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건륭제 (문단 편집) ==== [[만주족]] 정체성 보존 사업 ==== [[만주족]]의 입장에서 보자면 만주족의 [[중국화|한화(漢化)]]를 걱정한 황제이기도 하다. 강희제 이후, 궁궐 내에도 [[중국어]]가 스며들게 되자 건륭제는 이 때문에 만주 귀족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우려하였다. 그래서 어느 날 건륭제는 너무 많은 중국어가 만주어 상주문에 스며들었다고 불평한 후, 대학사 나친을 우두머리로 새로운 만주어 단어를 만들 테스크 포스팀을 구성했다. 이들의 활약 덕택에 중국어에서 파생된 단어들이 만주어에서 대거 사라졌는데, 대신 1,700개가 넘는 새로운 만주어 단어가 생겼다고 한다. 이와 함께 만주어로 각종 중국 고전들을 번역하는 사업도 진행하였다. 하지만 이미 만주어는 강희제 초기부터 쇠퇴하고 있었다. 지배계급이 된 만주족들은 열심히 한학을 공부하여, 번역판 대신 한문을 직접 읽고 만주어 대신 중국어를 말하게 되었다. 건륭 연간 중후반기인 1775년에 만주족의 발원지라고 할 수 있는 [[심양시|심양]] 출신인 만주족 관리 과이민(果爾敏)이 조정에 출사했는데, 봉금령 때문에 한족이 거의 없었던 그 곳에서 자란 그도 건륭제의 만주어를 알아들을 수 없어서, 건륭제는 할 수 없이 한어로 영을 내려야 할 형편이었다.[* 다만 이 일화를 실제로 만주에서 만주어가 쇠퇴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만주어 중흥을 꾀하던 건륭제가 구사하던 북경식 만주어가 근고한어 관화와 섞여 원판에 비해 많이 변형된 결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목은 [[이색]]과 [[주원장]]의 일화에서 알 수 있듯 예나 지금이나 중국어 방언은 서울말과 영호남 사투리의 차이 정도를 넘어 아예 다른 언어로 여겨지는 것을 생각하면 온 대륙을 장악하고 각지의 팔기주방에 뿌리내린 기인들의 만주어도 입관 후 두갑자나 지난 건륭 시절에는 서로 잘 통했을리 없다. 물론 신하와 황제의 만주어 중 어느 쪽이 원판에 더 가까웠을지는 불분명하나(영미권의 지역별 발음 차이나 [[미주 한인어]]의 예에서 알 수 있듯 고향을 떠나 이주한 사람들의 모어보다 이주자들이 떠나고 남은 고향에서의 토착어가 더 큰 변화를 겪고 이주자들이 토착어의 옛 모습을 더 잘 보존하는 예가 꽤 있다), 건륭제에게는 그런 언어학적 지식이 있었을리 없으므로 다짜고짜 만주어가 쇠퇴하고 만인들이 근본을 잊어가고 있다고만 단순하게 인식했을 것이다.] 만주족의 기원을 연구해 집대성한 약 20권의 《[[흠정만주원류고]]》라는 방대한 연구서를 펴냈다. (흠정이란 말은 황제의 저서라는 뜻이다) 이 책의 편집진에서는 한족을 배제하고 만주족 석학들을 총 동원했다. 이는 아무래도 [[한족]]에 비해 역사적 기원이 불분명한 만주족의 기원을 밝혀 민족적 자긍심을 세우려고 한 것이다. 의외로 이책은 만주족의 기원에 부여, 백제, 신라등도 포함시켰다. (정작 만주족의 전신인 말갈을 복속하고 있었던 고구려는 빠졌다. 자세한 이유는 흠정만주원류고 항목 참조바람) 이런 시도로 만주족이 한족에 뒤지지 않는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만주족의 자긍심을 세웠다. 하지만 이 책은 이렇게 한민족의 국가들을 자신의 민족 기원에 포함시켰기 때문에, 현재 [[환빠]]들의 떡밥이 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