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거북선 (문단 편집) === 개발 === 세간에는 [[이순신]]장군이, 직접 [[철갑선]]인[* 단, 조선 측에선 거북선을 철갑선이라 기록한 것이 없고, 대부분 왜구 측의 보고에서 찾을 수 있었다.[[https://youtu.be/oWNWPvXziEM|#]]]; '거북선을 개발'했고, 이에 '직접 탑승했을 거라는 통념'은 있으나, 사실 '조선 수군의 주력은 [[판옥선]]'이었고, 이순신도 거북선을 '처음 개발한 인물'은 아니었다?! 조선 수군은, '건국 직후부터 왜구의 침입에 대항'하여 '투자와 신형함 개발을 해' 왔지만, '조선에서 기존 규정에 없는 새로운 군함을 만든다는 것'은 '지휘관의 결단을 요구하는 일'이었으며, 그 '결단을 이순신 장군이 내렸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거북선'은 '[[고려시대]]에 개발되었던 [[군함]] [[과선]](戈船, 배에 창칼을 박아 적의 침입을 막음)'과 '[[여말선초]]의 [[검선]](劍船)'을 '참고한 듯'하다. 그 후, '묻혀 있던 것을 새로운 형태로 부활시킨 것'으로, [[태종(조선)실록|태종]]에도 '거북선에 대한 언급이 두 차례' 있으나, [[임진왜란]] 당시의 것과는 '이름은 같지만 세부 구조도 같을지에 대해서는 설계가 전해지지 않아 알 길'이 없다.[*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 기록은 실록을 제외하면 대부분 전해지지 않음.]; >임금이 임진도(臨津渡)를 지나다가 '''거북선[龜船]과 왜선(倭船)이 서로 싸우는 상황'''을 구경하였다. >---- > - [[http://sillok.history.go.kr/id/kca_11302005_001|통제원 남교에서 머무르다. 임진도를 지나다가 거북선과 왜선이 싸우는 것을 구경하다]] (태종실록 25권, 태종 13년([[1413년]]) [[2월 5일]] 갑인 1번째 기사) >여섯째는, '''거북선[龜船]의 법은 많은 적과 충돌하여도 적이 능히 해하지 못하니 가위 결승(決勝)의 좋은 계책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견고하고 교묘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戰勝)의 도구를 갖추게' 하소서!" >---- > - [[http://sillok.history.go.kr/id/kca_11507016_002|좌대언 탁신이 병비에 대해 올린 사의 조목]] (태종실록 30권, 태종 15년([[1415년]]) [[7월 16일]] 신해 2번째기사) [[태종(조선)|태종]]실록 30권(태종 15년) 좌대언 탁신이 올린 상소에 "거북선(龜船)의 법은 많은 적과 충돌하여도 적이 능히 해하지 못하니 가위 결승(決勝)의 좋은 계책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견고하고 교묘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戰勝)의 도구를 갖추게 하소서."라는 구절이 있어 적을 방어해내기 위한 방호 장비는 갖춘 것 같다. 일설에 [[나대용]]이 거북선의 제작자라지만, '공식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고, 야사에만' 나온다. '워낙 유명하다보니 누군가가 제작에 관여했다는 야사'는 매우 많은 편이다. [[배한성의 고전열전]]에선 [[나대용]] 설을 채택했는지? 이 사람이 어느날, 그의 '동생이 이순신 앞에 설계도를 가져와 설명한다.'고 하며, 또다른 야사에는 조선 '중기의 유학자/도인[[송구봉]]'이 '임란을 예견'하고 '설계도를 만들어두었다가 주었다는 설'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