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개신교/대한민국 (문단 편집) ==== 정부 수립 전후 ==== 신사참배 거부 건으로 투옥되었다가 해방 직후 출옥하게 된 이른바 '출옥 성도' 계열 인물들이 교계 정화를 부르짖으며 기성 교단에 회개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로 인해 그 동안 은폐되어 왔던 [[트라우마]]가 해방과 거의 동시에 터질 위기가 도래하게 되었다. 특히 고신 교단이라는 이름 아래 모인 신사참배 반대 순수신앙파 장로교 교인과 목사들이 대표적이었는데, 신사참배 문제에 자유롭지 못한 교단들은 잘못을 인정하기 전까지 적극적으로 이들을 철저하게 탄압하고 신학교 교육 과정에서도 조직적으로 은폐 및 왜곡[* 아예 '출옥 성도들의 광적인 활동과 테러 행위'에 대해 날조된 교육을 하는 곳들도 있을 정도이며, [[엔하위키]] 시절부터 본 문서에 '광적인 활동'에 대한 서술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왔다.]하면서 스스로의 치부를 덮는 데 급급했다. 이 때문에 한국 개신교 역사에서 스스로 평가하는 것조차 '해방과 동시에 본격적인 타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논한다. 이와 관련된 자세한 이야기는 [[개독교]] 쪽을 참고. 해방 이후에 전래, 설립되었기에 신사참배 문제에 대해서 자유로워서 신사참배에 대해서 가르치는 교단들의 신학대학을 제외한다면, [[고신대학교]]를 제외한 신사참배 문제에 대해서 관련된 모든 교단의 신학교의 교회역사학에서 고신 교단에 대한 교육을 전혀 하지 않으며, 일선 교회에서도 고신 교단이 아닐 경우 관련 정보를 신도들에게 전혀 가르쳐 주지 않는 것으로 악명높다. 이러한 정보 은폐가 어찌나 심각한지 아예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287846|자체적으로 자료를 정리하고 홍보하는 역사편찬위원회]]를 고신 쪽에서 따로 꾸려야 했을 정도다. 다만 고신 교단이 비 고신 교단에게 신사참배에 대한 문제를 너무 걸고 넘어져서 역풍을 맞는 일도 종종 있었다. 해방 이후에 설립된 교단들은 신사참배 관련 자료가 없어 연구가 미미한 편인데, 이들에게도 책임을 무리하게 적용시켜서 반발을 샀다.[* 이는 기독교 자체의 성향도 있는데 회개라는 교리가 있는 기독교 특성상 잘못을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면 대체적으로 용서해 주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배교행위도 마찬가지이며 가톨릭의 경우 위기 모면을 위한 배교가 아닌 순교를 택할경우 기적이라고 판단한다. 이런 성향 때문에 신사참배결의한 교단과 교역자들의 문제도 잘못을 인정하고 공개사죄를 하면 기존의 직위를 유지시켜주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러나 신사참배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못하고 유야무야 된 것은 [[북한]]의 [[김일성]] 정권의 횡포 때문에 관심이 그 쪽으로 쏠려셔였다.[* 유야무야된 이유중 다른 하나는 일제가 강제로 통합한 통합 개신교단을 유지해야하나 아니면 다시 각자의 길로 가야하는지 가지고 논란이 일었기 때문이다. 한국고유의 통합교단은 개신교 선교사들로 시작된 오랜 꿈이었지만 그것이 일제에 의해 강제적으로 이뤄지고 일제가 패망하자 강제로 통합한 힘이 사라지면서 파열음이 생긴것이다.] '''해방이 되고 [[북한]]정권이 들어서면서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가 탄압을 받자, 믿음의 자유를 찾아서 [[평양]]에서 활동하였던 종교 관련 인사들이 대거 월남한 역사가 있다.''' 원래 개신교의 지역적 기반은 38선 이북 지역이었는데[* 평양은 가리켜 "동양의 예루살렘"으로 불릴 정도였다.], 소련군 주둔과 공산정권 수립으로 오히려 일제보다 핍박이 훨씬 심해지자 참다못한 개신교인들이 대거 월남했다. 개신교의 최대 신학교인 [[총신대학교]]와 [[장신대학교]]는 각각 전신이 평양장로회신학교, [[평양신학교]]였다. [[숭실대학교]]의 전신인 숭실학교도 원래 평양에 있었다.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정도로 개신교가 크게 부흥했던 지역들 중 하나였지만 [[6.25 전쟁 학살(인민군과 좌익)|북한의 우익 대학살]]을 거치면서 지금은 [[주체사상]]의 성지로 전락해 버렸다. 6.25 전쟁을 거치면서 북한 정부가 개신교도들을 비롯한 모든 기독교도들에게 큰 핍박을 가했다. 당시에는 북한에서의 우익과 개신교도들의 교집합이 많기도 하였다. 그렇기에 북한이 [[http://m.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0310100056|6.25전쟁을 거치면서]] [[http://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830|개신교도들에게]] 크게 대학살을 진행하였다. 현재도 [[https://www.rfa.org/korean/in_focus/human_rights_defector/nk_christian-09162010171526.html|개신교도들을]] [[적대계층]]으로 분류하고 기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무조건 [[정치범수용소/북한|정치범수용소]]로 끌고 가는 등 개신교에 대한 매우 강도 높은 핍박을 진행하며, 이 때문에 [[http://m.kukminusa.com/news/view.php?gisa_id=2017053105411756|외국의 개신교인들이 이를 문제 삼아서 진상조사에 나설 정도이다.]] 그렇기에 한국 개신교들의 북한에 대한 적대감은 [[홀로코스트|유대인들이 나치에 대해 적대감을 보이는 정도]]와 비슷하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에게 이 시기의 일을 물어보면 정치성향과 관계없이 크게 치를 떨 정도로 6.25 전란기는 한국 개신교의 암흑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기독교인들은 북한 정부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다. '''북한의 핍박이 신사참배를 요구한 일제의 핍박보다 더 지독했다'''라는 평가를 내릴 정도. 물론 저 말 그대로 신사참배를 완강하게 거부한 성직자들만 끌고 갔던 일제와 달리 북한은 예배를 하는 모습만 보여도 도륙을 했으니 증오심이 그만큼 클 만도 하다. 한국 기독교인들 각자의 정치성향의 차이 때문에 [[판문점 선언]]에 대한 견해차가 있지만 그래도 북한의 핍박에 대한 증오심과 남북 통일 이후 북한 수뇌부 처벌에 대한 요구는 공통적이다. 차후 북한 정부 수뇌부가 이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하지 않는 이상 이러한 적대감은 유지될 확률이 압도적이다. [[파일:external/www.newsnjoy.or.kr/203838_55129_50.jpg]] 그렇기에 전쟁 직후의 개신교인들의 북한에 대한 분노는 엄청났다. 전쟁 직후의 한국의 보수 정치인들은 개신교인들에게 반공을 내세워서 자신의 지지를 호소할 정도였다. '''1956년 정부통령 선거 당시 [[이승만]] [[장로]]와 [[이기붕]] [[권사]]를 지지해 달라고 호소하는 포스터'''[* [[장로회]]가 상대적으로 번성한 대한민국에서 권사는 여자만 받는 직분이라는 인식이 박혀 있는 상태라 이기붕 '권사'라는 직함이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감리회]]는 남녀 모두 권사가 될 수 있다.]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현재도 한국 보수정치에서 [[개신교]]의 지분이 클 정도로 개신교인들이 북한에게 입은 상처는 매우 컸다. 국내 보수 진영이 북한 개신교인을 비롯한 북한 [[인권]] 문제에 꽤나 적극적인 것은 개신교인들이 보수 정치에 주는 영향이 꽤나 크기 때문이다. [[이승만]], [[김구]], [[김규식]]과 같은 [[대한민국]]의 건국 지도자들은 개신교 정신을 기반으로 개신교 건국론을 주장했고, 이들은 상해임시정부, [[YMCA]], 흥사단에 참여했던 신실한 개신교인들이었다. > 반만년 길고 유구한 역사에 처음으로 민주주의 시대를 개막하고 국회를 열게 된 것은 사람의 힘과 사람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고 우리 민족을 사랑하사 대한민국을 탄생케 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 >대한민국 국회 속기록 제 1권 1쪽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가 열리던 날, 초대 국회의장 이승만은 위와 같이 연설함으로서 [[기독교입국론|대한민국이 기독교 정신으로 세워진 민주주의 공화국이라 연설]]하였다. 그렇게 한국에는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면서 민주주의, 국민주권주의, 삼균주의를 포함하여 개신교 정신에 입각한 보수적 가치를 내걸고 '''[[북한]] [[김일성]]을 겨냥한 [[반공]]과 [[내셔널리즘]][* 이승만 정부는 북한 인민들이 김일성 정권, 즉 공산주의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했고, 임기 기간동안 계속해서 북진 통일을 주장했다.]을 외치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민주당(1955년)|민주당]], 그 가운데 신파는 부통령 [[장면]]을 중심으로 [[가톨릭]] 신자였고 [[김대중]]의 대부이기도 하다. 다만 민주당 구파의 대표 인사인 [[윤보선]] 전 대통령은 장로회 신자였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은근히 [[불교]]를 탄압하였는데, 개신교 교회에서는 세금을 받지 않았던 것과 달리 사찰에는 세금을 따로 받고 [[승려]]들의 [[환속]]을 권장했다. 재미있는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승려들이 당시 이승만에게 아첨하며 "또 다른 [[부처님]]"이라는 망언을 해댔다.[* [[고려원]] "한국의 불교".][*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대한민국에서 개신교만 반공을 외친 것은 아니란 것이다. 실제로 공산주의 자체가 [[국가 무신론|종교 자체를 적대하는 경향이다 보니]] 굳이 개신교가 아니라도 (이승만 정권의 개신교 편향에 대한 불만과는 별개로) 종교인이라면 반공 성향은 매우 당연하게 여겨졌다.] 지금도 보수적 성향이 강한 [[한기총]]에선 이승만 대통령을 국가의 아버지라 추앙하며 [[조선일보]]나 [[뉴라이트(대한민국)|뉴라이트]]와 같이 동상을 만들자고 하는 이들도 꽤 적지 않다. 자세한 내용은 [[근본주의/기독교/개신교]], [[기독교입국론]], [[기독교 우파#개신교|기독교 우파의 개신교 문단]]을 참조하면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