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철(축구인) (문단 편집) === 국가대표 경력 === [[연세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1989년에 '''만 17세 7개월'''로 국가대표팀에 입성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걸었다. 이 때 기존의 국가대표팀 선수들과 나이 차이가 제법 나서 "삼촌"이라고 불렀다고... 비록 A매치에서 활약하지는 못하고 훈련만 소화한 것이었지만 당시 같이 대학 무대에서 명성을 떨치던 [[홍명보]]도 받지 못했던 대우였다. 하지만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1990 FIFA 월드컵]] 직전 대표팀에서 낙마하고 그 자리에 대학 무대에서 맹활약하던 [[홍명보]]가 발탁되면서 월드컵 무대를 밟지는 못했다. 비록 월드컵에는 출전하지 못했으나 대신 1991년 [[포르투갈]]에서 열린 U-20 월드컵에 출전했다. 여담으로 당시 국가대표팀은 남북 단일 팀으로 구성되었는데, 북한의 최철과 윤철, [[대한민국]]의 박철과 함께 "철 4총사"로 불렸다고 한다. 이 대회에서 강철은 몸을 아끼지 않는 수비를 선사했고, 단일 팀은 첫 경기에서 [[아르헨티나]]를 1-0으로 잡는 이변을 일으키며 8강에 진출했다. 이후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표팀으로 발탁되었지만, 대표팀은 [[서정원]]과 [[정재권]] 등 수준급의 공격 자원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단 2골만을 득점하는 부진 끝에 3무로 토너먼트 진출에 실패했다. 유독 월드컵과는 인연이 없는데, [[1994 FIFA 월드컵 미국|1994 FIFA 월드컵]] 당시에는 대회 직전 발목 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을 당해 좌절되었고, 이후 1996년 [[상주 상무|상무]]에 입대해 1997년 전역했으나 당시 [[K리그]] 소속이 아니었던 상무에서 2년을 보낸 탓에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지라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1998 FIFA 월드컵]]에도 나오지 못했다. 이후 [[거스 히딩크]]가 감독으로 부임해 한 때 주장 완장까지 차는 등 대표팀의 핵심 멤버로 활약했지만 결국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2002 FIFA 월드컵]] 본선 엔트리에 들어가는 데 실패했다. 이 탓에 선수 시절 커리어에 비해 명성이나 인지도가 매우 떨어진다. 반면 [[AFC 아시안컵]]은 [[1996년 AFC 아시안컵|1996년]]과 [[2000년 AFC 아시안컵|2000년]]에 모두 참가했으며, 2001년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에도 발탁되었다. 다시 말해 국가대표팀으로 뛸 수 있는 대회에서 다 뛰었는데 결국 유독 월드컵만 못 나온 셈이다. 대표팀에서의 기록은 54경기 1골. 이외에 [[2000 시드니 올림픽]]에도 출전한 경력이 있어 선수 생활 동안 두 번이나 [[올림픽]]에 참가한 진귀한 기록도 가지고 있다.[* 강철 이외에 이런 기록을 갖고 있는 한국 선수는 [[이천수]], [[최태욱]], [[김동진(1982)|김동진]], [[김정우(축구인)|김정우]], [[박주영]], [[기성용]], [[권창훈]]이 있다.] 당시 수비수 와일드 카드는 홍명보로 낙점 되었지만, 대회 직전에 홍명보가 부상으로 이탈하자, 강철을 대신 집어넣었다. 강철 본인도 전혀 예상치 못한 선발이라 허겁지겁 준비해서 시드니로 갔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홍명보 땜빵 격으로 뛰던 선수로 기억되고 있다. 그 단적인 예가 2000 시드니 올림픽 당시 홍명보가 부상으로 [[와일드카드(스포츠)|와일드카드]]에서 낙마하자 대회 며칠을 앞두고 바로 [[시드니]]로 합류했던 사건. 허나 다른 사람도 아닌 홍명보의 땜빵이었고, 홍명보는 부상도 거의 없었기에 당시에 축구를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인지도가 지극히 낮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