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개신교/대한민국 (문단 편집) === [[일제강점기]] === 일제 시대 신자수는 전체 인구의 1%에 불구했으나 [[3.1운동]]을 비롯한 항일 민족 운동에서 많은 족적을 남겼다. 민족 지도자 상당수가 개신교와 선교사의 영향으로 근대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때 개신교에 대해서 나빠진 사회적 인식과 맞물려서 반개신교 진영의 "종교 중에서 개신교가 [[친일]]에 가장 앞장선 종교다!"는 왜곡과 선동이 인터넷 상에서 널리 퍼트려졌고 실제로도 친일 활동을 했던 개신교인들도 있긴 했으나, 독립운동가나, 항일을 하던 개신교인도 당연히 많았다.[* [[안창호]], [[김구]], [[유관순]], [[김규식]] 등이 있다.] 실제로 교단 차원에서 친일에 앞장선 [[가톨릭]] 교회의 이미지를 뒤집어 쓴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선 가톨릭은 교단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친일 행각을 벌였다. [[105인 사건]] 같은 굵직한 사건을 일으켰으며 [[안중근]] 같은 독립운동가 평신도는 철저하게 박해받았다. 덕분에 독립운동가로 인정받는 성직자를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아이너리하게도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 숫자는 적은데, 그건 교단 전체가 친일행위를 했기 때문에 친일로 특출난 인물이 적기 때문이다.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704|#]] 오히려 개신교에서는 자신들이 독립운동의 한 축이었다면서 항일 민족운동의 역사를 굉장히 자랑스러워한다. 일사각오로 유명했던,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신사참배]]에 대항했던 목사들을 자랑스러워하는 고신 교단이 그 예이다. 또한, [[3.1 운동]]의 [[민족대표 33인]] 중 16명[* 친일에 적극적인 [[가톨릭]] 교회는 한 명도 참여하지 않았다.]이 개신교 신자였고, [[서울대교구]]의 [[105인 사건|밀고]][* 밀고자는 [[니콜라 빌렘]] 사제와 [[귀스타브샤를마리 뮈텔]] 주교다. 가톨릭 교회는 이 사건의 대가로 [[명동성당]] 인근의 부지를 얻었고 아직도 소유하고 있다.]에 의해 체포된 신민회의 독립운동가 105명 중 92명도 개신교 신자였다. 이런 부분에서 반개신교 진영의 역사왜곡과 전횡이 심해서 역풍을 맞는 사례도 보인다. 결국 적극적으로 친일 활동을 했던 개신교인은 광복 후에 쫒겨났거나 개신교인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기에 후술할 신사참배 문제가 유야무야되기도 했다. 그래도 신사참배는 강압적으로 한 것에 유림 불교 천주교등 타종교나 신앙이 없는 조선인들은 거의 반발없이 모두 받아들였고 오로지 유일신 신앙의 개신교에서만 반발했기 때문에 책임 회피의 여지라도 있지만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했던 개신교인들이 욕받이가 되기도 했고.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좌우 대립으로 묻혀진게 크다.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 개신교의 중요 사건은 저항과 파괴로 볼 수 있다. 서양 선교사들로부터 받아들인 개신교가 민족 학교를 비롯한 교육기관을 서울과 평양을 중심으로 세우기 시작했고, 이를 통해 [[유관순]], [[안창호]]와 같은 [[독립운동가]]들과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해냈으나, 일제강점기 말기로 갈수록 극심한 탄압을 거치며 많은 수의 개신교를 포함한 기독교인들이 변절한 것이다. 앞서 말했듯, 한국의 개신교는 인터넷상 반 개신교 성향에서 극딜하듯 친일에 적극 나선 것이 아니다. 신사참배 문제와 관련하여 타종교, 비종교인과 오십보 백보 또는 도긴개긴. 같은 비판과 내부적 반성은 타당하다 할지라도, 아무 근거없이 '개독이 친일에 앞장섰다.'라고 단정짓는 것은 엄연히 역사 왜곡이다. 독립운동을 이끈 교회를 이어받은 신학교나 교회를 주축으로 하는 친일 연구가 현재에도 활발하다. 재밌는 것은, 개신교 학계는 물론 반개신교 성향의 일반인들도 이 자료들을 자주 사용한다는 점이댜. 단적인 예로 일제강점기 내내 가장 극심한 탄압을 받은 종교는 [[천도교]]와 더불어 개신교였고, 신사참배에 거부하여 2천 명의 신도들이 체포되고 200여 개의 교회가 강제폐쇄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50여 명의 신자가 순교했다. 개신교는 일제가 1919년 3.1운동까지 구한말 민족사학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개신교계 [[미션스쿨]]들을 통폐합시켜왔기에, 서양학문을 토대로 민권 사상등을 가르치는 통로로 여겨왔고 이는 해방까지 계속되었다.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중에 16인이 개신교측 인사였는데 이 당시 개신교의 교세는 전체 인구의 1.1~1.3%에 불과했다. 당연히 일제는 개신교를 통치에 방해되는 집단으로 여겼고, 지속적인 감시 대상이었다. 한편 식민지 뿐만 아니라 일본 본토에서도 개신교인을 비롯한 기독교인은 노동조합 참가자, 사회주의자들과 더불어 [[특별고등경찰]][* 일반 사법 경찰과 달리 정치범과 중요 사건을 다루는 경찰조직]의 주 감시 대상이었는데 기독교의 교리상 국가 [[국가신토]]의 [[천황]] 숭배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3.1 운동의 경우처럼 제암리 교회 학살이 전세계에 널리 퍼진것도 한국교회의 희생과 선교사의 덕이었고, [[3.1 운동]] 과정 기독교인 체포자는 전체의 17.6%인 3천여명에 달했었다. 특히 [[유관순]]을 비롯한 여성 체포자는 470여명중 309명이 개신교도였다. 일제 강점기에 개신교는 구한말 신문물과 새로운 사상의 유입을 가져왔고 이는 민족의식을 가진 지도자들을 대거 배출하면서 반일의 집결지가 되었다. '''1911년 [[105인 사건]]의 경우 개신교인이 92명'''이었고, 사실상 일본은 개신교단을 탄압대상으로 삼았다. 구한말 개신교 인사중 대표적인 인사들은 독립운동가중 상당비율을 차지하는데 [[이승훈(1864)|이승훈]], [[양기탁]], [[이회영]]-[[이시영(정치인)|이시영]] 형제, [[조만식]], [[여운형]], [[전덕기]], [[유동열]], [[이동휘]], [[이동녕]], [[강우규]] 전도사, [[이재명(독립운동가)|이재명]], [[김상옥]], [[김마리아(1891)|김마리아]], [[유관순]], [[안창호]], [[김구]], [[김규식]], 반민특위의 창설자 김상덕등의 인물들은 개신교인이었다. 이는 '개신교의 대표적 인물은 [[이승만]]만 있고 나머지는 친일파다.'라는 선동과는 정반대다. 독립운동사 인물들 가운데 개신교 인사들도 민족 해방에 앞장섰다. || '''신사참배거부운동(神社參拜拒否運動)''' 1930년대 후반부터 1945년 광복이 되기까지 주로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한 신앙수호를 위한 항일운동.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8B%A0%EC%82%AC%EC%B0%B8%EB%B0%B0&ridx=0&tot=15|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신사참배거부운동(神社參拜拒否運動)]]|| 한국 개신교의 [[일제강점기]]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문제가 바로 '''[[신사참배]]''' 문제이다. 반개신교 성향의 비난이 신사참배를 개신교에서 결의하여 친일에 앞장선 걸로 호도하지만 다른종교는 그다지 저항이란것도 없었고 개신교 조직들이 저항하다 일부는 저항하고 나머지는 굴복한 것이지 앞장서서 나섰다는것은 전형적인 가짜뉴스에 역사왜곡이다. 불교의 경우 딱히 신사참배를 막을 만한 교리가 없었고, 일제 불교의 침투로 교단이 조직은 일본 [[승려]]에 장악되면서 자연스럽게 일본 특유의 신불습합 문화가 그대로 조선에까지 유입되었고, 천주교는 1936년 신사참배를 승인했는데 일본의 천주교와 교황청에서 세속권력과 지시를 그대로 따랐기 때문이다. 유림의 경우 충군애국은 본분이기 때문에 당연히 막을 명분도 없다고 손을 놨으며 대부분의 무종교인들 역시 창씨개명과 마찬가지로 진학 취업 그리고 자신을 비롯한 가족들의 안위 때문에 수동적으로 따라갔다. 개신교는 1930년대 초반부터 일관되게 교리에 따라 신사참배를 거부했으며 이러한 종교는 개신교 뿐이다. 당시 조선인구의 1%대의 개신교에서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자가 나온게 사실이다. 그러므로 당시 이 문제에 유일하게 저항한 종교는 역시 개신교였으며, 신사참배의 경우, 1938년 4월을 기점으로 강압으로 일부 교단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교단 차원에서 결국 신사참배를 결의하기로 했다으나 이는 신도들 다수의 의견이 아니다. 그 여파로 해외 선교사들의 영향력이 강한 교단 내에선 신사참배에 대해 극심하게 의견이 갈리고 권력에 맛본 어용목사들이 하나 둘씩 일제의 회유에 넘어가면서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대부분의 개신교 교단이 자발적으로 폐쇄하여 불복종하거나, 용인하여 존속하는 결정을 따랐다. 이에 반발한 사람들이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기도 했다. 아예 [[박헌영]]처럼 유물론을 받아들여 [[반기독교]]가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파일:external/www.newsnjoy.or.kr/203838_55130_51.jpg]] 신사참배 결의한 직후, 평양신사를 참배하는 장로회 총회 임원들 모습. 1938년 9월 12일 자 <조선일보> 사진. 이하는 [[http://m.newsnjoy.or.kr/articleView.html?idxno=196911|개신교 진보 언론 뉴스앤조이에서 개신교 과거사에 대한 철저한 반성을 위해 쓴 칼럼(이종록 한일장신대 구약학 교수)]]에서 인용된 내용의 일부를 재인용한 것임을 밝힌다. 소위 "개신교인이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어야 하는 성경적 이유". > [[미국|북미합중국]]의 워싱턴 동상이 있는데 합중국 국민으로는 그 동상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고, [[성조기|합중국 국기]]에 합중국 국민으로 누구나 다 경의를 표합니다. 합중국은 기독교국이니만치 기독교인이 대다수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다 우상숭배자로 간주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대일본 황국신민만이 국조숭모(國祖崇慕)하는 의식에 기독교인이 어찌 참례할 수 없으며 황국(皇國)을 대표한 일본 국기에 경의를 표함이 어찌 기독교인에게 죄가 되겠습니까. 전화위복(轉禍爲福)하는 자 있으나 기독교인은 그러한 의미에서 참배함은 절대로 아니요 '''국가 의식에 국민의 의무로서 참례(參禮)함'''이 당연한 줄로 각오(覺悟)하고 시인(是認)한즉 양심이 평안하고 '''충군애국지심'''(忠君愛國之心)이 날이 감을 따라 두터워집니다. 사신우상(邪神偶像)은 금수 곤충 어별(魚瞥)의 형상으로 된 것인데 어찌 우리의 조상이 그 우상과 동류(同類)가 될 수 있으랴? 그런즉 신사참배하는 일을 우상숭배라고 한다면 이(此)는 불경죄(不敬罪)에 가깝다고 말하여 둡니다. > ---- > 《청년》 9, 10호, 1939년 2~3월호. 김승태,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반성〉 p.410 > 기독교의 설립자라고 칭할 만한 [[사도 바울]]은 자기가 [[로마 제국]]의 공민(公民)이 된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고 자랑하였습니다. 그와 같이 반도인들은 '''대[[일본 제국]]의 신민이 된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고 자랑할 것입니다.''' 그것이 반도인의 유일한 활로입니다. 반도인들은 이 기회에 죽은 과거를 청산하고 산 장래를 위하여 활동하여야 되겠습니다. 선각자가 된 기독교도들은 민중에게 이 활로를 지시할 책임이 있습니다. > ---- > 《청년》 9, 10호, 1939년 2~3월호. 김승태,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반성〉 p.432 ''여기에 일본 측 개신교에서도 당연히 거들고 나섰다.'' > 조선 전도부의 어용적 성격은 1919년 [[3.1 운동|3․1독립운동]]에 대한 반응에서도 유감없이 나타났다. 3․1독립운동을 목격한 와타세는 즉각적으로 '조선 소요 사건과 그 선후책'을 《新人》 4월 호에 기고해, 3․1운동에 참가한 조선 기독교인들은 구약의 정신이 농후하고 기독교의 사랑의 정신이 없는 [[유대교]]도에 불과하다고 비난했다. 즉 만일 기독교인들이 '''산상수훈의 정신을 안다면 그들은 [[3.1 운동|그런 식]]으로 반행해서는 안 될 것'''이며, '하나님을 아버지로 하는 형제로서 더 포용적으로 [[내선일체]]를 대성하는 정신'에 근거하여 행동했어야만 했다고 비판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건전한 신앙을 근거로 해 건전한 사상'을 배양함으로써 유다주의를 극복하고 '양 민족의 새로운 영적 일치'를 달성하기 위한 조합교회의 조선 전도의 의의를 더욱 강조하였다. > ---- > 《한국 기독교와 역사》 제5호(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6), 양현혜, 〈일본 기독교의 조선 전도〉 p.195~196 그러나 위의 문제들은 어디까지나 교단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가결했을지는 몰라도 '''개개인이 모두 신사참배를 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리고 당시 신사참배를 했던 목사들이나 교인들 중에서는 진심으로 후회하고 뉘우친 사람들도 많다. 특히 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수많은 유명 목사들이 당시 신사참배한 사실을 공석에서 밝히고 용서를 비는 것이 유행했다. [[김재준]]을 위시하여 [[성서비평학]]을 받아들인 장로회의 일부 세력들과 조합교회(組合敎會)[* '구마모토 밴드'라고도 불리며 미국 동부에서 유래한 회중주의 교회정치를 받아들인 것이 특징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을 통해 들어온 조합교회는 어용교단 노릇을 하면서 한국의 개신교를 분열시키는 역할을 했었다. 태평양 전쟁 직후 군부의 개신교단 강제 통폐합 정책에 따라 조합교회는 다른 교단들을 흡수하여 '일본기독교단'으로 바뀌었고, 패전 이후 지금까지도 일본의 대표적인 개신교 교단으로 존속중이다.]는 이 당시 친일에 적극적으로 앞장섰고, 조합교회는 해방 이후 완전히 퇴출되어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현대에도 진보 / 에큐메니컬 교단이 가장 까이는 큰 이유가 바로 신사참배를 가벼이 여겼다는 점이다.([[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1641|뉴스앤조이 기사]]) 참고로 신사참배를 최초로 한 학교는 조선신학교로써, 현재의 한신대학교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을 맺자면 개신교계에선 적지 않은 개신교 신자와 교회가 신사참배 굴복한 문제를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당시 역사적 사실을 발굴하고 있고, 신사참배를 거부한 순교자들을 기리나 그런 순교자들과 애국자들이 있다하여 타종교와 신사참배를 순응한 당시 식민지 치하의 동포들에게 우월감도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많은 변절과 교단적으로 하나님을 배도한 것의 큰 죄'''를 지은 것은 기독교인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교계 과거 반성을 위해 나온 자료들을 반기독교계에서 적극 이용하며 마치 친일종교로 몰아가는것은 씁쓸해한다. 기독교계를 제외하면 국내에서 신사참배에 거부한 것은 불교 교단의 결정과 달리[* 불교는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에 대한 분풀이랍시고 구한말부터 [[이동인]], 이회광처럼 일제에 적극적으로 친일 부역질을 일삼은 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렇다고 불교 신자들이 전적으로 친일 일변도로 경도되어 있었다거나(당장 [[한용운]]이나 [[백용성]], [[만공]]만 봐도) 불교계가 그걸 등에 업고 호사를 누리며 타종교를 탄압한 것은 아니었다.] 타종교와[* 전통 민족신앙이라해도 대종교와 분리된 국내 단군교의 경우 적극적 친일이었다.] 일반 대중들은 당사자들의 투옥은 물론 가족들의 배급, 진학, 직장생활 등을 포기하는 불이익 때문에 그런 시도조차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사참배 문제는 두말할 것 없이 구한말 전래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대한민국 개신교계의 최대의 사건이라고 라고 할 수 있다. [[주기철]], 이기동, 한상동, 이원영, [[손양원]]등 일부 목사만 거부했고 나머지는 적극적 친일에 나선 과거를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주사변]] 이후부터 전체주의 교육을 강화하며 개신교계 사학들과 갈등을 빚었던 일본 정부는 위에 언급한 대로 상당히 적극적으로 신사참배를 유도했으며, 조선신학교나 [[숭실학당]]처럼 신사참배를 따를 수 없는 학교들은 일찌감치 자진 폐교 수순을 밟고 떨어져 나갔다. 결과적으로 친일적 행태를 띄는 교단과 목사들이 살아남아 한국 기독교계의 주요 권력층이 되자 눈치를 보고 있던 중간층들도 자연스레 신사참배에 찬성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반대하는 무리들은 모진 고문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신사참배에 거부한 2천명의 신도들이 체포되고 200여 개의 교회가 강제 폐쇄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50여 명의 신자가 일제의 고문으로 순교했는데, 이들은 당시 한국 기독교 세력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처음엔 1932년 1월 [[전라남도]] [[광주광역시|광주]]에서 신사참배 사건이 일어났다. 남장로회에서 경영하던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가 만주사변에 대한 기원제에 참가하지 않거나 참가하더라도 신사참배를 하지 않아 도 당국의 엄중 문책을 받았다. [[수피아여학교]]는 배유지(Dr. Eugene Bell) 선교사가 설립한 학교인데 그가 설립했던 향사리 교회[* 현재 광주서현교회] 이 때문에 후일 폐쇄되었다가 해방 이후 복구된다.[[http://www.sh1908.org/|한눈에 보는 서현 100년사]] 그다음 해 9월에는 [[평양]] [[숭실학교]]를 비롯한 10여개의 개신교 학교가 [[평안남도]] 도지사의 통첩을 무시하고 ‘만주사변 1주년 기념 전몰자 위령제’에 참석하지 않아 해당 학교가 시말서를 쓰게 되었다. 1933년 9월 18일 [[함경남도]] [[원산]]에서도 [[캐나다]]장로회 소속 진성여자보통학교가 [[만주사변]] 2주년 기념일에 거행된 순난자(殉難者) 위령제에 참석을 거부하여 문제가 되었다. 이렇게 개신교계 학교에 신사참배가 문제가 된 것은 [[만주사변|대륙침략]]을 계기로 [[조선총독부]]가 정신교화 운동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운데 신사참배 문제가 크게 확대되는 분수령이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1935년 11월 14일 평양 기독교계 학교의 교장들이 [[평안남도]] 지사의 지시에 불복하고 평양신사에 참배하지 않은 사건이다. 식민지 관료로 대만총독부 문교국장을 역임한 바 있는 평남지사 야스타께(安武直夫)는 기독교계 학교가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것을 그대로 볼 수 없었다. 그는 먼저 기독교계 학교 교장들을 굴복시키려 했다. 이해 11월에 들어서서 그는 이 지역 공사립 초등학교장 및 중등학교장 회의를 잇달아 소집하여 회의가 끝나는 날 평양신사에 참배토록 했다. 그러나 기독교인 학교장들은 신사에 참배하지 않았다. 그러자 14일에 개최한 중등학교장 회의에서는 야스타께 지사가 회의 전에 평양신사에 참배한 후 회의를 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러자 [[숭실학교]]장 매큔(G.S.McCune, 尹山溫)과 [[숭의여학교]]장 대리 정익성(鄭益成), 순안 의명학교 교장 리(H.M.Lee, 李希滿)는 "기독교의 교리상 따를 수 없다."라고 거부했다. 그러자 평남도 당국과 총독부는 기독교계 학교에 대해 설득, 경고하면서 금후 교장 자신의 신사참배 의향 여부와 학생들의 신사참배 의향 여부를 서면으로 회답하도록 요구했다. 이런 요구의 배후에는 교장의 파면과 강제 폐교의 강경방침이 있었다. 그 결과 매큔에게는 1936년 1월 [[숭실학교]]장 및 [[숭실전문학교]]장직 인가가 취소되고, 스눅도 1월 22일 [[숭의여학교]]장 대리인가를 취소당했다. 이후 총독부는 2월 21일자로 학무국장이 각 도지사를 통해 기독교 각 교파 포교관리자 및 대표자에게 ‘신사와 종교에 관한 건’이라는 통첩을 보내, 신사의 봉사는 종교가 아니며 신사참배는 국민교육상 필요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서 막나가는 일제의 강압에 맞서 외국 선교회 계열의 사학에선 여러 논의와 대응이 나왔는데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는 1936년 11월 전주에서 개최된 남장로회 선교사 연례회의에서 신사참배를 강요한다면 교육사업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음을 결의했다. 그들은 선교본부에 연락, 해외선교부 총무 풀턴(C.D.Fulton)의 내한을 요청했다. 풀턴은 일본에서 출생한 2세 선교사로서 신도가 종교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1937년 2월에 내한하여, 신사참배를 시키기보다는 학교를 폐쇄할 것을 허락하는 13개항의 소위 ‘풀턴 성명’을 발표했다. 이를 계기로 이 해 9월에 남장로회 학교들의 폐교 신청이 잇달았는데, 광주 [[수피아여학교]]와 [[숭일학교]], 목포의 정명학교와 영흥학교가 1937년 9월 6일에, 전주의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 군산의 영명학교와 멜볼딘여학교가 각각 9월 8일에, 순천의 매산학교와 매산여학교는 9월 21일에 각각 폐교를 신청했다. 호주 장로회 선교부는 1936년 2월 7일 총무 맥라렌(Ch.I.McLaren, 馬羅連)의 주재 아래 회의를 열고, 산하의 기독교 학교가 신사참배를 할 수 없다고 결의했다. 그 뒤 선교본부는 교육 사업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학교를 계속 경영하기를 원했고 또 일본 당국과의 관계개선을 원하여 “신사참배는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는 [[일본 정부]]의 주장을 받아들이기까지 했다. 또 1938년 9월 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후, 그들은 그 이듬해 1월 특별위원회를 소집, 신사참배와는 관계를 끊되 학교를 유지하려는 모든 노력은 그래도 경주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절충적인 노력은 한계를 드러내고 그해 대부분의 선교부 소속 학교를 폐쇄시켰고 동래 일신여학교는 1940년에 폐교되었다. [[캐나다]] 선교부는 1930년대 초에는 학교의 문을 닫더라도 신사참배를 거부하겠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38년에 이르러, 신사에서의 행사는 애국적인 것이요 종교와 관련이 없는 것이라는 총독부 당국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그 의식들에 참가하고 학교를 계속 경영하기로 했다. 캐나다 선교부 산하의 기독교 학교는 신사참배 문제로 문을 닫아야 하는 일은 없었다. 1898년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한 캐나다 장로교회는 다른 세 교단보다는 신학적 입장이 자유로웠던데다 1925년 감리교회·회중교회와 연합하여 캐나다연합교회로 개편된 후 한국에 들어온 다른 세 장로교단과는 달리 신사참배 문제를 타협적으로 처리했다. 선교학교 문제의 타협적 처리는 감리회 선교부도 마찬가지다. 1938년 2월 총독부 경무국은 ‘기독교에 대한 지도대책’을 마련하고 기독교계 기관들에 대해 변질과 개편을 강요하는 한편 기독교 연합기관을 해산시키거나 국제기구와 연결된 기관들에게는 국제기구에서 탈퇴하도록 종용하며 일본 안에 있는 동일 계열의 기구와 통폐합해 나갔다. YMCA와 YWCA, 조선주일학교연합회, 감리회의 청년회인 엡웟회 등 그 대상들을 점차 확대시켜 갔다. 한편 1937년 6월부터 1938년 3월에 걸쳐 일제가 안창호 계열에 대한 탄압을 가하여 수양동우회 사건을 일으켜 180여 명의 지식인들을 검거했다. 이어서 강압적인 사회 분위기를 더욱 조성하기 위해 1938년에는 이승만계에 대해 흥업구락부 사건을 일으켜 관련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했다. 이는 조선의 기독교 지식인 세력을 외세로부터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기독교회 외곽에 대한 이같은 강압책으로 장로교회를 집중 공격하던 일제는 1938년에 들어 각 노회별로 신사참배를 유도, 강제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친일목사로 돌변한 이승길(李承吉), 김일선(金一善) 등을 내세워 개별적으로 신사참배에 찬성하도록 설득했다. 2월 9일 조선에서 가장 교세가 강한 평북노회가 일제에 굴복, 신사는 국가의식이라 하여 신사참배를 사실상 결의했다. 뒤이어 2-3월 중에 총회 산하 전국 23개 노회 중 17개 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게 되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1938년 9월 9일 [[평양]] 서문밖예배당에서 제 27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개최되었다. 총회 전에 [[일본제국 경찰]]은 [[주기철]], 이기선, 김선두등 신사참배 반대 지도자들을 사전 구금했을 뿐아니라 선교사들과 총대들에게는 사전에 신사참배 결의를 방해하지 않도록 엄중히 경고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 이튿날 속회, 신사참배를 불법적으로 가결시켰다. 당시 결의를 지켜봤던 김양선의 구술이다. >“다음날 오전 9시 30분 총회가 재개되었을 때에 교회당 내외에는 수백명의 사복경관으로 완전 포위되었고 강대 아래 전면에는 평남 경찰부장을 위시하여 고위 경관 수십명이 긴 검을 번쩍이면서 기라성같이 자리를 잡고 앉았고 총대들의 좌우에는 그 지방 경찰관 2명씩이 끼어 앉았고 실내 후면과 좌우에는 무술경관 100여명이 눈을 부라리고 서 있었다. 그 살벌한 분위기는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하였다. >주기철 목사, 이기선 목사, 김선두 목사등 신사참배를 적극 반대하는 유력한 교회 지도자들은 사전에 모두 구금되었고 저들의 압력에 어쩔 수 없이 끌려온 27노회(만주 4노회 포함) 대표 목사 88명, 장로 88명, 선교사 30명 합계 206명이 넋을 잃고 앉아 있을 때에 10시 50분 이미 조작된 각본대로 평양·평서·안주 3노회 연합대표 평양노회장 박응률 목사의 신사참배의 결의 및 성명서 발표의 긴급제안이 있었고 박임현 목사와 길인섭 목사의 동의와 재청이 있었다. 총회장 홍택기 목사는 전신을 떨면서 ‘이 안건이 가하면 예라고 대답하십시오’라고 물었다. 이때에 제안자와 동의·재청자의 10명 미만이 떨리는 목소리로 ‘예’라고 대답했고 그들 외의 전원은 침묵을 지켰다. 그 침묵은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표시하는 것으로밖에 보여지지 않았으므로 수백 경관들은 일제히 일어서서 일대 위협을 표시했다. >당황한 총회장은 ‘부’를 묻지 않고 그냥 만장일치의 가결을 선언하였다. 이때에 이런 사태가 있을 것을 예상한 선교회는 약속해 두었던대로 방위량 선교사를 선두로 2,3명의 선교사들이 회장의 불법선포에 항의하는 한편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주장하려고 했으나 경찰관의 강력한 제지로 발언이 막히자 선교사 30명 전원은 차례로 기립하여 ‘불법이오’‘항의합니다’라고 외쳤다. 봉천노회 소속 헌트(B.F.Hunt, 韓富善)선교사는 무술경관의 제지를 뿌리치고 불법에 대한 항의를 외치다가 그들에게 붙들려 옥외로 축출당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소란 속에 총회 서기는 성명서를 낭독하였고 평양 기독교 친목회 회원 심익현 목사는 총회원 신사참배 즉시 실행을 특청하였다. 동일 12시에 부회장 김길창 목사의 안내로 전국노회장 23명이 총회를 대표하여 평양신사에 참배함으로써 장로교회마저 그들의 불법 강요에 굴하고 말았다.” 장로회 총회에서 이처럼 결정이 내려졌으나 이 날 선교사들은 따로 모여 총회에 항의서를 제출하는 등 몇 차례에 걸쳐 항의했으나 [[일본제국 경찰]]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현재 연구로는 서울쪽에선 신사참배에 순응적이었고 오히려 평양지역이 신사참배에 더 반대했으며 선교사들조차 선교회, 교단, 신학교 내부에서도 서로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한때 카더라로 알려진 [[박형룡]] 신사참배 용인설은 현재 연구론 조선 신학교 폐교전 박형룡등이 만주로 [[망명]]한 것으로 나와 사실무근으로 밝혀졌다. 감리교회도 신사참배에 순응하게 되었다. 미 감리회 선교부가, 이 참배는 애국적인 것이요,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정부의 행사라는 [[일본 정부]]의 선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자 거의 때를 같이하여 한국 감리회 또한 신사참배를 수용하게 되었다. 1936년 [[양주삼]] 총리사는 4월 10일자 「감리회보」에‘신사문제에 대한 통첩’을 게재하여 감리교회가 신사참배를 문제삼지 않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 뒤 1938년 9월 3일에도 양주삼 총리사는 통고문을 내어 교단 안의 여론을 잠재우는 데에 부심했다. > "신사참배는 국민이 당연히 통행할 국가 의식이요, 종교가 아니라고 한 것을 인식하셨을 줄 압니다. 그런고로 어떤 종교를 신봉하든지 신사참배가 교리에 위반이나 신앙에 구애됨이 없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감리회 지도부의 이같은 행태가 교계 전체의 공감을 얻은 것은 아니다.''' 감리교인들 가운데서도 교단의 정책과는 달리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고난을 겪은 이들이 없지 않다. 이 밖의 여러 교단들도 제대로 항거하지 못하고 순응하는가 하면 교단자체가 해산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교단 지도부의 이같은 훼절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신사참배 정책에 불응하면서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이들이 나왔던 것이다. [[침례회]]는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1944년 교단이 강제해산을 당한다. [[성결교회]]는 신사참배 문제로 결국 교단을 자진해산했다. 그런데 교단 인사 중에 [[황국신민선서]]와 [[대동아전쟁]]의 승전을 기원하는 기도를 하고 [[창씨개명]]을 한 인물들이 다수 있긴 하다. 이후 전개로는 이런 상황에서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나타나게 된다. 신사참배가 ‘가결’되고 난 뒤에 장로교단 안에서는 개인적인 혹은 합법적인 차원에서 이에 저항하면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막아보려는 시도들이 없지 않았다. 평양신학교 학생 장홍련이 평양노회장 김일선의 기념식수를 벌목한 사건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신학생들이 신사불참배 운동을 확산시키려다가 결국 학생 다수와 박형룡, 김인준 교수가 검속된 사건이 있다. 김선두(金善斗) 목사와 박관준(朴寬俊) 장로는 조선총독부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지 못하도록 일본 정계의 그리스도인들을 움직이려고 노력했다. 김선두 목사는 김두영, 윤필성, 박형룡 등을 대동, 1938년 8월 24일 동경에 도착, 박영출의 안내로 일본 정우회 부회장 외무부장 중의원 의원 마츠야마(松山常次郞) [[장로]]와 군부의 원로 히비키(日疋信亮) 장군(장로) 등을 방문, 한국 교회의 수난상을 진정했다. 그 결과 이를 들은 이들이 동 9월에 조선에 와서 [[미나미 지로]](南次郞) 총독을 만나게 되었다. 박관준 장로는 1939년 1월 안이숙, 박영창을 대동하고 도일하여, 일본 제국의회 회의장에 들어가 진정서를 투척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일본제국 경찰]]의 집요한 방해와 일제 신사참배 강요 정책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이들 개인적인 차원의 합법적 저항과는 달리 반대투쟁을 조직화하여 ‘거부항쟁’의 단계로 이끈 이들도 있었다. 개인적이든 조직적이든, 저항자들 중에는 수감, 투옥되는 것은 물론이고 [[순교]]에까지 이른 이도 있었다. 신사참배 거부를 권유하고 거부자들의 결속을 강화하는 중심 인물로 국내에서는 [[평안남도]]의 [[주기철]](朱基徹), [[평안북도]]의 이기선(李基宣), [[경상남도]]의 한상동(韓尙東), [[전라남도]]의 [[손양원]](孫良源) 등이 있었고, [[만주]]지역에서는 박의흠(朴義欽)·김윤섭(金允燮)·헌트(B.F.Hunt, 韓富善) 등이 있었다. 신사참배 거부항쟁자들에 대해서 당국은 개별적으로 위협, 구금했던 때도 있었다. 1938년 장로회 총회를 앞두고 [[주기철]]·이기선·김선두 목사 등을 예비구금 형태로 검속한 것도 그 일례다. 당국은 이렇게 위협과 고문을 가해도 굴하지 않는 주동자들을 사회로부터 격리시켜 영향력이 확산되지 않도록 했다. 이런 경우, 예비검속 형태로 구금하여 정식 재판에 넘기지 않고 고문하고 장기구금했다. 때문에 장기적인 구금으로 순교한 이들도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사건이 평양지방법원에서 취급했던 이른바 ‘예수교도의 신사불참배 교회 재건운동사건’이다. 이 사건의 관련자들은 “모두가 조선예수교 장로파 교역자 혹은 독실한 신자들로서 1939년 8월 이래 성서의 이른 바 [[종말론|말세론]]에 기초하여 머지 않아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지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된다고 하여 궁극적으로 [[일본 제국|우리]] 국체를 변혁하여 [[천년왕국]]을 건설할 것을 목적으로 ‘신사불참배 재건총회 조직 준비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전국적으로 이를 확대 강화하기 위해 활동하고 또한 여러 가지 불온언사를 함부로 한다”고 했다. 일제는 이를 근거로 1940년 9월 20일 새벽을 기하여 전국적으로 신사참배 거부항쟁자 193명을 검거했다. 평양지방 검사국은 1941년 5월 15일에 이기선 목사 등 68명을 송치하고 그 1년 후인 1942년 5월 12일에 그 중 35명을 기소, 예심을 청구하고, 8명은 기소 유예, 나머지 25명은 [[불기소처분]]했다. 예심 심리는 3년간이나 계속되어 그 동안 최봉석 목사, 주기철 목사, 최상림 목사, 박관준 장로 등 4명이 순교하여 평양지법 예심종결 결정에서 제외되었고, 이기선 목사 등 21명에 대해서는 1945년 5월 18일에야 예심종결 결정이 났다. 신사참배 거부를 위해 [[만주]]로 망명했음에도 일제는 동북삼성(만주)에서도 신사참배가 강요했고, 신사참배 반대투쟁이 있었다. 1936년 10월부터 만주 [[하얼빈]]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하던 헌트(韓富善)은 1939년 봉천노회에서 제명된 후 계속 한국인들을 격려하며 항쟁하다가 1941년 10월 하르빈 경찰서에 수감되었고 1942년 6월 강제 추방되었다. 한편 하얼빈 경찰은 헌트를 중심으로 한 이들의 활동에 주목하다가 1940년 3월 19일 약 70여명을 체포, 1942년 2월 3일 재판에 넘겼고, 김윤섭·박의흠·안영애·김신복 등은 수감 중 혹은 풀려난 지 얼마 안되어 순교했다. 국내에서도 본격화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로 많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투옥되었다. 그들은 치안유지법, 보안법 혹은 불경죄를 적용하여 중형 처벌했다. 주기철을 비롯하여 이영한(李榮漢, 감리), 최태현(崔泰鉉, 안식), 전치규(全穉珪, 침례), 박봉진(朴鳳鎭, 성결), 손갑전(?) 등은 옥사했고, 남은 이들은 [[광복|해방]]과 더불어 석방되었다. 오랜 동안 옥에서 시달린 결과 출옥 후에 곧 목숨을 거둔 이도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것이 얼마나 진실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제가 해방 전후에 조선 내의 기독교인들을 살해할 목적으로 명단을 작성하는 단계였는데,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사족으로 일본 측 개신교라고 해서 모두 신사참배에 긍정적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한국과 정반대로 세력이 미약한지라 간과하기 쉬운 부분이기도 한데 도키와 다카오키(常葉隆興)[* 박형룡처럼 존 메이첸의 제자이다.]를 필두로 한 몇몇 개혁교회 목회자들은 신사참배를 "우상숭배요 죽음에 이르는 죄악"(偶像礼拝であり、神に対して死に値する罪であった)으로 규정하고 반성한 바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