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유 (문단 편집) === 촉 귀순 & 제갈량 시대 (228년~234년) === 촉으로 귀순한 강유는 봉의장군 당양후 창조연에 임명된다.[* 봉의장군에서 봉의(奉義)는 옳은 것을 받들었다는 뜻으로써 한 때 [[이엄]]이 맡았던 자리이다. 당양후에서의 당양은 [[유선(삼국지)|유선]]이 [[조운]] 덕에 살아난 그 당양 장판파가 있는 당양이다.] [[후한서]] 백관지에 따르면 창조연이라는 관직은 태부 소속의 관직으로 창조연이 양곡 창고 관리인 점을 고려한다면, 북벌군의 군량 보급 쪽을 담당하고 있지 않았을까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즉, 촉에 귀순한 직후 강유는 문관 쪽에서도 일한 듯한데 이 때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창조연의 경우 강유가 위나라에서 하던 일인 상계연과 비슷한 위치로 역시 중앙 정부에 인구 및 특산물을 통계하여 보고하는 자리다. 즉, 창조연이나 상계연이나 군량 보급 못지 않게 통계 처리가 필요한 직책이니 창조연은 촉에 적응해야 하는 강유에게는 비교적 익숙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제갈량이 위에서 하던 일과 비슷한 역할을 주어 촉에 적응하기 쉽도록 배려했다고 보여진다. 물론 촉이 [[익주]] 하나라고는 하나 국가이고 [[양주(중국)#s-3|양주]]는 한 주이니 수행하는 업무는 비슷하다 해도 위상과 지위는 촉의 창조연이 위의 양주 상계연보다 훨씬 높을 것이다. 또 봉의장군은 과거 이엄이 맡았던 자리라는 것도 눈여겨 볼 만한 대목이다. 제갈량은 북벌을 앞두고 이엄을 가장 믿을 수 있는 인물이라면서 후방과 보급을 맡길 정도로 신뢰하였던 인물이니만큼 이엄의 옛 관직과 업무를 맡긴 것으로 보아 강유를 상당히 신임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강유에 대한 제갈량의 신임은 상술했듯이 제갈량이 막하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 강유를 칭찬한 것에서도 드러나는데 촉서 강유전에 제갈량이 유부장사 [[장예]]와 참군 [[장완]]에게 편지를 보내어 강유를 칭찬한 내용이 쓰여있다. ||"강백약은 그 시대의 일을 충성스럽고 근면하게 하며 사려가 정밀하며, 그가 갖고 있는 재능을 살펴보면, 영남([[이소]]의 자) 및 계상([[마량]]의 자) 등의 사람들도 그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그 사람은 양주의 상사(上士,뛰어난 선비)입니다. 반드시 먼저 중호보병 5, 6천 명을 그에게 훈련시키도록 해야 합니다. 강백약은 군사에 매우 능수능란하며, 도량과 의기가 있으며, 병사의 뜻을 깊이 이해합니다. 이 사람의 마음은 한실에 있으며, 재능은 일반 사람을 넘으므로 군사 훈련을 끝마치고 나서 궁궐로 보내 군주를 만나도록 해야 합니다."|| 장예와 장완은 승상부의 중요한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들이었고 무엇보다 장완은 제갈량 다음 후계자로서 제갈량에게 지명받은 인물이다. 그런 그들에게 강유의 재능을 칭찬하는 서신을 따로 쓴 것이다. 거기다가 중호보병은 중호군으로서 [[조운]]이 맡았던 황실 경호군를 뜻하는 것인데[* 그래서 제갈량의 이 중호보병 발언은 당시 중호군에 있었고 군부 인사 권한이 있던 조운의 의견이나 평가를 토대로 상의하여 반영되었다는 추측이 있다.] 한 나라를 총괄하는 재상이 일개 항장의 재능을 보고 자신의 군주와 만나게 하고 중앙군을 맡겨야 한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이런 일화들은 제갈량이 강유를 자신의 사후 바로 국정을 책임질 후계자로 지명한 것은 아니라도 차세대 촉한을 이끌 주요 유망주 중 하나로 보고 있었다는 증거는 될 것이다. 또한 항장 출신이라는 다소 거북한 꼬리표가 달려 있음에도 이러한 파격적인 제갈량의 기대와 대우를 받은 것은 강유가 장완이나 비의처럼 제갈량에게 생전에 자신의 뒤를 이어 국정을 맡을 후계자로 지명된 것이 아님에도 실제 역사에서나 연의에서나 장완과 비의의 뒤를 잇는 제갈량의 후계자로 받아들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촉 귀순 후 한동안 문관 업무를 하던 강유는 230년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무관임무를 맡게 된다. 230년 봄, 이 해에 촉 장군직의 대대적 개편이 이루어지면서 강유는 정서장군으로 임명되고 중감군(中監軍) 혹은 호군(護軍)을 맡았다.[* 《삼국지》강유전은 중감군, [[상거]]의 《[[화양국지]]》 유후주지는 호군으로 기술한다. 그냥 둘 다 겸임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강유가 정서장군으로 임명 된 이후 이 무렵 [[위연]]이 오계에서 곽회와 비요를 격파하고 정서대장군에 임명된다. 제갈량 사후 정서장군, 혹은 정서대장군이 대위 전선을 맡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무렵부터 강유는 제갈량의 북벌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정서대장군인 위연이 있었던 것을 고려한다면 직속 부대를 이끌고 단독 작전에 임하는 것보다는 고정된 보직 없이 제갈량의 명에 따라 이리저리 투입되면서 이 임무 저 임무 다 맡던 기동대장 정도로 다른 장수들을 지원하는 역할이 아니었나 추측된다. 사실 [[한중공방전]] 당시 [[하후연]]을 참살한 [[황충]]이 직후 받은 관직이 정서장군이었던 만큼 촉한의 건국시에서부터 정서장군직은 한중, 북벌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후일 [[장익(삼국지)|장익]]이 북벌에 나설 시기의 관직도 정서대장군이었다.[* 건흥(建興) 초, 영안도독(永安都督)ㆍ정서장군(征西將軍)이 된 강유의 전임인 [[진도(삼국지)|진도]]가 백이병 정예를 이끌고 영안에 진수하던 시절이 있긴 한데 이 때 당시엔 그냥 이엄 휘하의 감군으로 동맹인 오나라가 위나라의 파상 공세를 받자 여차하면 동맹군으로 참전해 쳐들어오는 위군을 요격하고 동쪽 국경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진수시킨 것이다. 제갈근이 걱정하는 군사의 질 부분을 제갈량이 안심시키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 즉 이 시기에도 정서장군은 북벌과 아예 상관없는 위치는 아니었다.] 이런 중요한 직책, 그것도 황충이나 진도 같은 숙장들이나 맡던 직책을 제갈량은 이제 막 29살 청년인 강유에게 맡겼던 것으로 다시 한 번 제갈량이 강유를 차세대 무장 가운데 얼마나 높게 평가하고 기대를 걸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위군이 퇴각한 직후 위연이 곽회와 비요를 대파하고 정서대장군직에 오르자 강유는 4차 북벌 때 정남장군으로 전봉된 것으로 보이는데 231년 이평의 탄핵 때 연판상소에서 '행호군 정남장군 당양정후 신 강유'라는 표현이 보인다. 이것 역시 눈여겨볼 내용인데 제갈량과 함께 밀접하게 연관된 조운이 바로 남정때 정남장군이었고 후일 241년에 편찬된 [[양희]]의 계한보신찬에서도 조운을 정남장군이라고 칭하는 등 정남장군을 조운의 주요 관직으로 언급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후계자인 장완에게 강유의 군사적인 능력을 어필하고, 조운이 유선을 구한 바로 그 장소인 당양의 정후로 삼았으며, 사방장군인 관장마황 다음 격인 조운과 그에 버금가는 평가를 받았던 [[진도(삼국지)|진도]]가 맡았던 관직을 차례로 역임케 하여 북벌에 참여시키고, 조운이 주도하던 중호보병을 통솔하게 했다는 사실은 자신의 사후 장완을 자신의 자리를 맡으면 제갈량 자신이 조운의 보좌를 받았듯 강유를 조운의 관직 코스를 걷게 하여 장완의 군사적 역량을 보좌하게 하고 조운의 뒤를 이어 북벌을 진행하는 주요 인재로 키우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장완 시대에 대사마 장완의 사마를 강유가 맡게 되니 제갈량의 안배로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만 강유전, 화양국지로 미루어볼 때 여기서 '정남장군'은 '정서장군'의 오기로 보인다는 의견도 있다. 이렇게 되면 앞서 말한 정남장군설은 틀린 것이 된다. 강유의 이름이 단독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제갈량의 마지막 북벌 무렵으로 [[사마의]]의 건벽거수에 대하여 제갈량과 문답한 내용이 정사 제갈량전에 남아있다. 또한 제갈량 사후 위연이 후퇴를 거부하자 제갈량의 유지에 따라 [[양의#s-1]]와 더불어 전군 후퇴를 지휘하고 위나라의 추격을 저지한 기록이 있다. 이때 급작스러운 반격 태세를 통해 사마의를 물러나게 만든 것도 강유의 지휘였다. 여기서도 최고 선봉격인 위연 다음으로 강유의 부대가 위치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그만큼 강유가 제갈량의 북벌에 알게 모르게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주요 공격진으로서 여겨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만 이 과정에서 한진춘추에 따르면 신비에게 절을 요청하는 사마의의 행동을 두고 싸우지 않고 명분을 얻으려는 사마의의 행동에 대한 함의를 이해하지 못하자 제갈량이 핀잔을 주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어떻게 보면 후일의 강유가 보여주는 전략가로써의 사고부재를 보여주는 암울한 복선이기도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