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유 (문단 편집) === 과거의 평가 === 정사의 저자 진수는 [[극정]]의 말을 빌려 강유의 장점을 논한 후 '강유는 대체로 문무를 갖추고 공명을 세우는데 뜻을 두었으나 군사들을 경시하며 군대를 남용하고, 분명하게 결단하였으나 주밀하지 못하여 끝내 죽었으니 작은 나라에서 요란하게 일을 벌인 것 때문이다'라고 비판했다. 이렇듯 정사의 평은 좋은 평과 나쁜 평이 갈린다. 게다가 강유는 진수의 스승인 초주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일단 제갈량이 아직 공업을 이루기 전 젊은 시절의 강유를 보고 양주 최고의 인물이라면서 극찬한 건 위에도 나왔으니 이번엔 제갈량 시대 이후 한 세대 뒤인 강유 당대와 그 직후의 평가를 더 보자. >당시 촉(蜀)의 관속들이 모두 천하의 영준(英俊, 영민하고 준수함)이나 강유보다 나은 자는 없었다. >---- >배송지 주 세어(世語)의 평가, 이는 [[세설신어]]에도 그대로 실려있다. 그런데 삼국지 집해에 실린 청나라 시대 학자 조일청(趙一淸)은 "蜀(촉) 위에 征(정) 자가 탈락된 것으로 의심된다"라고 하였다.(趙一淸曰, 蜀上疑落征字) 즉, 조일청의 견해에 따르면 세어의 기록은 촉한의 관속이 다 뛰어나지만 그 중에서도 강유가 으뜸이라는 소리가 아니라, ''''당시 촉을 정벌한(征蜀) 등애나 종회, 두예를 비롯 위진의 인사들은 모두 천하의 영준이나 강유보다 더 뛰어난 인물은 없었다''''로 풀이된다는 것이다. 확실히 조일청의 해석이 문맥상 더 자연스럽기도 하고, 당시 위진에서 촉한의 인물 가운데 강유 이외에는 높이 평가하던 인물이 없었다는 걸 감안한다면, 게다가 아무리 공치사라 할지라도 망국의 신하들인 촉한의 인사들에게 굳이 "영준"이라 좋게 표현할 이유가 없기에 조일청의 해석에 더 무게가 실린다. >종회는 강유와 함께 밖으로 나갈 때는 같은 수레를 타고 좌정할 때는 같은 자리에 앉았다. 장사(長史) [[두예]]에게 말했다, > >"백약(강유)을 중원의 명사에 비교하자면 공휴([[제갈탄]])나 태초([[하후현]])가 그보다 더 낫지는 못할 것이오."[* 백약을 중원의 명사에 비교하자면 공휴나 태초도 그보다 더 뛰어나진 않을 것."이라는 종회의 평가는 발언자는 물론 논하는 대상, 대조군 두 명, 심지어 들어주는 사람(두예)까지 삼국시대 말기의 슈퍼스타들이라 유명한 발언이다. 다만 제갈탄과 하후현(그리고 강유)가 각각 유명한 포인트가 너무 다르기 때문에 왜 저들을 나란히? 싶은 반응이 나올 수도 있는데, 사실 하후현에 비해 좀 묻히는 감이 있다 뿐이지 제갈탄도 나름 당대의 손꼽히는 셀럽이었다. 하후현의 최고 간지 일화가 사실 제갈탄의 일화였다는 기록도 존재하고. 한편으로 종회와 관련된 모든 이야기가 그러하듯, 훨씬 간단한 접근법도 있다. 바로 얼평이었다는 것. 하후현이야 말할 필요가 없는 자체발광 미남이었고, 제갈탄 역시 그의 사위였던 왕광이 아내에게 '장인 어른은 그렇게 잘생겼는데 자기는 왜 이 모양임'이란 뉘앙스의 발언을 했다 역으로 털렸다는 일화가 있는데, 아내 얼굴에 대해 장모님도 아니고 장인어른을 들먹인 걸 보면 확실히 한 얼굴했던 모양. 결국 종회의 발언은 강유가 하후현 못지 않게 낭랑하고 제갈탄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기품있는 얼굴이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는 것.][* 다만 말하는 대상이 두예라는 점에서 이 시점에서 군사 분야는 물론 이렇다 할 능력을 드러낸 바 없는 그를 종회가 눈여겨 봤다는 부분이 흥미로운데, 하안 살롱 붕괴 후 왕필, 하후현, 부하까지 연달아 죽어버려 지적/철학적 교류에 대한 갈증이 심각했던 종회가 훗날의 좌전벽이자 경전 연구에 있어 큰 족적을 남길 인재인 두예를 눈여겨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추론이 가능하다. 만약 이 관점에서 접근할 경우, 문제의 발언과 얽힌 인물 중 종회, 두예, 강유 모두가 무장이지만 경서에 꽤 통달해 있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제갈탄이 애매하지만), 종회가 한 것이 얼평이 아니라 이런 '인텔리' 적인 동질감의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 >종회의 평가 >"강유는 본래 한 시대의 영웅이었지만, 나를 만났기 때문에 곤궁해진 것일 뿐이다." >(주위의) 식견 있는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다. >---- >등애의 평가 >"'전란이 끊이지 않으면 스스로를 불태운다'고 하더니 백약을 두고 하는 말이로구나. 지모가 적보다 뛰어나지 않고 역량도 적으면서 용병이 끊이지 않으니 어찌 스스로를 보존하리? [[시경]]에서 말하는 '나보다 앞서지도 않고, 나보다 뒤서지도 않았다(不自我先, 不自我後)’[* 시경(詩經) 소아(小雅)편 제4 절남산지십(第四 節南山之什)에서 인용.]라는 것이 바로 지금의 일을 가리키는 것이로다" >---- >262년, 4년만에 적도로 다시 출격하는 강유를 보고 말한 요화의 평가 당장 강유와 직접 대적한 동시대의 등애나 종회도, 당대에 세간에 떠돌던 세설의 평가들도 모두 강유를 일세의 영걸로 평가했기 때문에 강유 당대의 평가는 대체적으로 높았다고 짐작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요화의 경우엔 강유의 지나친 북벌에 지쳤는지 "재능도 역량도 형편없으면서 병력을 남용하는데만 힘을 쓰니 저러다 망할것"이라며 대놓고 비판했다. 한편 손성의 진양추에 따르면 환온이 촉을 평정할 때에 촉의 여러 나이든 이들을 만났는데 그들이 말하길 강유가 이미 항복한 뒤에 은밀히 유선에게 표를 올려 ‘종회에게 거짓으로 항복하여 섬기고 이를 틈타 그를 죽이고 촉 땅을 회복하고자 한다.'라고 말했으나 때마침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여 마침내 멸망되기에 이르렀으니 촉인들이 지금도 그를 안타깝게 여긴다고 하였다고 한다. 살아생전 촉한 사람들에게 비난도 받았던 강유였지만 그래도 그의 죽음은 촉한 사람들을 안타깝게 한 듯하다. 한편 동진의 간보는 '임금이 모욕을 당하고도 살았으면서 나중에 종회의 난에서야 죽었으니 애석하다, 죽더라도 올바로 죽었어야 하지 않느냐' 정도로 평가했으며 비슷한 시기 인물인 [[손성]]은 강유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손성은 잡기의 저자로서, 강유의 당기-원지 일화의 출처가 잡기다. 손성의 강유평은 다음과 같다. >[[극정]]의 말은 잘못되었다. 무릇 선비란 백 가지의 행동과 많은 일을 처리하는 것이 뛰어나더라도 충(忠), 효(孝), 의(義), 절(節)을 다하는 것을 최고의 행동으로 삼는다. 강유는 위를 채찍질한다는 명분으로 촉 왕조를 바깥에서 분주하게 만들었으니 군주의 뜻을 어기고 자신에게 유리한 일만 했으니 충이라고 말할 수 없다. 어머니를 버리고 살 길을 찾았으니 효라고 말 할 수도 없다. 자신이 섬겼던 위나라를 해쳤으니 의라고 말할 수도 없다. 패하고도 죽음을 피하려고 했으니 절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또 덕정을 베풀지 않고 전쟁을 자주 하여 백성들을 피로하게 했으며, 어명에 따라서 임무를 맡았으나 적을 막지 못했으니 지혜와 용기가 있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이 여섯 가지 가운데 강유는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 그는 사실 위에서 살 길을 찾아 도망친 신하에 불과했다. 이러한 망국의 혼란을 초래한 인물을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된다고 했으니 사람들을 혼란하게 만든 말이 아닌가? 강유가 배우는 것을 좋아하고 청렴하게 살았다고 하지만, 이는 도둑이 훔친 재물을 나누어주면서 의롭다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손성의 평은 극정의 평에 대한 답이라 할 수 있으니, 진수가 인용했던 극정의 평을 보아야 할 차례다. 극정은 강유에 대하여 우호적으로 평하였다. >강백약은 상장(上將)으로서의 중임을 맡았지만, 초라한 집에 살면서 불필요한 재산을 모으지 않았다. 측실에서는 첩잉(妾媵,첩실)을 총애함이 없고 후정에서는 음악을 즐기는 일이 없었으며 의복은 제공된 것을 입고 수레와 말은 준비된 것을 타고 음식은 절제되어 사치하지도 인색하지도 않았으며 관에서 공급하는 비용은 손에 주어지는 대로 소진하였다. 이러한 행동은 남을 질책하거나 자신의 욕망을 버리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그는 만족을 알던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만 칭찬하고 실패한 사람은 비난한다. 또한 높은 사람에게 기대고 낮은 사람은 무시한다. 많은 사람들이 강유가 종회와 같은 하찮은 인간에게 의지하여 자신과 종족을 멸망시켰다고 비난하고 그의 다른 측면은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춘추》에서 그릇된 사람을 폄하하는 것과 전혀 다른 짓이다. 강유는 배우기를 좋아했으며, 성실, 청렴, 소박, 검소를 행동의 준칙으로 삼았으니 한 시대의 모범이라 할 만하다. 송대의 [[배송지]]는 다음과 같이 손성과 극정의 평을 종합한다: >신이 보건대 극정의 이 평가는 칭찬할만한 것을 취했지 강유가 모든 측면에서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한 시대의 모범이 될 만한 것은 그가 학문을 좋아했고 검소하게 살았다는 것뿐입니다. 또 강유전이나 위략에선 강유가 본디 배반하려는 마음이 없었지만 내몰려서 촉에 귀순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손성이 어머니를 저버렸다고 비난한 것은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머지는 지나치게 가혹하게 질책하고 폄하한 것이므로 손성이 극정을 비판할 이유는 없습니다. 배송지는 또 손성이 진양추에서 촉인들이 강유를 안타깝게 여긴다는 얘기를 듣고 '강유는 절의도 지키지 못하고 촉주를 옹위하지도 못한 주제에 뒷날 도모할 계책을 생각하다가 이랬다 저랬다 했고 기대하기 어려운 기회에서 물정에 어긋나는 것을 희망함으로써 나라를 쇠약하게 만들며 삼진(三秦, 관중關中)에서 여러 번 군세를 과시하였고, 이미 나라가 멸망한 뒤에 이치를 넘은 대단한 성공을 바랐으니 또한 어리석지 않은가!'이라며 비웃었었던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단(전국시대)|전단]]의 예를 들어가며 반박했다. >신 송지가 보건대, 손성이 강유를 비난하는 말이 또한 합당하지 않습니다. 당시 종회의 대군이 이미 검각에 이르자 강유가 제장들과 더불어 군영을 벌려세우고 험요지를 수비함으로써 종회가 진격할 수 없어 이미 되돌아갈 계획을 의논하였으니 촉을 온전히 지키는 공이 거의 이루어졌었습니다. 다만 등애가 기만술로 측면으로 침입하여 그 배후로 출병하니 제갈첨이 패한 뒤에 성도는 스스로 무너졌을 뿐입니다. 강유가 만약 회군하여 내부를 구원했다면 곧 종회가 그의 배후를 틈탔을 것입니다. 당시의 사세로 어찌 양쪽을 다 구제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강유가 면죽 아래에서 절의를 떨치지 못하거나 촉주를 옹위하지 못했다고 책망하는 것은 이치에 맞는 않는 말입니다. 종회는 위장들을 모두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고 강유에게 대군을 주어 선봉으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만약 위장들이 모두 죽고 군사가 강유의 손에 주어졌다면 종회를 죽이고 촉을 회복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릇 이치를 넘어 공이 이루어진 연후에 이를 가리켜 기(奇)라 하는 법이니 그 일에 차질이 있었다고 하여 그리 해서는 안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설사 [[전단(전국시대)|전단]]의 계책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면 또한 그를 가리켜 어리석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화양국지]]에서도 평가가 갈린다. 우선 화양국지에 실린 촉한-서진 시대 당대의 인물인 [[왕숭]]은 강유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중략)[* 앞부분은 그냥 유선을 극딜하는 말들이다, 왕숭 문서에서 확인할 것.]등애는 피곤한 병사 2만을 이끌고 강유성에서 쏟아져 나왔다. 강유는 남쪽으로 귀환하여 십만의 군대를 일으키는 것을 목적으로 군을 이끌어서, 등애는 집에서 기르는 (사로잡힌) 동물의 꼴이 되었다. 등애를 사로잡는 것을 이미 끝 마치고, 다시 돌아와 종회를 막아내었더라면, 곧 촉의 존망을 가늠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이에 강유는 파의 도로에 돌아와서, 멀리 오성에 이르었다. 설사 등애가 가볍게 전진하였다 해도, 지름길을 통해 성도에 이를 수 있었을 것이다. 병사가 분할되어 도성이 멸하니, 스스로가 자초한 것이다. 명백하게 종회의 지략은, 자방의 것이라 칭해졌다고 한다. 강유는 적이 이르지 아니하였음에도 함락되었는데, 강유와 종회가 책략, 지모를 서로 맞아 어울려하여 우열을 가린다면 강유가 승리하여 종회를 물리칠 것이다. 아깝도다! 반면 화양국지의 저자이자 [[성한]]-[[동진]] 시대 인물인 [[상거]]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강유의 재주는 제갈량에 필적하지 못한데도 뜻은 그 넓은 법도를 계승하였으니(志繼洪軌) 백성들이 그 수고로움을 싫어하여 집과 나라를 잃었도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사천성 [[검각]] 강유 사당인 평양후사 현판에 쓰인 글이 바로 지계홍궤(志繼洪軌)이다.] 요컨대 강유는 당대부터가 평이 심각하게 갈린다. 평이 극에서 극을 오가고 서로 강유의 이런 점이 잘못이네 아니네 하는 걸 보면 요즘뿐 아니라 과거에도 어지간히 강유는 논란의 대상이었던 듯. 이로부터 약 천여년 뒤, 자치통감의 주를 단 호삼성은 강유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비의가 죽자 촉의 모든 신하는 모두 강유의 아래에 있었으므로 이를 제지할 수 없었다. 석영은 동정의 서남쪽에 있으니 강유는 무도에서 석영으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적도현은 농서군에 속하는데, 강유를 위하여 백성들을 노역시켰으므로 촉이 망하게 된 원인을 제공하였다.[* 253년 비의가 죽자 강유가 자신의 뜻을 시행할 수 있게 되어 (제갈각과 호응해) 마침내 수만명을 거느리고 석영을 나와서 적도를 포위했을때 달린 주석.](자치통감 권 76권) >---- >강유가 수차례 전쟁을 하여 촉나라를 망하게 했으니 마침내 초주의 말대로 되었다. 험요를 내주고 강역을 개방하여 촉나라를 망하게 한 장본인이다.(자치통감 권 77권) 이처럼 호삼성은 강유의 수차례 북벌과 한중방어선 변경에 대해서 비판했다. 근데 정작 이후 강유가 촉을 부흥시키려 할 때는 진수, 간보, 손성 등의 평을 모두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주를 달았다. >강유가 실로 지혜로워 족히 종회를 손바닥과 허벅지 위에서 갖고 놀 정도였으나, 시세에 핍박당하고 운명에 제지되었으니 어찌하겠는가! 강유의 마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漢)을 위하였으니 천년의 세월 동안 단(丹)처럼 밝게 빛나는구나. 진수, 손성, 간보가 그를 폄하한 것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자치통감 권 78권) 호삼성의 경우엔 강유의 능력은 촉을 망하게 한 장본인 그 자체지만 충심 하나만은 평가할 가치가 있다고 본 것으로 보인다. 조익(趙翼)의 이십이사차기, 전대흔(錢大昕)의 이십이사고이와 함께 청대사학삼대명저(清代史學三大名著)로 꼽히는 십칠사상권(十七史商権)의 저자 왕명성(王鳴盛)[* 1722~1797,청나라 중기의 역사학자 1754년 진사(進士)가 되었으며 광록시경(光禄寺卿)을 퇴관하고 30년간 연구에 전념했다.]은 다음과 같이 찬(贊)했다. >거짓 없는 참된 마음이 천 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아직도 살아있는 듯하다.(赤心千载如生) 한편 조선의 문신 [[홍대용]]의 <담헌서>에서도 강유를 평한 적이 있다. 다음은 해당 내용. >강유(姜維)는 무후(武侯)의 재주는 없으면서 무후의 사업을 하려고 했으니, 그 뜻은 충성스럽지만, 그가 자신의 힘을 헤아리지 못하여 결국 멸망하게 되었던 것이니, 그것은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 요화(廖化)가 이른바 ‘지모(智謀)도 적(敵)만 못하고, 병력(兵力)도 적보다 적으면서 용병(用兵)하기를 싫어하지 않으니 어찌 생명을 보존할 수 있겠느냐?’라는 말은 참으로 알고 하는 말이다. 또한 모사(謀事)를 잘하는 자는 그 근본부터 먼저하고 끝은 나중에 하며, 안의 일부터 급히 하고 바깥일은 천천히 한다. 소인(小人)이 안에서 일을 주선하는데, 장수가 밖에서 성공(成功)한 자는 있지 않다. 그런데, 강유는 정권을 제 마음대로 하는 황호(黃皓)를 능히 억누르지 못하고 저 억센 적에게 뜻대로 하려고 했으니, 지혜롭다 할 수 없다. > >강유(姜維)는 양안(陽安)과 음평(陰平)을 방비하고자 했으나 황호(黃皓)에게 저지(沮止) 당했다. 만약 강유의 계획 대로 했다면 등애(鄧艾)가 음평으로 한 걸음도 들어올 수 없었을 것이다. 등애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종회(鍾會)는 스스로 달아나게 되었을 것이니, 촉한(蜀漢)이 이같이 빨리 멸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강유(姜維)가 죽을 임시에 꾀한 것은 뜻만은 독(毒)하였으나 계획은 소루(踈漏)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漢)나라에 충성한 마음은 죽을 때까지 변함이 없었고 무후(武侯)가 인정하던 것도 손상시키지 않았으니, 또한 아름답다 하겠다. 한 마디로 '제갈량의 능력도 없이 북벌을 하려고 했던 것은 요화의 말 따라 무모했고, 일단 내정을 정비하고 소인(황호)부터 억눌렀어야 했다. 하지만 간신배 황호 같은 무리 때문에 그 계책이 쓰이지 않았던 점도 있고, 마지막까지 노력했던 그 충심은 끝까지 아름다웠다고 할 만하다.'쯤 될 것이다. 또 보면 홍대용은 호삼성과는 달리 변경된 강유의 한중방어선 전략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물론 강유 본인에게는 '내정에 신경을 못 썼다.', '황호를 억누르지 못했다.'는 평가는 억울할 것이다. 우선 강유는 평생 외정, 군직에만 머물러서 중앙 정계에 비호 세력을 확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강유는 기본적으로 항장 출신이라 위에서 서술한 대로 한중의 방어시스템 변경은 군사적인 이유도 있지만 큰 전공을 통해 정치적 발언권을 확보하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짐작되므로 강유가 내정에 신경을 안 썼다고 볼 순 없다. 오히려 그게 나라를 패망시킨 원인이 되었으니 홍대용의 평가는 잘못되었다.그리고 제갈량의 아들인 제갈첨 조차 유선의 비호아래 있는 황호를 어쩌지 못했는데 항장인 강유가 이 모든걸 해결해야 했다는 의견은 지나친 비판이라고 할수있다. 중국의 근대사학자 여사면은 자신의 저서 《삼국사화(三國史話)》에서 이렇게 그를 평가했다. >제갈량이 죽은 후 촉한은 29년간 더 유지됐다.이 29년 중 앞의 12년 동안은 장완이, 가운데 7년동안은 비의가, 마지막 10년동안 국정을 총괄한 것은 강유였다. 장완과 비의가 국정을 총괄할 때는 위나라를 정벌하는 대대적인 출병이 없었다. 강유는 누차 대병을 일으키고자 했으나 비의가 항상 그를 막아서 많은 수의 병마를 주지 않았다. 비의가 죽고 난 다음 강유의 일처리가 겨우 비의의 손에서 벗어났으나 역시 큰 공이 없었고 오히려 이로 인해 조국이 피폐해졌다. 당시 그(강유)를 강하게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후의 독서가들도 역시 촉한이 멸망한 것은 강유가 병사를 일으킨 책임이라고 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 >위나라 제왕 [[조방]]이 세워진 후부터 고귀향공이 피살당할 때까지의 21년은 삼국시대로 접어든지 21년에서 41년에 이르는 시간으로 실로 위나라에 여러 가지 일이 많았던 때로서 촉한이 북벌을 해야 한다면 그 기회는 절대적으로 이 기간 안에 있었으며 그 기회는 이르면 이를수록 좋았는데 이르면 이를수록 위나라의 국정이 더욱 불안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간 중 태반은 장완과 비의가 정권을 잡고 있었고 강유가 병권을 장악한 때에 이르러서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그러므로 촉국의 멸망을 강유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실로 억울한 것이다. 장완과 비의에 이르러 응당 비교적 큰 책임이 있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강유가 군부에서 일하였고 한나라의 대장군까지 오르면서 수많은 전장을 경험한 인물임에도 그의 군사적 능력에 자체에 대한 높은 평가는 과거에도 드물었고 주로 군대를 동원한 것에 대한 비판이 학자들의 비판에 있어서 주가 된다는 것이다. 그외에는 그의 성품, 그에 대한 반박이 소수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