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철이 (문단 편집) == 기록 및 전승 == 『[[어우야담]]』(17세기)에는 강철이라 직접 언급하지 않았지만 사오십 척의 넓이에 수백 리 되는 크기의 물체가 불길을 일으키며 지나갔다고 한다. 이 물체는 폭우와 천둥번개가 몰아치던 날 나타났다고 하며, 사람에 따라 화가 난 용 또는 악어의 일종이라고 했다.[* 그러나 악어는 조선에 존재하지도 않았고, 기본적으로 동양의 용은 서양의 드래곤처럼 불과 관련있는 동물이 아니므로 현대에 와서 강철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이수광의 『[[지봉유설]]』(1614년)에서 “강철이 가는 곳에는 가을도 봄 같다”는 속담을 소개하며, 그 의미를 알지 못하던 저자 이수광이 시골 노인에게 묻자 “강철이라 하여 식물을 말려죽이는 괴물이 있다”는 답을 얻었다. 이수광은 이것이 중국고전에 나오는 뱀꼬리 달린 소 괴물 비(蜚)와 같은 것이라고 추측했다. 이익이 쓴 『[[성호사설]]』(18세기 중반) 《만물문》편에서 강철이는 [[독룡]](毒龍)이라고도 하며 소와 형태가 비슷하고 폭풍, 낙뢰, 우박을 퍼부어 곡식과 가축을 상하게 한다고 한다. 주로 늪과 호수에 살고 있으며 밖으로 나오면 강력한 열기를 내뿜어 수분을 없애고 가뭄이 들게 한다. 김리만의 『학고집』(1742년)에서는 강철이는 독룡 비슷한 것인데 온 몸에 털이 있고 황색 기운을 띠고 있다고 한다. 김리만은 강철이를 중국고전의 효(蟂)와 같은 것으로 추측한다. 신돈복의 『학산한언』(1779년)에서 이의제라는 사람이 강철이를 목격했는데, “소 같기도 하고 말 같기도 하고 용 같기도 한 동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목격장소는 [[계룡산]]과 [[철원]]인데 철원에서는 [[우박]]을 뿌렸다고 한다. 신돈복은 강철이를 중국의 [[한발]](旱魃)[* 중국 신화의 [[황제(중국 신화)|황제 헌원씨]]의 딸. 몸에 불덩어리가 들어 있어 사방 천리에 가뭄을 일으킨다. 한발이라는 말 자체가 한자로 가뭄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가뭄이 의인화된 여신.]과 동일시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 《성경잡지》편(1780년)에선 청나라 사람과 필담을 할 때, 중국의 화룡, [[응룡]], 한발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박지원이 조선에서는 그런 것들을 강철(罡鐵)이라고 부른다고 대답했다. 화룡이 내려 앉은 곳 주변의 호수와 강은 말라버리고 가축들은 뼈까지 모두 불타 녹아버린다고 한다. 위의 속담(강철의 가을)도 인용했는데, 동석한 중국 사람이 '사주를 따져 보면 내가 태어난 해가 그 강철의 가을이니 팔자 펴기는 글렀다'고 농담을 한다. [[이덕무]]의 『양엽기』에서는 『술이기』, 『죽창소품』이란 두 권의 책을 참고하여 강철을 중국 요괴 [[후]](犼)[* 오래 묵은 [[강시]]가 신통력을 얻어 변한, 사자개 비슷하게 생긴 식인괴물. 가뭄을 일으킬 수 있다. 악행을 못 하도록 관음보살 등 불교의 신들이 올라타서 억누른다고 한다.]와 동일시했다. 이덕무의 말에 따르면 망아지처럼 생겼으며, [[김포]]의 [[늪]] 속에 살면서 가뭄을 일으킨다고 했다. 강철이를 바닷물에 몰아넣으니 열기로 바닷물이 들끓었다고 한다. 『한국민속신앙사전』에 채록된 기록으로, 경남지역에서는 “용이 되는데 실패하여 땅으로 떨어지는 괴물”인 강철이를 쫓아내는 "꽝철이 쫓기"라는 [[기우제]]를 벌였다고 한다. [[밀양]] 석골사에는 상좌를 질투한 주지가 도술을 부려 상좌를 강철이로 변하게 했다는 전설이 있다. [[청도군]] 대비사의 승려가 용이 되려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꽝철이가 되어 농사를 망치기에 이 지역에 "꽝철이 쫓기" 행사가 생겼다고 한다. 1957년 [[양산군]]에 홍수가 났는데, “소위 용못된 「깡철」이란 괴동물”이 나타나 홍수를 자유자재로 증감시켰다는 괴소문이 돌고 강철이 2마리가 나타나 사람들이 구경했다는 기사가 있다. 강철의 움직임에 따라 수면이 5미터 가량 오르내렸다고 한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708110020920300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7-08-11&officeId=00020&pageNo=3&printNo=10721&publishType=00020|동아일보 기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