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거란 (문단 편집) === 기원과 형성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2013-11-16_14;55;57.jpg|width=100%]]}}} || || [[요나라]] 성립 이전 거란족의 영역을 대강 나타낸 것(Khitans)[* 구글에 거란이라고 치면 십중팔구가 요나라때 영역만 나와서 그 이전의 영역을 나타낸 지도는 찾기 힘든 편이다.][* Shiwei: 실위, Tatabi: 해(고막해), Mohe: 말갈, Yilou: 읍루] || 거란의 족원은 대체로 [[흉노]]와 [[동호]]설로 대비된다. 거란족사와 요사를 연구한 학자들은 대체로 거란이 동호계 선비족 [[우문부]]의 분파로써 우문부, [[고막해]]와 분리되었다고 인식한다. [[4세기]]경 거란은 모용선비족인 [[전연]]의 영향력 아래 있다가 전연이 중심지를 남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고막해의 영향력하에 있게 되었다. 388년 고막해가 탁발선비족인 [[북위]]에게 토벌당하자, 이후 독립하게 되었다. 고막해가 선비족에서 갈라져 나왔음을 생각해 족보를 따지면, 거란은 선비족의 별종이라 할 수 있다. >등국 중에 북위의 군대가 크게 깨뜨리자, 마침내 달아나 흩어져 고막해와 나뉘었다. 수십 년이 지나 점차 커져서, 부락이 화룡의 북쪽 수백 리에 있게 되었다. >---- > ─ 《위서》 <거란전>[* 登國中、國軍大破之、遂逃迸與庫莫奚分背。經數十年、稍滋蔓、有部落於和龍之北數百里。] 그 뒤 거란은 고8부(古八部) 시대에 나름 세력을 키웠으나 주변 한국, 중원, 막북의 강호들 사이에 끼어서 샌드위치 신세였다. [[7세기]]경 거란의 지배 세력 가운데 대하(大賀)씨가 당나라에 귀부하여 국성인 이씨를 하사받았다. 668년 고구려 멸망 뒤 거란에 대한 당나라의 지배권이 공고해지는 듯했으나, 696년에 [[이진충]]이 '무상가한'(無上可汗)을 칭하며 독립하자,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이진충이 죽고 후계자인 [[손만영]]이 집권한 시기, [[돌궐]] 제2제국의 정복군주인 [[묵철가한|카프간 카간]]의 도움을 받은 [[측천무후]]에 의해 멸망당했다.[* 다만 이때 이진충과 손만영이 이끄는 거란족들은 당나라의 17만 대군을 무려 두 번이나 격파하는 용맹함을 보여, 당나라 조정을 공포에 떨게 했다. 자세한 내용은 [[이진충]]과 [[손만영]] 항목을 참조 바람.] 이후 당과 돌궐의 동맹에 문제가 생기면서 거란은 돌궐의 영향력에 강하게 종속했다. 이후 [[발해]], [[당]], [[돌궐]] 사이에 샌드위치 신세가 되었고 [[안록산의 난]]이 터지면서 위구르([[회흘]]) 역시 이런 열강 구도에 끼어들었다. 이런 상황은 요련(遙輦)씨를 거쳐 야율아보기 등장 이전까지 계속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