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개신교/대한민국 (문단 편집) === 조선 개항기 === [[개신교]]의 한국 유입은 서학([[가톨릭]])의 전래보다 200년 이상 상당히 뒤늦었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16세기부터 [[예수회]]의 주도로 동양을 비롯한 해외 선교에 적극적이었지만 개신교가 주류인 [[영국]], [[네덜란드]], [[독일]], [[미국]] 등의 북방국가들은 [[18세기]]까지 국외 선교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19세기 이후, 영미를 주축으로 [[장로회]], [[감리회]] [[선교사]]들이 조선에 방문하기 시작하는데 [[루터교회]]와 [[성공회]]가 주류인 유럽의 개신교 구성과 달리[* 예외적으로 [[네덜란드]]와 [[스위스]]는 우리나라와 개신교 구성이 엇비슷하며, 특히 네덜란드는 같은 [[장 칼뱅|칼뱅주의]]란 공통점 때문인지 직접적인 교류가 드문데도 한국 개신교 신학계에서 생각보다 자주 언급된다.] 한국 개신교 교단은 [[장로회]]와 [[감리회]]가 주류가 되었다. 1832년 유대계 독일인 루터교 목사 칼 귀츨라프는 기록이 남아있는 최초의 서양인 선교사이다. 칼 귀츨라프는 중국에서 선교활동 중에 조선의 소식을 듣고 다른 지원 없이 '혼자' 개인자격으로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의 1000t급 로드 암허스트호에 의사 겸 통역사로 승선하였다. 그 후 [[황해도]]와 군산만을 돌아서 [[1832년]] [[7월 25일]], [[충청도]] 고대도 부근에 도착하였다. 비록 수십여 일 밖에 머무르지 않았지만 서양 감자 파종법과 포도 재배를 조선인들에게 알려주었다고 한다. 짧은 기간동안 칼 귀츨라프 선교사는 직접 [[한글]]을 배워서 귀환 후에는 중국 선교 잡지에 발표하여 독일과 영어권에 조선을 소개하였고 자신이 독자적으로 [[주기도문]]을 최초로 [[한국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조선에선 25일을 머문 끝에 지방관과 필담을 나눴지만 책봉국인 중국의 허락없이는 통상을 금한다는 국왕과 조정의 뜻에 따라 조선을 떠나게 된다. 칼 귀츨라프는 해당 교단과 선교회의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했고, 선교 중 필요한 비용은 자비로 지출하였으며, 더불어 외부 지원도 없고 조선의 협조 또한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개신교계에서는 영국인 개신교 목사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를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로 보고있다.[*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토마스 목사를 선교 중에 사망한 것이라고 보긴 어렵다는 입장이긴 하나 어쨌거나 일단 선교 목적으로 조선에 와서 사망한 것 자체는 맞다.] 토마스는 중국에서 조선인 가톨릭 신자들을 만난 것을 계기로 하여, 1865년 조선에 입국하여 성경을 배포하며 몇달 간 선교 활동을 하였다가 배가 파손되어서 다시 북경으로 돌아가였다. 이듬해인 1866년 [[병인박해]]에 항의하기 위하여 조선으로 향하는 프랑스 함선에 통역관으로 같이 오기로 되어있었으나,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선은 때마침 [[베트남]]에서 일어난 난을 진압하기 위하여 상해를 떠났다. 이 소식을 들은 토마스는 미국의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다시 조선으로 떠났다. 자세한 내용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참고하길 바란다. 한국 최초의 교회는 1883년 5월 16일 [[서상륜]][* [[만주]]에서 최초의 국역 성경인 [[누가복음]] 한글 성경을 출간하는데 참여한다.]과 서경조가 황해도에 설립한 [[소래교회]]이다.([[http://www.incheonin.com/news/articleView.html?idxno=13975|출처1]], [[http://www.saeronam.or.kr/home/tour_zone5|출처2]]) 즉 최초의 교회는 조선인 스스로에 의해 세워졌다. 이후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믿기 시작하면서 개신교가 조선에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개항기에 이르러 많은 북방국가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하면서 대한민국, 조선의 개신교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아펜젤러]]나 [[언더우드]], [[호러스 뉴턴 알렌]], 스크랜튼,유진 벨[* 스코틀랜드계 미국인이며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로 1895년 4월 8일 한국에 파송되어 광주·목포 지역에서 활동하며 학교와 병원을 설립한다. 사위인 [[윌리엄 린튼]]은 대전 [[한남대학교]]의 설립자이며, 증외손자는 대한민국 1호 특별귀화자로 잘 알려진 [[인요한]] 박사이다.]과 같은 선교사들은 배우지 못한 조선인들의 교육 및 계몽을 위하여 삶을 헌신하였다. 이들은 지금의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 [[경신학교]] 대학부가 기원], 최초의 서양식 사립학교 [[배재학당]], [[숭실학교]] 등의 근대 학교들을 설립했다. 또한 여성교육에도 뜻을 두어, 여성 선교사인 스크랜튼는 한국 최초의 여학교인 [[이화학당]]을 설립하였고, 이를 시작으로 [[배화학당]], [[숭의여학교]], [[정신여학교]], [[삼일소학당]] 등의 여학교도 설립했다. 연세대학교 설립자로 알려진 언더우드 선교사는 개신교 최초의 조직교회 [[새문안교회]]를 설립하였다. 그 후, 서울 각지에 [[승동교회]], [[정동교회]] 등의 개신교 교회가 설립되었다. 이렇게 개신교가 급격히 확장된 이유는 양반 계층 입장에서는 서구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최단 루트가 개신교 선교사를 통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고, 오랫동안 소외받았던 일반 민중 및 하층계급 입장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이념'''이 담긴 기독교 정신과 민주주의적 사상에 이끌렸기 때문이다. 특히나 [[평양]]은 조선 초기 이시애의 군사반란으로 인해 오래전부터 권력에서 밀려난 비주류 세력이 이루던 북방 지방이었고 양반에 비해서 유교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웠던 [[상인]]세력들이 많은 지역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통해서 교세가 빠르게 확장될 수 있었다. 이 덕분에,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 정도로 조선 개신교의 산실이었다. 안타깝게도 [[6.25 전쟁]] 직후 [[김일성|독재자]]의 가혹한 탄압 탓에 이북 지역의 기독교 전통은 씨가 말라버렸다. 사실 선교 초기부터 주류 양반 계층은 제사를 조상을 숭배하는 제사로 문제 삼는 것 때문에 가톨릭이나 개신교나 부정적으로 보았다. 기독교는 제사를 우상숭배로 여겼기에 조선인들은 기독교를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無父無君)' 사학(邪學)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항 이후 선교 제한이 풀리면서 조선 조정에서도 역시 서양인들을 견제했고, 이 때문에 외국인 선교사들이 수탈이 심한 지역에 들어가 백성들 대신 지방관들에게 대들어서[* 주로 [[황해도]], [[평안도]]] [[절대 이분들을 놀라게 하면 안 돼|지방관들이 전전긍긍했다.]][* 아무래도 [[영남]] 지방과 [[기호]] 지방은 [[유림]]의 세가 상당했기 때문.] 민중들이 개신교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그리고 포교 과정에서 서양 신문물을 선물하며 선교했기에, 신문물에 거부감이 없는 상인 계층들에게서 환영 받았고, 이전의 [[천주교]]처럼 여성들도 신자의 대다수가 되었다. 사실 제사 문제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기독교 교리들은 성리학과 비슷한 점이 많아서 유림들 입장에서도 거부감이 없었고[* 지금도 일부 개신교 교회에서는 은근히 유교 윤리와 구약 율법에 명시된 윤리가 비슷하다는 걸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온 표현이 다름아닌 '''위군위민(爲君爲民)의 종교.''' 특히 [[1907년 평양 대부흥]]을 기점으로 1907년 경에는 천주교와 신자 수가 역전하게 된다. 한국 개신교의 특징 중 하나인 [[술]], [[담배]]를 자제할 것을 권하는 풍습도 이 때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는 불교도 마찬가지라[* 여기에 불교는 생명존중사상으로 육식도 금지하고 한국쪽 종파는 연애나 결혼도 금지한다.] 거부감이 없었다. 특히 성리학의 경우는 원래 [[술]], [[담배]] 등을 금지하기 때문에 닮은 점이 많다. 본래 선교사들의 주류 교단인 [[장로회]], [[감리회]]부터가 음주 및 흡연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고,[* 사족으로 영미식 장로회와 대륙식 개혁교회의 차이점들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같은 개혁주의임에도 [[스위스]], [[네덜란드]] 등 대륙식은 전통적으로 음주, 흡연에 관대했다.([[http://www.kosinnews.com/news/view.html?section=79&category=90&page=4&no=6009|근거]])] 선교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생활 개선의 일환으로 교육 및 의료 사업 등과 함께 금주, 금연 운동을 추진하였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서 천주교 근본주의자들은 왕조에 야합한 개신교 선교사들을 문제삼았다. 개신교를 유대교와 야합한 종교라고 비난했듯이 이번에는 [[유교]]와 야합한 세속주의적 종교라며 비난했다.더욱이 우리가 실컷 고생하며 개척했는데 낼름 다 먹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천주교]]도 필요에 따라 조선왕조와 어느 정도 통교할 때가 있었고 조선에서도 서학의 일종으로 온건하게 취급해 줄 때가 있었다.] 사실 [[천주교]]는 왕조에 대해 그렇게 저항하는 입장이 아니였고, 교리적 특성만 놓고 보면 오히려 [[개신교]] 측이 더 저항해야 옳았겠지만 뭔가 입장이 바뀌어 버린 이유는 [[황사영 백서 사건]] 몇십 년 뒤 상황이 반대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즉 [[개신교]]가 위국위민 종교가 될 시점에 [[천주교]]는 나폴레옹 때처럼 근대주의 및 산업혁명과 동시에 다투는 종교가 되고 있었기 때문. 또한 상대적으로 뒤늦게 전파되기 시작한 개신교의 입장에서는 괜히 왕조를 건드렸다가 [[라이베리아]] 같은 일이 터질까 봐 왕조를 상대로 크게 대립각을 세우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