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개화파 (문단 편집) == 2세대 개화파와 개항 이후 == 박규수의 집에는 젊은 인사들이 드나들면서 박규수의 개화 사상을 접하게 되는데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홍영식]], [[유길준]], [[서광범]] 등이었다. 이들을 제2세대 개화파로 칭하고 후에 소위 급진 개화파, '''[[개화당]]'''이라 부르는 인사들은 이때부터 태동하기 시작했다. 1세대 개화파의 큰 차이는 이들의 출신 배경이다. 의원이나 역관 등 중인 신분이었던 1세대와는 달리 이들은 대부분 정계 명문 집안의 자제들이었다. 가령 김옥균은 양아버지가 [[김좌근]]의 조카인 [[안동 김씨]] 일원, 박영효는 철종의 딸인 영혜 옹주와 결혼한 왕실 [[부마]]였다.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 등으로 조선이 강제적으로 개항을 하게 되면서 조선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고종은 일본에 수신사를 파견했는데 이 수신사들은 근대화된 일본의 발전된 문물을 접하게 되면서 조선의 개화와 근대화 필요성을 크게 절감하게 되었다. [[김윤식(조선)|김윤식]]을 주축으로 청나라에 영선사가 파견되어 근대 무기 기술들을 배워오도록 하는 등 조선은 본격적으로 개화 정책을 추진했다. 물론 이런 개화 정책에 반발하여 [[위정척사파]]들이 등장해 [[만인소]]를 올리는 등의 저항도 있었으나 개화 정책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