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유 (문단 편집) === 검각에 관련된 전설 === [[검각]]에 내려오는 아래의 전설들은 실제 정사에선 강유가 유선이 항복하기 전에 검각에서 성도로 이동하였으므로 성립되지 않는 전설들이다, 이 전설들은 연의에 그 바탕을 두고 있을 가능성도 높다. 물론 정사에서도 분격한 촉군이 칼을 들어 돌을 베었으나 그건 성도 지척인 광한군 오성현에서의 일이지 검각에서의 일은 아니었으리라. * 강유가 검각으로 와서 진영을 정비하고 요새를 굳게 지키자, 종회의 10만 대군은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등애가 성도로 우회 기습하면서 유선이 항복하였다. 유선의 항복 조서를 받든 강유와 장졸들은 원망스럽고 화가 나서 분통을 참지못해 칼을 뽑아 옆의 돌을 베었다. 그때 그가 자른 돌은 지금도 검각 협곡 안에 위치해 있으며, 사람들은 이 돌을 '감도석'이라 부른다. * 억울하고 울분을 참을 수 없었지만, 강유는 유선의 성지를 거역할 수 없었기에 양면으로 된 군기를 거꾸로 걸게끔 명령을 내려 위국에 투항할 뜻을 표했다. 그 양면으로 된 기를 꽂았던 돌은 주가채의 바위 절벽에 남아있는데, 이를 '쌍기암'이라 부른다. * 그는 장수와 병사들을 소집하여 각기 지니고 있던 병기를 모아 소검산의 한 동굴에 숨긴 다음, 차후에 때를 보아 군사를 일으켜 한나라 왕실을 부흥하고자 했다. 이 동굴을 '강유 도창고'라고 불린다. * 강유는 검문관을 떠날 때 마고자를 벗고 손수 빨은 뒤, 이를 말리기 위해 산의 바위 위에 널며 반드시 돌아올테니 그때 다시 마고자를 입을 것이라고 맹세했지만, 결국 한 해가 지나고 또 다시 다른 한 해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옷은 돌로 변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검문관 20리 밖에서 큰 바위 위에 널려 있는 마고자의 모양을 볼 수가 있다. 이를 가리켜 '양의암'이라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