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개화기 (문단 편집) === 생활 환경적 변화 === 모두 알다시피 개화기는 서구 문물이 조선으로 쏟아 들어오는 시기였다. 다음은 개화기에 유입된 서구 문명을 정리한 것이다. 개인이 소지가 가능한 개인간 유통되는 물건들은 황학동, 인사동 [[골동품]]상이나 코베이 경매 등에서도 구입이 가능하다. * [[노면전차|전차]]: 한국에서는 1899년 처음으로 청량리 ~ 서대문 간 운행을 시작하였으며, 부산 및 평양에도 그 후 개설되었다. * [[증기기관차]] * [[증기선]] * [[철도]] * [[자동차]] * [[자전거]] -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lhjkind01&logNo=90041374438&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m%2F|참고 글]] * [[인력거]] * [[전구]] : 1887년, [[경복궁]]에 최초로 설치되었다. * [[가로등]] : 1900년, 한성 전기 회사가 종로에 가로등 3개를 단 것이 그 시초. * [[성냥]] - 양비누와 함께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물건이다. 오죽하면 '개화'의 상징이라 불릴 정도. 그동안 쓰던 [[부싯돌]]을 싹 밀어내고 조선시대 사람들의 생활을 완전히 바꿔놨다. 과거엔 며느리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던게 부엌의 불씨를 꺼트리지 않는것이었을정도로 불씨 관리는 정말 중요했다. 힘들게 불을 키던걸 한번 착! 긁으면 켜지니 오죽 놀라겠는가. [[서재필]]의 회고담이나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기록을 보면 조선인들이 성냥 키는걸 보고 귀신의 재주라 놀랐다는걸 알 수 있다.[[http://m.blog.daum.net/jidam55/16144742?np_nil_b=-1|관련글]] * [[램프]] * [[전보]] * [[전신]] * [[전화]] * [[수도(시설)|수도]] * [[기계식 시계]] - [[회중시계]]도 이때 들어온다. 단 [[자명종]]은 1600년대에 들어왔으나 보편화된건 개화기 시절이다. * 서양 [[악기]] - 1900년 전후로 들어온 [[피아노]]를 비롯해서 많은 서양악기가 들어온다. * [[SP판]]과 [[축음기]], [[오르골]] 등 소리 저장매체 * [[우편]] * [[영화]] - 당시엔 주로 [[활동사진]]으로 불렸으며 최초로 들어온 시기는 1903년 이전으로 추정된다. * [[사진]] * 서양 [[건축]] : [[시멘트]]를 비롯해서 서양식 건물과 건축재료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 [[서양 요리]] : [[양주(술)|양주]]를 비롯해서 서구식 음식과 음식재료들이 들어온다. * [[중국 요리]] : 화교들을 통해 중국 음식이 들어온다. * [[일본 요리]] : 재한 일본인들과 상인들을 통해 일본 음식이 들어온다. * [[담배|양담배]] : [[라이터]]도 이 시기에 같이 들어온다. * [[중절모]] : 전통 모자인 [[갓(모자)|갓]]의 역할을 대체하게 된다. * [[양복]] - 의복문화가 서구식으로 크게 변하고 서양 [[모자]], [[장신구]], 옥양목들을 비롯한 [[옷감]]들도 들어왔다. * [[구두]] - 구두를 비롯해서 서양식 [[신발]], [[양말]]도 들어온다. * [[교복]] - 근대식 학제가 도입되며 교복 역시 도입되었다. 남성은 [[두루마기]]에 [[학생모]]를 썼고, 여성은 [[유관순 교복]]으로 유명한 흰 저고리와 검은 치마 교복을 입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가쿠란]]과 [[세일러복]]으로 대체되었다. * [[식기]] 및 생활용품 - [[포크]], [[나이프]]를 비롯해서 [[양동이]], [[양초]], [[수산화 나트륨|양잿물]], 양은그릇, 양재기 등등 (서)'양'자가 들어가는 물건들이 그때 들어온 것이다. * [[위생]]용품 - 서양식 [[비누]], [[치약]], [[칫솔]] 등등이 들어온다. * [[바리캉]], [[안전면도기]] - [[단발령]] 이후 [[이발사]] 직업과 함께 일상화 되었다. * [[은행]] * [[병원]] * [[커피]] * [[의약품]] * 근대식 [[신문]] 민중들을 계몽하기 위해 여러 신문들이 만들어졌다. 초기의 신문들은 순 한문이었지만, 나중에는 일반인들도 읽을 수 있게 국문으로도 출판되었으며, 몇몇 신문들은 영문판으로도 출판되었다. 이러한 신문들은 국민들을 계몽시키는데 큰 도움을 주었고, 특히 《[[독립신문]]》은 [[독립협회]]의 활동에 도움을 주고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는 항일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07년에 [[이완용]] 내각이 [[신문지법]]을 공포해 언론사를 탄압하면서 대부분의 신문사들이 폐간되고 만다. 서구식 신문은 국민들을 크게 계몽시켰으나 의 병활동을 부정적으로 보는 한계점 역시 가지고 있었다. 개화기 때 발행된 신문들은 다음과 같다. * 《[[한성순보]]》 : 1883년에 처음으로 발간된 우리 나라 최초의 신문, [[박문국]]에서 10일마다 출판. 순 한문으로만 쓰였다. 1884년에 [[갑신정변]]이 일어나면서 발행이 중단되었다. * 《[[한성주보]]》 : 7일마다 출판된 국한문 혼용 신문. * 《[[독립신문]]》 : 최초의 민간에서 출판한 신문이자 일간지. 해당 문서 참조. * 《[[황성신문]]》 : 해당 문서 참조. * 《[[제국신문]]》 : [[부녀자]]들을 타깃으로 한 신문으로 순수하게 한글로만 적혀져 있었다. * 《[[대한매일신보]]》 : 해당 문서 참조. * 스포츠의 전파 * [[테니스]] : [[거문도 사건]] 때 영국군이 테니스장을 지으면서 전파되었다. * [[야구]] : [[선교사]] [[필립 질레트]]가 1905년 [[황성 YMCA 야구단]]을 세우고 야구를 전파하였다. * [[축구]] : 1882년 인천항에 정박한 영국 군함의 승무원이 처음으로 축구를 선보였으며 1896년 황성 축구 구락부라는 최초의 선수단이 생겼다. * [[농구]] : 1907년 질레트가 소개했다. * [[당구]] : 1884년 들어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