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풀 (문단 편집) == 상세 == 본명은 강도영으로 강풀이라는 필명은 [[복학생]] 시절 풀색의 군복을 즐겨 입었기 때문에 듣게 되었던 별명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강풀의 본명이 강도영이다 보니 [[강도하]]랑 형제라는 썰이 나돌기도 했고, 본인들도 형제라는 농을 치기도 했다. 같이 웹툰계를 개척했기에 형, 동생으로 가까이 지내기는 하지만 진짜로 형제나 친척인 건 아니다.] 스토리는 잘 짜도 그림을 잘 그리는 편이 아닌지라 본좌급이라고 평가되는 인물은 아니지만, 2000년대 초반에는 그 당시까지만 해도 생소했던[* 당시에는 [[스노우캣]], [[마린블루스]], [[파페포포 메모리즈]]와 같은 옴니버스, 에세이 형식이 주를 이루었다.] 스토리 형식의 웹툰인 [[강풀의 순정만화|순정만화]]를 연재하면서 '''한국 만화사에 한 획을 그었고''', 순정만화의 대성공으로 파란, 엠파스, [[네이버]], [[야후]] 등 다른 포털사이트에서 웹툰서비스를 개시하는 계기가 되었기에 '''웹툰 연재시스템 정착에 기여한 인물로 손꼽힌다'''.[* 물론 그 이전에도 [[스노우캣]]이나 [[마린블루스]], [[파페포포 메모리즈]], 포엠툰같은 웹툰이 대히트를 쳤지만 스토리 형식의 장편 웹툰은 아니고 [[옴니버스]] 형식이거나 에세이툰 형식이었고, 파페포포 메모리즈같은 경우에는 후에 [[다음 웹툰]]에 연재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초기연재 당시에는 어디까지나 카페에서 연재되는 형식이었지 포털사이트에서 돈 받고 연재되는 시스템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순정만화의 대성공 이후로도 꾸준히 흥행하고 있기에 한국 웹툰의 역사에 대해서 서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아내가 꽤 미인이라 화제가 되기도 했으며 둘 사이에서 태어난 첫 아이의 태명은 은총이라고 한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만화책]]을 들여놓았던 것도 있었기 때문에 만화책을 즐겨봤지만 점차 자라면서 그리 관심이 없어졌다가 [[강원도]] [[원주시]] [[상지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면서 [[한겨레]] 신문을 보았는데 ~~[[박재동]]~~의 만평이 인상깊게 남겨져서[* 2018년 이후에 성추행 범죄가 폭로되면서 파렴치범으로 낙인찍혔지만 90년대와 2010년대까지는 만화계와 애니업계에서는 비록 [[허영만]]이나 [[이현세]], [[고우영]], [[박봉성]]같이 히트작을 연달아 낸 작가는 아니지만 시사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등 나름대로 주목도가 높은 인물이었다. ~~성욕 발현이 애꿎은데다가 발현되는 성격만 아니었더라도~~] 만화가의 삶을 살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하며, 이 당시 [[상지대]] 구재단([[김문기(정치인)]])의 사학비리에 관한 대자보와 투쟁 만화를 그렸는데 어찌나 열정적으로 많이 그렸는지 코피를 흘리면서까지 만화를 그린적도 있었다고 한다. 어쨌든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 다음에 만화동아리를 만든 적도 있었지만 후배들과의 성향 차이도 있었던데다가[* 강풀은 지치지 않는 물음표에서 자신이 민중만화나 시사만화 위주로 그리길 원했던 반면에 만화동아리에 입부한 학생들은 순수 만화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회고하고 있다.], 미숙한 운영과 과중한 업무로 인해서 만화동아리는 망해버렸다(...). 이후로 [[방위병]]으로 군복무를 했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청년층 인구가 많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방위로 복무하는 비율이 높았다.(현재의 상근예비역과 공익근무요원) 물론 그 당시에도 억울함 반 질투심 반으로 현역들에게 까이는 건 일상이기는 했다.] 복학 후에 [[국토대장정]]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만화가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고, 만화대자보를 그렸던 경험을 내세워 당시 영서신문[* 원주시에서 발행하는 지역신문으로 2000년에 사명을 영서신문에서 원주투데이로 바꾸었다.]과 대학학보에 만평을 실게 되었고, 전교조에도 이력서를 내서 만평을 싣기도 했으며, 졸업전 마지막 학기에 우연히 자기 대학교에 외부인사로 강연을 하러 온 [[김어준]]과 친분을 쌓게 되어 1999년말부터 2000년초까지 초기 [[딴지일보]]에도 만화를 연재[* 이는 훗날 김어준이 자신이 진행하던 MBC 라디오 상담프로그램에 강도영을 초대해서 밝힌 일이다. 당시 청소년 시청자가 홈페이지로 웹툰작가 게스트를 요구했고, 김어준은 자신이 무명때부터 사적으로 아는 만화가가 있다고 말하며 강도영을 섭외한 것이다. 졸업을 앞둔 시점이던 강도영이 강연이 끝나고 김어준에게 자신이 딴지일보를 보고 있다고 말하며 "연재 고료는 안 주셔도 좋으니 거기 연재하게 해달라"고 요구했고, 김어준이 이를 흔쾌히 허락해서 인연이 생겼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강도영은 몇개월 지나면 김어준이 박봉이라도 좀 줄 줄 알았는데 진짜 한푼도 안 주길래 경제적 사정상 그만두고 다른 일자리를 찾았던 거라고 한다. 김어준은 자신도 회사재정 상태가 안 좋은데 무급이라도 하겠다고 한거니 연재해준거지, 돈 달라고 그랬으면 줄 돈이 없어서 허락 못했을 거라며, 코찔찔이인 강풀을 웹툰 데뷔시켜줬던거니 자신에게 고마워해야 한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런 뒤에도 친분관계는 계속 유지해왔다고 한다. 김어준의 모친상에도 강풀이 왔었고, 반대로 강풀의 부친상에도 김어준이 왔었다고 한다. ]한 적이 있었다. 다만 근래의 강풀은 김어준보다는 [[주진우(1973)|주진우]]와 더 절친하다.[* 주진우와 더불어 가수 [[이승환]], 인생강의로 유명한 헌법학자 [[김제동]], 영화감독 [[류승완]] 등과 강동모임이란 친목모임을 만들어 활동중이다.] 졸업 후에는 다른 신문사들과 잡지사들을 찾으며 이력서를 냈지만 강풀이 그린 만화들이 그림이 투박하다거나 세련되지 못하다는 이유 때문에 퇴짜를 맞기 일쑤였다.[* 그림 실력도 실력이었지만 대학시절을 거치면서 민중만화의 영향을 받은데다가 시사만화를 그렸기 때문에, 만화출판사에서 출간하려는 만화와 스타일상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만화업계 관계자들이 강풀의 작품을 보고서 뜨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했기는 했다. 물론 만화잡지 업계 전반이 몰락의 길을 걷고 강풀은 장편웹툰으로 대히트를 치게 되면서 예상과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기는 했지만.] ~~그리고 그때 퇴짜 놓았던 사람 중 [[김양수(만화가)|하나]]랑 현재는 같이 게임도 하고 친하게 지낸다고~~ 그래도 아주 [[백수]]로 지냈던 것은 아니었고, 월간 잡지사 몇 곳에서 연락은 와서 알바 개념으로 일단 그림을 그릴 수는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주간 토토에서 연락이 오면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취직했지만 강풀 자신이 추구하던 삶과는 큰 차이가 있었고, 회사 운영도 어려워졌기 때문에 오래지나지 않아 사표를 내면서 퇴사했고, [[2002년]] [[6월]]에 홈페이지인 강풀닷컴을 만들었다. [* 블로그 쪽은 강풀닷껌이다.]강풀닷컴에서 당시 [[엽기]] 트렌드에 걸맞게 엽기 개그 만화물인 일쌍다반사를 연재하기 시작하며 네티즌들에게 유명세를 날리기 시작했고, 그간 민중만화와 시사만화를 그렸던 경험을 살려 사회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그리고 그 해 하순에 [[다음]]과 계약하면서 다음 영화 섹션에서 영화야 놀자라는 영화 리뷰 만화를 연재했고, 별 볼 일 없는 처지의 만화가에서 메이저급 만화가로 올라가는 계기가 되었다. 영화야 놀자의 연재가 슬슬 끝나가고 있을 때가 되었을 때쯤 한창 다음에서 스캔본 위주로 서비스했던 다음 만화와는 별개로 다음 웹툰의 전신인 [[다음 만화속세상]]을 런칭했고, 해당 섹션에서 주로 에세이툰이나 옴니버스 만화, 시사만평이 연재되었다. 이때 영화야 놀자의 연재가 끝나고 슬슬 다음 작품을 구상하던 차에 다음측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서 그 동안 웹툰의 대세를 이루웠던 단편 웹툰 대신에 당시로써는 새로운 형식의 웹툰을 구상하기 시작했고, 2003년 8월부터 2004년 4월까지 [[강풀의 순정만화|순정만화]]라는 '''당시에는 생소했던 스토리 형식의 장편웹툰을 연재하면서''' 페이지뷰 3200만뷰, 일일방문자수 200만명, 댓글수 25만건을 기록하는 '''초대박'''이 났고[* 더군다나 이 수치는 여타 블로그나 카페를 통해 접속한 횟수는 제외한 것이다.], 내용이 아주 특별한 작품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당대까지만 해도 옴니버스 웹툰이나 에세이툰 위주였던 한국 웹툰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음으로써 웹툰 장르의 다양화를 선도하게 되었고 [[파란(포털)|파란]], [[엠파스]]와 [[네이버]] 등 타 포털사이트에서도 기존의 만화 다시보기 서비스와 별개로 따로 웹툰 서비스를 개시하게끔 만들어서 웹툰 연재시스템을 정착시켰다. 또한 이러한 웹툰 연재시스템은 나중에 네이버와 카카오 네이버에서 분사된 NHN이 해외진출을 모색하면서 일본, 대만,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브루나이, 태국, 영미권, 스페인어권, 프랑스어권 국가 등으로 수출되었고, 중국에도 영향을 끼쳤으니 세계 만화계에 끼친 나비효과는 가히 어마어마한 셈이다. 물론 웹툰시스템의 해외진출은 강풀이나 여러 만화가들이 주도해서 진행한 일이 아닌 네이버와 다음 등의 연재처들이 주도한 일이니 강풀의 공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순정만화의 대히트로 웹툰 연재시스템과 세로 스크롤 형식의 웹툰이 확산되는데 있어서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 자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연재한 작품들도 대체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으며 ~~쩐을 얻은~~[* 다만 웹툰 유료화가 진행되기 이전에는 포털 자체의 점유율 올리기 용이었다.] 다음-카카오가 만화사업을 확장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것은 맞다. 그 덕택에 연재가 완료된 모든 장편작은 판권이 팔려 영화화(아파트, [[바보]], [[순정만화]], [[그대를 사랑합니다]], [[26년]], [[이웃사람]] 등) 또는 연극화(순정만화, 바보, 그대를 사랑합니다 등)되었거나 제작이 진행 중이고, 결과물이 망작이 되긴 했지만 애니화(타이밍)된 작품까지도 있다. 하지만 작가로서의 능력보다는 '웹툰'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선점한 이익을 많이 보았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최규석]]과 함께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최다 수상한 경력에서 보듯이 수십년간 꾸준히 작품성과 예술성 또한 높게 평가받는 작품을 내놓고 있으며, [[강풀의 순정만화]]를 기점으로 하여 웹툰의 장르를 다양화시키고 포털 위주의 웹툰 연재시스템을 정착시키는데 공헌시켰다는 점에 있어서 한국만화계에 큰 업적을 남긴 것은 맞다. 또한 시나리오 작가로서 <[[괴물(한국 영화)|괴물]]>의 속편을 집필했던 적이 있었는데... 제작사 측에서 [[청계천]]에서 괴물이 쏟아져 나온다는 강풀의 시나리오에 부담을 느껴서 결국 하차했다. [[5.18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만화 [[26년(웹툰)|<26년>]]의 영화화도 취소된 적이 있었는데 이는 이후 2012년에 제작에 착수하여 개봉했다. 웹툰 작가로써는 월 2천만원대의 원고료를 받는다고 알려져있다. 다만 연재 자체는 1년에 6개월 정도만 하는지라 연간 원고료는 1억 수준. 2002년 영화가 좋다 시절부터 꾸준히 다음에서 연재하면서 친분과 신뢰를 쌓아온데다가 연재작도 꾸준히 평타를 치고있고 순정만화 시절만큼은 아니더라도 작품을 애호하는 독자층이 여전히 상당하니 [[카카오(기업)|카카오]]에서도 특별 대접을 해주는 것이다. 물론 원고료만 받는 것은 아니고 그 동안 책이 꽤 팔린 것도 있기 때문에 소소하게(?) 부수입을 얻고 있기도 하다. [[무빙]] [[타이밍]] [[브릿지]] 등 세계관이 연결되는 작품들을 계속 작업하면서 최근에는 1년 정도 스토리를 준비하고, 1년 연재하는 형식이 되었다. [[무빙]]은 2015년 연재하고, 2016년 다음 작 준비, 그리고 2017년에 [[브릿지]]로 돌아와 그해 연말에 완결했다. 다음작으로 예고된 '히든'은 2019년 연재 예정이지만 [[2020년]]이 지나도록 시작을 하지 않고 있고 작가의 근황도 전해지지 않는 편이다. 한때 다음에서 가장 댓글을 많이 받은 작가다. 순정만화가 연재되었을 때 댓글 수천개가 줄줄히 달렸고, 이후 작품도 대체로 그런 경향이 있었지만 2000년대 후반 이후로 네이버 웹툰의 지분이 높아지면서 상대적으로 다음 웹툰의 이용자가 적어졌고, 포털 점유율도 침체인 상황인지라 댓글 300개 정도가 많이 받는 수준이고, [[이끼(웹툰)|이끼]], [[미생(웹툰)|미생]] 등 대작을 쏟아내며 대중들에게도 자신의 이름을 알린 [[윤태호]] 작가도 [[파인]]의 댓글이 200개를 못 넘을 때가 있는 것에 비해 강풀은 못해도 600개 이상의 댓글이 달린다. 물론 이 댓글도 한창 때에 비하면 좀 아쉬운 수준. 물론 자매 사이트(?)인 [[카카오 페이지]]에서도 다음 웹툰이 연재되는 것도 있고 하니 수요가 분산되는 것도 있다. 정작 카카오 페이지에서 강풀 작품이 잘 연재되지는 않고 있지만. 모교인 상지대에서 2005년부터 2008년까지 문화콘텐츠학과 겸임 교수를 맡기도 했고, 학생시절의 경험 덕택에 상지대학교에서 김문기 일가가 복귀하려고 자 이에 반대하는 시위에 대대적인 지지를 보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