과 방어를 해 내면 당연히 꼼짝없이 대패를 당하게 된다.[* 실제로 이러한 문제로 제1차 고당전쟁 당시 [[주필산 전투]]에서 승리한 당나라군의 장수인 [[이도종]]이 평양으로 진격하자고 주장했는데, [[장손무기]]가 '아직 신성과 건안성 등 고구려군이 건재한 곳이 많다. 황제의 원정은 다른 경우와 달리 안전해야 한다.'며 반대했다. 결과는 우리가 다 알듯 [[안시성 전투|안시성을 공격했다가 패배]]하고 퇴각하였다.] 그러나 종회의 경우엔 군사가 거처하고 보급을 받을 근거가 없어서 망한 이런 참수작전의 예와는 달리 한중을 거의 석권한 입장에 있었다. 당초 강유가 예상했던 제대로 된 청야는 사실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한성, 낙성, 황금성 외에는 한중은 거의 위나라 손아귀에 들어와 있었고 종회는 자신의 군대에 물자를 공급해줄 한중의 사인들과 백성들을 손에 넣은 상태였다. 한성의 [[장빈]]은 서쪽을 평정하면 당신 아버지의 묘를 찾아보겠다는 종회에 말에 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해보라고 호기롭게 답장을 하긴 했지만 불과 5천의 군사로 수십만 위군을 언제까지고 당해낼 순 없었다. 어쨌거나 검각에서 종회는 제장들과 함께 군대를 물려 귀환할 것을 의논하였다. 이때 종회는 본국에 제갈서를 모함하는 글을 보내 제갈서를 본국으로 끌려가게 하고 자신은 제갈서의 군사들도 모두 장악하였다. 이후 종회의 행보를 통해 종회의 속마음을 추측하자면 이후 그의 야심을 보건대 촉을 완전히 정벌하지는 못하더라도 제갈서의 군대까지 장악하여 한중을 완전히 함락하고 한중을 자신만의 영지로 만들려는 속셈이 있었던 것을 보인다. 안 그래도 이미 한중에서 할거한 [[장로(삼국지)|장로]]의 예도 있고, 촉을 완전히 정벌하지 못하더라도 [[하후연]]의 예를 본받아 한중을 수비한다는 핑계로 힘을 기르다가 여차하면 사마소가 방심한 사이 한중에서 장안으로 기습을 걸 여지도 있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 종회 본인의 반란 계획도 비슷했고. 각설하고, 한편 [[등애]]는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검각]]을 죽 둘러 산을 넘어서 강유(江由)와 면죽관을 공격하는 작전을 감행한다. 이렇게 해서 강유 - 면죽을 통해 성도로 진격하면 강유는 황제와 조정을 방치하는 경우 항복을 받아낼 수 있고 방치하지 않고 검각에서 철수하면 종회가 이끄는 위군의 주력이 익주 내지로 들어올 수 있으므로 촉 멸망은 기정사실화된다는 것이 등애의 계산이었다. 퇴각을 논의하던 종회 역시 이 계획을 듣고 동의했는지 등애과 접촉하도록 증원군을 그쪽으로 보냈다. 이렇게 절벽 오르고 모포 두른 채로 절벽을 구르는 개고생을 한 달 정도 한 끝에 등애군은 강유에 도착한다. 산악 돌파로 엄청난 사상자가 있었고, 공성 무기도 못 챙겨온 등애군 앞에는 강유성이라는 성채가 있었던 데다, 등애의 부하 전속이 등애의 공격 명령을 거부하고 도주했으나 등애군은 자잘한 전투를 통해 강유성의 수장인 [[마막]]을 항복시켰다. 이 곳에서 일시적으로 군을 정비한 등애는 면죽으로 진격하여 제갈랑의 아들 제갈첨이 이끄는 촉의 성도 방어군을 사력을 다해 패퇴시키고 낙현에 이른다. 촉 내부의 최후방어선이 모조리 붕괴하자 강유는 [[검각]] 방어를 포기하고 성도를 지원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강유는 거듭된 [[검각]] 방어 성공으로 나쁘지 않은 사기의 정예병 최소 4~5만을 가지고 있었고 화양국지에서는 강유가 군사 10만을 일으켜 남하했다는 것으로 봐서 각지에 흩어져 있던 촉군을 규합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종회는 후퇴하려는 강유군을 그대로 놔두지 않고 그를 추격하면서 점점 숨통을 조여왔다. 종회전에 나온 종회의 언급에 따르면 "강유 등이 통솔하는 보병과 기병 4, 5만 명은 갑옷을 두르고 예리한 칼을 들고 산천을 막고 계곡을 막아 수백 리에 걸쳐 앞과 뒤가 서로 이어져 있었으므로 그의 많은 병력에 기대에 궤도를 따라 서쪽으로 행군했습니다."라고 한다. 강유는 각지의 요충지를 점거하며 자신의 숨통을 조여오는 종회의 남진을 막고 서둘러 서쪽으로 진군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진격 속도도 강유가 재촉을 하여 빨랐는지 유선이 항복을 결정할 시점에는 성도 근처 처현의 도로를 따라 당시 등애가 머무른 낙성에서 가까운 오성현까지 다다른 상황이었다.] 동쪽에 있었던 염우도 나헌에게 수비를 맡기고 서쪽으로 진군했고 남쪽에는 곽익이 이끄는 촉군이 건재했는데 곽익은 이민족의 반란을 손수 제압하고 그 수괴의 목을 벨 만큼 상당한 군재를 가지고 있었다.[* 곽익은 대규모 위군이 쳐들어오자 자신이 성도로 지원을 갈지 유선에게 물었으나 유선이 방비가 튼튼해서 필요 없다며 거절한다. 아마 검각에서 종회가 발목을 잡혔을 때로 추정된다.] 동오도 세 갈래로 군사를 일으켜 두 갈래는 위를 공격하여 더 이상의 위군이 촉으로 몰려가지 못하게 막고 정봉이 이끄는 한 갈래의 동오군은 촉을 직접 지원하기 위해 움직인다. 등애군은 비록 1~2만에 강유성에서 일시적으로 군을 정비했다고는 하나 애초에 산을 넘을 때부터 상당한 손실이 있었고 공성 무기는 아예 없으며 보급선은 꿈도 못 꾸는 상황이었다. 또한 제갈첨과의 전투에서 한 번 패했으니 그 손실도 있었을 것이다. 종회 역시 비록 한중의 주요 거점을 포위한 병력과 [[검각]]에서 손실을 제외하더라도 10만 이상의 병력으로 추정되나 험하고 긴 보급선, 그리고 거듭된 [[검각]] 공략 실패로 상당히 지쳐 있었고 그 사기도 높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종회군이 검각에서 자유로워지면서 수십만 대군이 촉 분지로 쏟아져 들어오는 상황이었으므로 이미 이 시점에서 촉의 전망이 썩 좋은건 아니었다. 당시 촉한의 거의 모든 전군이 성도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가던 상황이어서 등애가 성도 근방인 낙현까지 왔고 촉한의 주력군인 강유군도 역시 성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오성현까지 왔었다. 그러나 강유군은 그를 추격하던 종회군의 압박에 시달리는 상황이었고 영안에서 달려오는 염우의 경우 이후 기록이 없어지며 이전부터 증원을 가겠다고 나선 [[곽익]]은 추가 명령을 받지 못하고 남중에 머물러 있는 상황이었다. 설령 유선이 동쪽이나 남쪽으로 도망가더라도 이미 촉에 위의 대군이 진입한 마당에 미래가 좋다고 할 순 없었다. 물론 종회와 등애가 성도에 들이닥친다 해도 성도 중앙정부가 방어군이 있는 곳으로 피난이라도 갔다면 얼마 안 가서 강유의 중앙군과 건녕의 곽익과 동오의 원군을 규합하면 충분히 종회와의 일전을 벌일만 했다. 요약하자면 여전히 위군이 숫적 우위를 점하고 있으나 촉이 청야 전술과 성도 방어나 피난을 통해 시간 끌기를 통한 군세 규합, 자국의 영토이므로 지리에 더 밝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는 것. 따라서 많은 촉의 대신들은 남쪽으로 피신할 것을 주장했고, 유선의 아들 유심은 성도를 사수할 것을 주장했으나 유선은 항복을 주장한 초주의 말을 듣고 등애에게 항복한다. 이 부분에선 당시부터 이 항복에 통탄해했던 촉한 사람들의 기록이나 위군도 보급이 위험하긴 했으니 상당히 위험할 수 있었다는 위나라 측 기록이 남은 것으로 보면 촉한 내외적으로 유선이 성급하게 항복했다는 인식이 분명 있긴했다. '강유가 멀리 파군 오성현으로 왔는데 설사 등애가 가볍게 전진하였더라도 지름길을 통해 성도에 이를 수 있었을 것이고, 지치고 고립된 등애를 치고 종회를 막았다면 강유의 역량은 종회를 충분히 넘어서니 방어 할 수 있었다. 적이 이르지 못했는데도 강유가 함락되었는데 아깝도다!' 라고 탄식한 촉군태수 왕숭[* 이 사람은 심지어 반북벌론자 초주의 제자들인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와 [[이밀(촉한)|이밀]]과도 친했다.]의 평가가 [[화양국지]]에 기록되어 있고, [[원준]]의 원자(袁子)에선 '등애가 1만 명으로 강유성의 험지로 들어갈때 종회가 20만 군사로 검각에서 머물며 진격하지 못하고 삼군의 군사들은 이미 굶주리고 있었으니 만일 유선이 며칠 만에 항복하지 않았다면 곧 두 장수의 군은 돌아오기 힘들었을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초주]]의 말이 틀렸다고 볼 순 없는 것이 촉군은 전쟁에서 큰 손해를 이미 입은 상황이며 이런 잔여 병력을 다 결집시키는데 성공해도 손성의 말대로 사천분지 내부의 수계를 이용해서 위군을 방어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완전히 몰아낼 수 있었을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또한 동오의 원군을 통해서 위군을 몰아낸다고 하면 초주의 말처럼 오나라에 사실상 촉한 정부가 종속되어 이전처럼 이제병존의 동맹국 위치가 아니라[* 사실 이제병존 자체도 명분상이나 실제 세력면이나 촉한이 동오에 밑지고 들어가는 상황이긴 했다.] 사실상 촉이 오의 종속국이 될 가능성도 농후했다. 그러느니 차라리 세력이 더 강한 위에 항복해 최소한 오에 항복하고 위에 다시 두번 항복하는 꼴은 안보는게 낫다는 그의 주장도 일리가 있었던 것이다. 한편 강유는 처현의 도로를 따라 동광한군 오성(五城)현에 도착했는데 화양국지에 적힌 왕숭의 말에 따르면 이 당시 강유가 오성에 이르렀으며 등애를 사로잡고 종회를 상대할 수도 있었다고 한다. 이곳은 현재의 사천성 덕양시 [[https://zh.wikipedia.org/wiki/%E4%B8%AD%E6%B1%9F%E5%8E%BF|중장현(中江县)]]으로 현재의 사천성 광한시이자 당시 등애가 주둔하고 있던 광한군 낙현(낙성)에서 가까운 곳이었다.[[https://ko.wikipedia.org/wiki/%EB%8D%94%EC%96%91%EC%8B%9C#%ED%96%89%EC%A0%95_%EA%B5%AC%EC%97%AD|현재의 광한시와 중장현의 위치]] 그는 이곳에서 유선의 명을 받고 종회에게 항복하게 된다. 강유는 직접 진영을 돌며 촉군에게 항복을 명하는데 이 명령을 받은 촉장들과 촉병들은 모두 격분하면서 자신의 [[검]]을 들어 바위를 내리쳤다고 한다.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장면은 실제 역사상에도 나오는 사실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