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유 (문단 편집) === [[촉한|촉]] 귀순 이전 === 어린 시절에 강인(羌人)과의 전쟁 중에 아버지를 잃었다고 전해진다. 아버지 [[강경#s-3]]은 강인의 침입 때 태수를 보호하려다 전사하였고, 이에 강유가 아버지의 직책을 물려 받아 군에서 중랑으로 임명되었다. 강유의 어린 시절에 해당하는 시기 중(대략 206년 - 217년 무렵) 이 정도로 강인들이 침입했던 사건은 213년 마초가 강인들과 연합, 조조를 공격했을 때 외에는 기록된 사건이 없다. 만약 이 당시 강경이 천수 태수를 보호하려다 전사했다면, 마초 연합군에 의해 강유의 부친이 죽은 셈이다.[* [[최훈]]의 [[삼국전투기]] 중 '기 전투(2)' 에피소드가 이 설을 채택해 연출됐다. 당시 천수 태수 위강이 마초군에 항복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초는 그를 죽이려고 하고, 이에 강경은 항장을 죽이는 법이 어디 있느냐며 저항하다가 [[방덕]]에게 살해된다. 이 장면을 목격한 어린 강유가 아버지를 부르며 울면서 뛰쳐나가려 하지만, 그의 어머니가 필사적으로 붙잡고 만류한다.] 다만 이 외에도 다른 기현 침입이 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기에 정확한 사건은 알 수 없다. 이때 정사 삼국지 강유전은 "維為人好立功名,陰養死士,不脩布衣之業"라 기록하고 있는데, 대강 "강유는 입신 양명에 관심이 있어, 은밀히 자신을 위해 죽을 수 있는 병사들을 키우고, 평범한 일에 관심이 없다" 는 의미다. 강유가 나이는 어려도 자신의 미래에 대한 생각이 있었던 듯하다. 이렇게 말하면 그냥 용맹한 병사 정도로 생각할 수 있는데, 고대 중국에서 이런 "사사" 들이 목숨을 거는 일은 단순히 전장에서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는 정도가 아니다. 특별히 훈련받아 충성 대상을 향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자들, 한국식으로 하면 결사대, 주군의 명을 받고 주군과 반대하는 자들을 암살하는 자객 쯤으로 볼 수 있다. 또 사사가 중국어로 협객과 뜻이 통하는데 이는 강유가 어떤 유협집단의 지도자였을 가능성도 있다. 어린 나이부터 강유는 출세하기 위한 야심이 강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주의 종사로 임명되었으며 또한 상계연으로 일을 하기도 하였다. 종사는 주에 새로운 자사 등이 임명되었을 때 각 군현의 인물들을 현지 정보 입수 차원에서 채용할 때 주어지는 자리였으며, 상계연은 중앙 정부에 해당 지역의 인구 및 특산물의 통계를 내어 중앙 정부에 보고하는 직책이다. 이 일은 문관 계통이니 중랑, 즉 무관 계통이었던 강유가 문관 계통으로 일을 바뀌었거나 능력이 뛰어나 양쪽을 겸업했을 수도 있다. 또 강유는 [[정현(삼국지)|정현]][* 촉한의 건국자 유비는 [[노식]]의 제자였고, 정현과 노식은 [[마융]]에게 배워 동문이었다. 기묘한 인연으로 볼 수 있다.] 의 학문을 좋아했다고 하니[* 정현의 학문은 공자가 표방하던 것과 같은 대의를 내세운 이상적인 복고주의 또는 원칙주의에 가까웠다. 강유의 성격이나 태도, 촉한에서의 행적에도 이것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문관직에도 무리는 없었을 것이다. 이 무렵 옹주자사 대리는 [[곽회]]로, 강유는 기간은 알 수 없지만 한 때 그는 곽회의 부하였다. 이후 강유의 북벌 당시 강유와 곽회가 지겹도록 서로를 적으로 대하는 점을 감안한다면 둘의 운명도 꽤나 얄궂은 듯. 더불어 촉의 제갈량의 위나라 1차 침입 당시 곽회는 기현에서 상규로의 후퇴를 감행하여 강유가 촉에 투항을 하게 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