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건륭제 (문단 편집) === [[외교]]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y3.ifengimg.com/213d5e6a76eb4f9.jpg|width=100%]]}}} || || '''{{{#FFD700 시사만화가 제임스 길레이 (James Gillary)가 매카트니 사절단의 중국 방문을 풍자한 카툰[* 길레이는 매카트니와 동행하지 않고, 매카트니가 중국으로 떠난 이후 영국에서 이 카툰을 그렸다. 그래서 청나라 조정의 묘사는 고증과는 거의 맞지 않는다. 카툰에 묘사된 청나라 황제나 관리들의 위로 올라간 눈과 비정상적인 체형, 거기다가 사신 앞에서 아편을 피워대는 황제의 모습에서 영국인들이 동양에 대한 편견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 건륭제의 재위기는 당시 [[조선]]의 [[영조]] ^^(재위: 1724년 ~ 1776년)^^와 [[정조(조선)|정조]] ^^(재위: 1776년 ~ 1800년)^^의 시기와 거의 일치하며 청의 전성기를 이끈 군주라서 그런지 청을 배경으로 한 중국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한다. 조공무역에만 익숙한 중국은 명나라 초기까지 외국과의 무역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명나라 중반에 희망봉을 돌아온 [[포르투갈]]에 [[마카오]](아오먼)을 개방한 후, 해외무역이 짭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중국제 비단, 도자기, 차 및 각종 수공예품은 서양에서 매우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중국은 막대한 무역흑자를 보았고, 이는 막장이 되었던 명나라의 재정을 지탱해주는 것이었다.[* 심지어 황제가 일을 안해서 나라가 개판 5분전이 되었던 만력제 시절에도 대외무역은 계속되었다.] 청나라는 명나라 제도를 고스란히 계승했고, 서양과의 무역이 큰 이익을 본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방 문화나 기독교가 중국에 유입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광저우나 일부 남부 해안지방에서만 무역을 제한적으로 허가했다.[* 강희제 시절까지는 제사를 금지하지 않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의 입국 및 포교 활동을 허용할 정도로 서양과의 무역에 관심을 기울였으나 옹정제 시절부터는 선교사들의 출입을 철저히 막고 해안도 죄다 봉쇄해버리는 등 보호무역으로 돌아서게 된다.] 조정의 허가를 받은 중국인 상인들을 공행(公行)이라고 불렀는데, 이 공행들만이 서양의 배에 올라가 거래할 수 있었고, 서양 선박의 선원의 상륙은 금지되었으며, 오직 상품과 보급품의 선적만이 가능했다. 18세기에는 영국과 영국 [[동인도회사]]가 경쟁국이던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를 모두 제치고 아시아로 가는 항로를 지배하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건륭제 말년에 통상확대를 요청하는 사신을 청나라 조정에 파견했다. 인도 마드라스 총독을 지냈던 외교관 출신인 조지 매카트니(George Macartney)[* [[비틀즈]] 소속으로 유명한 [[폴 매카트니]]와 성은 같지만 혈통으로는 상관 없는 인물이다. 매카트니라는 성씨 자체는 아일랜드계 성씨다. [[본격 한중일 세계사 만화/실존인물]] 문서를 보면 폴 매카트니와 엮는 드립이 나온다.]는 이 사절단의 대표를 맡았다. 이 사절단은 여러척의 배로 구성된 함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1792년 9월 영국 포츠머스에서 출발한 후 계절풍 시즌을 기다리며 일단 남미의 [[리우데자네이루]]로 갔고, 그곳에서 보급한 후 희망봉을 돌아 다음해 6월에야 광저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들은 황제를 알현하고 싶다고 청나라 관리에 밝혓으나, 외국인의 상륙을 금지하는 청나라측과 옥신각신했는데, 매카트니는 황제에게 진상할 선물은 직접 들고가야 한다고 우겨서[* 중국은 [[조공]] 사절로 파악했다.], 결국 허가를 받아 [[황해]]를 거쳐 [[톈진]]에 도착, 다시 [[대운하]]를 타고 1793년 8월에야 베이징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건륭제는 당시 베이징을 떠나 [[피서산장]](여름 궁전)이 있는 [[청더시|숭덕]]에 주재하고 있었는데, 결국 영국 사절단도 숭덕이 있는 만리장성 근처까지 이동해야 했고, 결국 영국을 떠난지 1년만인 9월 14일에야 건륭제를 알현할 수 있었다. 이때 청나라 신료들은 매카트니에게 청나라식 [[삼배구고두]]례를 갖출 것을 요구했으나 매카트니는 거부[* 3번 절하고 절할 때마다 3번씩 총 9번 머리를 찧는 의식으로, [[병자호란]]에서 패배하고 [[삼전도의 굴욕]] 때 [[인조]]가 시행한 바로 그 의식이다.]는 했는데 동양권의 조공 문화에 익숙치 않은 서양인에게 행하라고 했으니 온전히 받아들일 리가 만무했던 것.[* 매카트니는 이때 "내가 영국 국왕 폐하의 신하지, 귀국 황제의 신하인 줄 아나?" 라고 거부했다.] 건륭제의 뒤편에 영국 왕 조지 3세의 초상화를 걸어놓는 타협안을 제시하기도 했으나, 결국 매카트니는 한쪽 무릎만 꿇었다고 한다.[* 사실 서양에서는 이런 방식이 최고의 경의를 표하는 것이었다.] 조공국의 방문으로 여긴 건륭제와 대등한 관계의 접촉으로 여긴 영국의 입장 차이가 근본적인 원인이었기 때문에 양보하기 어려운 순서이기도 했다. 여하튼 건륭제가 관대하게 매카트니의 주장을 받아줘서 매카트니가 한쪽 무릎만 꿇는 것으로 예를 표할 수 있었다. 다만 다른 기록으론 건륭제의 단호한 요구대로 결국 절을 하고 말았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 매카트니 사절단이 가져온 [[조지 3세]] 친서에는 청의 공행 무역을 폐지하고 자유 무역 허가, 교역량 증대, 대사관 설치, 대사의 상주를 허용, 덤으로 일부 영토를 할양하라고 요구했다. 즉, 중국 해안의 작은 섬을 할양해서 영국인들이 사용할 수 있게 해줬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영국이 요구한 자유 무역은 그렇다 쳐도 영토 할양 상당히 무리한 요구였다. 현재도 그렇지만 이런 요구는 전쟁까지 부를 수 있는 무례한 요구임에 틀림없고, 상대가 천자국을 자처하던 청나라였으니 더욱 더 받아들여질리 만무했다. 결국 이 사절단이 실패한 원인은 일부에서 말하는대로 매카트니의 [[삼배구고두]]가 거부가 아니라, 영국이 요구가 워낙 무리한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매카트니와 영국 사절단은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다. 그래도 건륭제는 나름 자세히 이유를 설명한 거절 답서[* 이 거절답서는 "청나라는 지대물박(地大物博)이라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걸 다 가지고 있으으니 외국과의 교역이 필요없다."의 요지로 서술되었다. 형식은 황제가 조공국에 보내는 국서형식이었다고 한다. 즉 "지구 반대편까지 미치는 나의 은덕에 감사함을 느끼고 예의를 갖추어라."는 구절은 잊지 않고 넣었다.]와 함께 [[조지 3세]]의 선물에 대한 답례품을 챙겨 줘서 매카트니 일행을 보냈다.[* 당시 영국이 대중국 외교 노하우가 떨어진 원인도 있다고 봐야 한다. 포르투갈의 경우 명나라 시대부터 마카오를 [[실효 지배]]를 하고 있었다. 법적 지배는 [[아편전쟁]] 이후지만 이미 몇백 년 동안 실질적 자국 영토로 관리하고 있었으며 이는 포르투갈이 오랫동안 중국과 교류를 하면서 어떻게 하면 중국 정부의 비위를 안 상하게 할 수 있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네덜란드도 사절단과 그들의 수장 이삭 티치가 건륭제의 6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방문했을 때 영국 사절단이 거부하던 삼배구고두례를 하자 건륭제가 기뻐하며 이삭 티치와 네덜란드 사절단을 특별 대우하면서 선물도 많이 챙겨 주었다. 하지만 역시 통상확대는 거부했다. 추가적으로 러시아 역시 [[청나라]]와 [[네르친스크 조약]]과 [[캬흐타 조약]]을 맺어 청과 교류 중이었으며 당시 [[베이징]]에는 러시아 외교 공관(근대적 의미의 외교 공관은 아니나, 러시아 외교관들이 상주했다.)과 [[정교회]] 신학교가 있었다.(이 [[정교회]] 신학교는 [[예수회]]를 비롯한 [[가톨릭 교회]]가 다 쓸려나가는 와중에도 멀쩡히 남아서 근현대까지 존속했다. [[신학교]]에서 중국어를 [[러시아인]]들에게 가르치고, 통역관을 육성하며 [[중국어]] 사전과 [[한자]] 사전을 편찬한 것은 덤.) 러시아도 영국과 비슷하게 고두 문제로 청과 외교적 마찰을 빚었으나, 러시아가 고두를 하겠다고 양보함에 따라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그래서 [[매카트니]] 사절단이 방문했을 때 같이 있던 러시아 사절단은 '''영국놈들''' 앞에서 '''고두를 하는 추태'''를 보이기 싫어서 천자 앞에서의 고두를 거부했다가 "이제까지 잘만 해오더니 갑자기 왜 이러는 거냐?"고 청 측으로부터 한소리 듣기도 촌극도 있었다.] 매카트니 사절단이 가져온 조지 3세의 선물은 각종 모직물과 기기묘묘한 완구 및 마차, 열기구와 지도 따위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하필이면 마차의 마부가 황제 바로 앞에 앉게 되는 식으로 설계가 된 바람에 건륭제의 기분이 상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지만, 사절단이 실패한 것은 이런 기분탓은 절대 아니고, 결국은 영국의 요구가 무리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요구는 청나라가 [[아편전쟁]]에 패하고서야 굴욕적인 [[난징조약]]의 조건으로 포함되었고, 그 결과 50년전 매카트니 사절단의 요구대로 중국의 대부분의 해안 항구가 개방되며, [[홍콩]]이 영국에게 넘어간다. 일부 서방역사가들은 이렇게 매카트니 일행을 거부한 건륭제의 쇄국정책이 청나라의 몰락을 불렀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건륭제의 우물안 개구리와 같은 세계관은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이건 명백히 영국이 무리한 요구를 했기 때문에 이걸 가지고 건륭제를 비판하는 것은 지나치게 서방의 인종주의인 [[백인의 의무]]적 관점에서 판단한 것이다. 어차피 영국도 그 이전(1780년대)부터 중국에 아편을 팔고 있었고, 이를 확대하기 위해 건륭제에 사절단을 파견한 것이기 때문에 선의를 가지고 청나라에 접근한 것은 아니었다. 1762년에는 [[아프가니스탄]]의 [[두라니 왕조]]의 지도자 아흐마드 샤 두라니가 베이징으로 사절을 파견하였다. 해당 사절단은 아흐마드 샤 두라니가 북인도의 [[마라타 동맹]]을 격파한 전공을 과시하는 내용의 서신을 전달하였다. 두라니 왕조 사절단은 네 마리의 최상급 준마를 선물하였지만 건륭제 앞에 엎드려 절하는 것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청나라 측에 부정적인 인상을 주었다 한다. 그러나 청나라 조정은 군비 문제로 신장 서부 지역으로 추가적인 원정을 실시하지는 못했으며, 아프가니스탄 측 역시 아흐마드 샤 두라니 이후 두라니 왕조가 와해되면서 청나라 조정과 아프가니스탄 사이의 대치상태도 막을 내렸다. 한편, [[조선]]과 다른 쪽으로 연관이 있기도 한데, 건륭제의 7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조선에서 청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때 조선 사신단에 끼어간 인물이 바로 [[박지원(실학자)|박지원]]. 즉, [[열하일기]]가 바로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집필한 저서였던 것이다.[* 열하일기는 당시 조선에서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다.] 보호국인 티베트를 두고 네팔과 전쟁을 벌였다. 힌두교를 믿던 네팔은 티베트 불교의 원산지였던 티베트와 사이가 나빴고 건륭제 치세에 계속 침략을 벌였다. 1788년에 벌어진 이 전쟁에서 티베트는 계속 패했고 종주국인 청나라에 구원을 청했다. 청나라는 군부실세 [[부찰 복강안]]이 이끄는 병력을 보냈으나, 워낙 고산지역인데다가 네팔군의 주력이 [[구르카]]병이었기 때문에 천하의 팔기군도 전투에서 밀렸다. 복강안은 네팔군 격파가 쉽지 않음을 알고, 네팔측에 크게 양보해 강화를 맺었다. 겉보기에는 네팔이 형식상 청나라와 군신관계를 맺지만, 티베트는 네팔에게 조공을 바치고, 네팔의 청나라와 교역을 허가하여 네팔에 경제적 이익을 안기는 것으로 티베트를 침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할아버지인 강희제 때와 비슷하게 본인 치세의 각국의 군주들 또한 묘하게도 중흥기 아님 전성기를 가져온 군주들이었다. 우선 조선에는 영조·정조, 오스트리아-헝가리·보헤미아에서는 [[마리아 테레지아]], 프로이센에서는 [[프리드리히 대왕|프리드리히 2세]], 러시아 제국에서는 [[예카테리나 2세]], 그리고 미국엔 군주는 아니지만 미국 최초의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