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건륭제 (문단 편집) === 후궁 === '''[[철민황귀비 부찰씨(건륭제)|철민황귀비 푸차씨]]'''(哲憫皇貴妃 富察氏) [[1735년]] 사망 * 황장자 정안친왕(定安親王) 영황(永璜) [[1728년]] ~ [[1750년]] * 황2녀 [[1731년]] ~ [[1731년]] * 보친왕부 '''격격''' - '''철비'''(哲妃)로 추봉(옹정 13년, 1735년) - '''철민황귀비'''(哲憫皇貴妃)로 추봉(건륭 10년, 1745년) 효현순황후 푸차씨와 성은 같으나 같은 집안은 아니다. 소속은 만주 정황기에 한미한 집안이었다. 보친왕이 건륭제로 즉위하기 몇 달 전에 죽었다. 맏아들을 낳은 공을 생각해 황귀비로 추봉되었다. '''[[혜현황귀비 고가씨(건륭제)|혜현황귀비 고기야씨]](慧賢皇貴妃 高佳氏)''' [[1711년]] 출생 ~ [[1745년]] 사망 * 보친왕부 '''격격''' - 보친왕부 '''측복진''' - '''귀비'''(貴妃, 옹정 13년, 1735년) - 죽기 전 '''황귀비'''(皇貴妃)로 특진(건륭 10년, 1745년) - '''혜현황귀비'''(慧賢皇貴妃)로 추봉(건륭 10년, 1745년) 고빈의 딸로 일찍이 보친왕부의 격격으로 들어와 건륭제의 사랑을 받았다. 건륭제는 즉위하면서 고씨를 첩의 작위 중 제일 높은 등급인 귀비(貴妃)로 봉했다.이는 고씨가 측복진으로 수년간이나 건륭제와 함께했다는 명분 외에도,[* 한비는 만주 양람기 출신으로 처음부터 측복진으로 들어왔으나 고씨는 격격으로 들어와 측복진이 되었는데 이는 건륭제가 한비보다 고씨를 총애했다고 볼 수 있다.] 한비보다 승진이 빠른것으로 보아 꽤 아꼈다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따로 봉호를 주지는 않았는데, 이는 만주족이던 황후 푸차씨와 격차를 늘리고, 역시 만주족이지만 지위는 고씨보다 낮던 한비(嫻妃) 호이포나라씨와는 격차를 줄이려는 의도였다. 고씨는 명문가의 숙녀로 오랜 시간 건륭제를 성심성의껏 모셨지만, 몸이 약해 34세의 젊은 나이로 병을 얻어 일찍 사망했다. 건륭제는 그가 죽기 직전에 황귀비로 특진시켜 주었다. 몸이 약해 일찍 죽었기에 자식은 없다. 고귀비 사후 권세를 누리던 고씨 일가는 몰락했다.[[만주족]]으로 편입되었긴 했지만 말이다. 건륭의 부황인 [[옹정제]]의 총비였던 [[돈숙황귀비 연씨]]와 매우 흡사한 인생을 살았다. 살아생전 부군인 황제의 총애를 많이 받았지만 일찍 요절했고 본인의 사후 집안이 몰락했다는 것도 비슷하다. '''[[순혜황귀비 소씨(건륭제)|순혜황귀비 소씨]](純惠皇貴妃 蘇氏)''' [[1713년]] 출생 ~ [[1760년]] 사망 * 황3자 순군왕 영장(永璋) [[1735년]]~[[1760년]][* 적모인 효현순황후의 장례에 슬퍼함이 부족하여 황위계승권을 박탈 당했으며 생모인 순혜황귀비가 죽은 후 3개월 뒤에 죽었다. 참고로 아내인 보르지기트씨는 옹정제의 양녀인 화석숙신공주와 박이제길특 관음보의 딸이다. 화석숙신공주는 원래 강희제의 망나니 황태자 윤잉의 딸이었지만, 옹정제의 양녀가 된다. 이후 남편이 원정 중 일찍 죽고 큰오빠 이친왕 홍석이 역모에 몰렸음에도 황실의 큰 어른으로 대접받으며 건륭제의 총애를 받는다.] * 황6자 화석질장친왕 영용(永瑢) [[1743년]]~[[1790년]][* 강희제의 21황자이자 건륭제의 동갑내기 숙부인 윤희의 양손으로 출계하였으며 그의 복진은 효현순황후의 동생인 참장 부겸의 딸이다.] * 황4녀 화석화가공주 [[1745년]]~[[1767년]][* 복륭안에게 하가하였으며 복륭안은 효현순황후의 동생인 대학사 군기대신 부항의 차남이다.] * 보친왕부 격격 - '''순빈'''(純嬪, 옹정 13년, 1735년) - '''순비'''(純妃, 건륭 2년, 1737년) - '''순귀비'''(純貴妃, 건륭 10년, 1745년) - 죽기 전 '''황귀비'''(皇貴妃)로 특진(건륭 25년, 1755년) - '''순혜황귀비'''(純惠皇貴妃)로 추봉(건륭 25년, 1755년) 보친왕부의 격격으로 들어와 즉위 후 도탑고 순수하다는 뜻의 순(純)의 봉호를 받고 순빈(純嬪)에 책봉되었다. 한족 출신에 한미하기 그지없는 집안이었으나 건륭제가 사랑한 사람 중 하나였다. 건륭제 사이에서 2남 1녀를 낳고, 귀비(純貴妃)까지 올라갔다. 병을 얻어 죽기 직전 건륭제가 직접 황귀비로 특진시켰다. '''[[숙가황귀비 금가씨|숙가황귀비 긴기야씨]](淑嘉皇貴妃 金佳氏)''' [[1711년]] 출생 ~ [[1755년]] 사망 * 황4자 화석이단친왕 영성(永珹) [[1739년]](건륭 2년)~[[1777년]][* 강희제의 12황자인 이의친왕 윤도의 양자로 출계하였다. 윤도의 복진은 의정대신 마제의 딸이고 마제는 효현순황후의 백부이다.] * 황8자 화석의신친왕 영선(永璇) [[1746년]](건륭 11년)~[[1832년]] * 황9자 영유(永瑜) [[1748년]](건륭 13년)~[[1749년]] * 황11자 화석성철친왕 영성(永瑆) [[1752년]](건륭 17년)~[[1823년]][* 효현순황후의 동생인 부항의 딸 중 하나가 적복진으로 시집을 갔다. 부항은 물론이고, 그의 아들들이 모두 총애를 받았으며, 다른 딸은 예친왕 도르곤의 후계자에게 적복진으로 시집을 갔다.] * 보친왕부 격격 - '''김귀인'''(貴人, 옹정 13년, 1735년) - '''가빈'''(嘉嬪, 건륭 3년, 1738년) - '''가비'''(嘉妃, 건륭 6년, 1741년) - '''가귀비'''(嘉貴妃, 건륭 13년, 1748년) - 죽고 난 뒤 '''숙가황귀비'''(淑嘉皇貴妃)로 추봉(건륭 20년, 1755년) 숙가황귀비의 조상은 조선인 출신으로 정묘호란 당시 청에 잡혀간 김신다리 형제이다. 신다리 형제는 병자호란 당시 통역 일을 하며 청나라에 공을 세워 정황기의 포의 니루[* 포의란 황실 직속의 도우미, 노복 신분을 말한다. 기인이되 귀족인 기분 니루에는 속하지 못한 중산층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중 하나인 ‘고려니루’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숙가황귀비의 증조할머니는 [[순치제]]의 유모였고[* 이때부터 김씨 일가의 지위가 높아지기 시작한다.], 그들의 후손들은 정1품, 정2품 관원을 배출했다. 특히 조선 혈통이다보니 조선 사신들과 로비를 주고받아 조선왕조실록에서 김상명, 김간 등의 이름이 심심찮게 언급되기도 한다. 숙가황귀비는 보친왕부의 격격으로 들어와 즉위 후 귀인(貴人) 작위를 받았으며, 후에 아름답다는 뜻을 가진 가(嘉)의 봉호를 받고 가귀인(嘉貴人)의 작위를 받았다. 빈(嘉嬪), 비(嘉妃)를 거쳐서 귀비(嘉貴妃)까지 올라갔다. 매우 아름다워 건륭제가 사랑한 이 중 하나였고 황태후와의 관계도 좋았다. 건륭제와의 사이에서 아들만 4명을 줄줄이 낳으며 자식복도 많았고, 대부분 장성해 황족 최고 작위인 친왕(親王)을 부여받았으며 그 중 황11자 영성은 건륭제의 후계자 후보에도 들었으나 영성이 무예를 싫어해서 동생인 황15자 영염이 후계자가 된다.[* 훗날 [[도광제]]의 장자 혁위가 후사 없이 죽자 영성의 증손자 중 하나인 재의가 혁위의 양자로 입양되었는데, [[동치제]]가 후사 없이 죽자 재의의 아들인 부륜이 동치제의 양자로서 제위에 옹립될 뻔 했으나 실제 혈맥이 너무 멀다는(실상은 [[서태후]]가 제어하기 까다롭다는) 이유로 무산되었고, 부륜을 제외하면 이 항렬까지 세대교체가 빨리 이뤄진 가까운 황족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차기 황제는 결국 같은 항렬에서 선정되었다.] 가귀비는 죽은 후 곧바로 [[효성헌황후|숭경황태후]]에 의해 황귀비로 추증되었다. 건륭제는 숙가황귀비를 비롯한 김씨 일가를 모두 정황기 만주 기분 니루로 편입시켜 신분을 높여 주었고, 훗날 가경제가 만주 성씨인 '~가(佳)'가 붙은 긴기야씨(金佳氏)로 사성하며 긴기야씨로 기록되었다. 현재 긴기야 가문의 후손들은 한국식으로 김씨 성을 쓰고 있다.[* 사실 이는 긴기야 가문 뿐만 아니라 다른 조선계 만주족 가문의 후손들에게도 해당되는 일이다.] '''[[경공황귀비 육씨]](慶恭皇貴妃 陸氏)''' [[1724년]] 출생 ~ [[1774년]] 사망 '''육귀인'''(陸貴人, 1748년) - '''경빈'''(慶嬪, 건륭 16년, 1751년) - '''경비'''(慶妃, 건륭 24년, 1759년) - '''경귀비'''(慶貴妃, 건륭 33년, 1768년) - '''경공황귀비'''(慶恭皇貴妃)로 추봉(가경 4년, 1799년) 상재(常在)로 있다가 귀인으로 진봉했다. [[효의순황후]]의 아들이자 훗날 [[가경제]]로 즉위하는 15황자 영염을 키웠다. 이 때문에 태상황 건륭제가 죽은 뒤 가경제의 손에 의해 황귀비로 추봉된다. 별 탈 없이 귀비까지 올라간 것을 보면 건륭제의 여러 총비 가운데 하나로 보이나 자식은 없다. '''[[유귀비 가리엽특씨|유귀비 커리예트씨]](愉貴妃 珂里葉特氏)''' [[1714년]] 출생 ~ [[1792년]] 사망 * 황5자 화석영순친왕 영기(永琪) [[1741년]]~[[1766년]] * '''해상재'''(海常在, 옹정 13년, 1735년) - '''해귀인'''(海貴人, 건륭 2년, 1737년) - '''유빈'''(愉嬪, 건륭 6년, 1741년) - '''유비'''(愉妃, 건륭 10년, 1745년) - 죽은 뒤 '''유귀비'''((愉貴妃)로 추봉(건륭 57년, 1792년) 건륭제의 보기 드문 몽골 출신 후궁. 커리예트 씨가 낳은 영기는 매우 총명하고 출중했으나 장수한 자기 아버지보다 일찍 죽었다. 거란, 여진, 만주어 연구로 명성이 높은 언어학자 [[아이신기오로 울히춘]] 부녀가 영기의 후손이다. 서비 예허나라씨가 죽은 뒤 육궁 관리권한을 넘겨받았다. 참고로 [[황제의 딸]]에 나왔던 오왕자 영기가 바로 이 사람이다. '''[[완귀비 진씨]](婉貴妃 陳氏)''' [[1716년]] 출생 ~ [[1807년]] 사망 * 보친왕부 '''격격''' - '''진상재'''(陳常在, 옹정 13년, 1735년) - '''진귀인'''(陳貴人, 건륭 2년, 1737년) - '''완빈'''(婉嬪, 건륭 13년, 1748년) - '''완비'''(婉妃, 건륭 59년, 1794년) - '''완귀태비'''(婉貴太妃, 가경 6년, 1801년) 건륭제가 보친왕이던 시절에 제일 늦게 격격으로 들어왔으며, 왕부 시절부터 있던 후비 가운데 제일 어린 편이었다. 보친왕부 시절부터 건륭제와 함께한 후비들 가운데에서는 유일하게 '''건륭제가 죽은 후까지 살아 태비가 된 인물이다.''' 건륭 13년에 빈(嬪)에 책봉된 뒤 40년이 넘는 기간동안 빈으로 있었다. 총애를 받던 후궁들은 아이도 안 낳고 한 방에 비까지 올라간것과 달리 완귀비 진씨는 별달리 총애를 받진 못한 걸로 보인다. 왕부시절부터 건륭제와 함께했다는 지위 덕분인지는 몰라도 강등이 밥먹듯이 일어나던 건륭 시대의 후궁에서 자기 자리는 온전히 보존했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까지 살아남아 귀비로 올라갔다. 후임 [[가경제]]가 그가 건륭제의 잠저 시절부터 함께한 모비(母妃)임을 존중해 귀비(貴妃)로 존숭했다. 그래서 죽었을 때 작위는 완귀태비(婉貴太妃). 그가 죽었을 때 악귀태인 시린기오로씨([[악귀인 서림각라씨]])가 진씨의 주검을 배웅했다. 악귀인 시린기오로씨는 완귀비 진씨 다음으로 건륭제와 함께한 경력이 제일 오래된 후비였기 때문이다. '''[[영귀비 파림씨|영귀비 바린씨]](穎貴妃 巴林氏)''' [[1731년]] 출생 ~ [[1800년]] 사망 * '''나상재(那常在, 건륭 13년, 1748년)''' - '''나귀인'''(那貴人, 건륭 13년, 1748년) - '''영빈'''(潁嬪, 건륭 16년, 1751년) - '''영비'''(潁妃, 건륭 24년, 1759년) - '''영귀비'''(潁貴妃, 가경 3년, 1798년) 팔기 [[몽골]]의 양홍기 출신으로 건륭 13년에 상재로 책봉되어 같은 해 귀인에 올랐다. 영황귀비 위씨가 막내 황자인 영린을 낳자 영비 바린씨가 영린을 도맡아 기르게 되었다. 유비 커리예트씨가 죽고 난 뒤로 후궁 사무를 돌보게 되었다. 영황귀비가 세상을 뜨고 난 뒤로 후궁에는 마땅한 통솔자가 없어서 제일 높은 지위의 후궁이 사무를 도맡았었는데, 영귀비 바린씨가 건륭 시대 후궁의 마지막을 통솔한 셈이다. 건륭제가 태상황으로 물러나고 가경제가 즉위한 뒤 영비는 태비가 되었는데, 태상황 건륭제에 의해 귀비로 승봉해 최종 지위는 영귀태비(潁貴太妃)가 되었다. 가경제의 아내인 효화예황후는 어렸기 때문에 태상황 건륭제가 죽을 때까지 영귀태비 바린씨가 후궁을 관리했다. '''[[흔귀비 대가씨(건륭제)|흔귀비 다이갸씨]](忻貴妃 戴佳氏)''' 출생시기 알 수 없음, [[1764년]] 사망 * 황6녀 [[1755년]] ~ [[1758년]] * 황8녀 [[1757년]] ~ [[1767년]] * '''흔빈'''(忻嬪, 건륭 18년, 1753년) - '''흔비'''(忻妃, 건륭 28년, 1763년) - 죽은 뒤 '''흔귀비'''로 추봉(忻貴妃, 건륭 29년, 1764년) 승경황태후의 눈에 띄어 건륭 18년에 빈에 봉해졌다. 건륭 20년에 6째 공주를 낳았고, 건륭 22년에 8째 공주를 낳았지만 모두 일찍 죽었다. 두 딸을 잃은 뒤 건륭 28년 비로 올랐지만, 1년 뒤에 죽었다. 죽은 뒤 건륭제에 의해 귀비로 추서되었다. '''[[순귀비 이이근각라씨|순귀비 이르건기오로씨]](循貴妃 伊爾根覺羅氏)''' [[1758년]] 출생 ~ [[1798년]] 사망 * '''귀인'''(貴人, 건륭 41년, 1776년) - '''순빈'''(循嬪, 건륭 41년, 1777년) - '''순비'''(循妃, 건륭 57년, 1792년) - 사망 후 '''귀비'''로 추숭(가경 2년, 1798년) 건륭제가 황제위에 있던 시절 마지막 수녀 선발로 들어왔다. 가경 2년 [[폐결핵]]으로 사망한 뒤 태상황 건륭제에 의해 귀비로 추숭되었다. '''[[서비 예허나라씨]](舒妃 葉赫那拉氏)''' [[1728년]] ~ [[1777년]] * 황10자 [[1751년]] ~ [[1753년]] * '''귀인'''(貴人, 건륭 6년, 1741년) - '''서빈'''(舒嬪, 건륭 6년, 1741년) - '''서비'''(舒妃, 건륭 13년, 1748년) [[효의순황후]]의 딸인 황9녀 화석화가공주(和碩和恪公主)를 길렀다.건륭 40년([[1775년]]) 내명부와 육궁을 다스리던 황귀비 위씨(효의순황후)가 병사하자 궁중 비빈 가운데 제일 높은 비빈이 되어 육궁을 관리하게 되었다. 건륭제는 황귀비 위씨가 죽고 난 뒤로는 [[황후]]나 황귀비를 따로 세우지 않고 자기가 직접 육궁을 통솔했는데, 그 때문에 짬 있는 후궁들도 저마다 한가닥 할 수 있었다. 서비 예허나라씨가 이들 가운데 제일 지위가 높았기 때문에 제일 발언권이 강했다. '''[[용비 화탁씨|용비 호자씨]](容妃 和卓氏, خوجام, Xojam)''' 일명 '''향비''' [[1734년]] 출생 ~ [[1788년]] 사망 본명은 화탁 파티마 (위구르어 : فاتىمە, Fatime)라는 설이 있다. 아버지는 엘리화탁씨 (위구르어 : ئەلى خوجام), 동생은 투르드화탁씨 (위구르어 : تۇردۇ خوجام)이다.[[https://ko.wikipedia.org/wiki/%EC%9A%A9%EB%B9%84_%ED%99%94%ED%83%81%EC%94%A8|한국어 위키백과]] 이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건륭제가 위구르의 소화탁훠지잔(霍集占)을 쳐 그 전리품으로 데려온 여성이고, 소화곽탁집점의 딸 혹은 첩이었다고 한다. 출생이 출생인지라 많은 전설이 내려오는 여성이다. 외모는 아주 아름다웠고 페로몬 내음이 강하게 났다는 전설도 있다. 건륭제는 그녀를 아주 깊게 사랑했다고 한다. 건륭제는 출신과 문화가 달랐던 용비 화탁씨를 위해 자금성 밖 북경 황성 [[중난하이]]에 보월루를 지어 궁에서도 이슬람식 생활을 영유할 수 있도록 특별히 보장해주고 보월루에 가서 그녀와 사랑을 나누었다고 한다. 또한 용비에게 [[할랄 푸드|회족 요리사를]] [[청진 요리|붙여주었으며]] 보월루에서 매일 내려다 볼 수 있는 거리에 회족거리를 조성해 그녀가 고향의 모습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끼도록 해주었다. 건륭제는 위구르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의사소통은 문제 없이 이뤄졌다고 한다. 황제의 딸 2기에 나온 함향이 이 향비이다(그리고 드라마에서는 다른 남자와 야반도주) '''[[돈비 왕씨]](惇妃 汪氏)''' [[1746년]] 출생 ~ [[1806년]] 사망 * 황10녀 고륜화효공주 [[1775년]]~[[1823년]] 65세 때 돈비 왕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늦둥이 딸을 특별히 총애했다고 한다.[* 다만 돈비 왕씨는 자신의 딸을 믿고 궁녀를 때려 죽이는 등의 악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래서 돈빈으로 강등되었다가, 2년 후 다시 돈비로 돌아왔는데 어찌나 성격이 나빴던지 어지간한 후궁은 모두 2등급 이상의 품계를 올려주었던 [[가경제]]조차 그녀를 그냥 돈태비로 놔두었다. 건륭제가 죽고 난 뒤 그녀는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어 황궁 내 태비들 사이에서도 [[왕따]] 신세가 되고 기고만장하던 과거와는 달리 초라한 말년을 보냈다.] 자연히 어미였던 왕씨도 총애를 많이 받았다. 화효 공주는 건륭제의 외모며 성격, 재능을 유난히 닮아 여러 면에서 출중했던지라 건륭제는 그녀를 보며 '네가 아들이었다면 너를 태자로 삼았을 텐데...' 라고 생각하곤 했다고. 딸을 각별히 사랑한 건륭제는 그녀가 후궁 소생의 공주임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고륜 공주로 봉해주었으며[* 일반적으로 청나라에서 황제의 적녀는 고륜 공주로 봉해졌고 서녀는 화석 공주로 봉해졌다. 조선으로 치면 고륜 공주는 '공주' 에, 화석 공주는 '[[옹주]]'에 해당하는 셈. 물론 조선의 공주, 옹주와는 달리 모친의 지위나 정치적 상황에 따라 예외도 있었다.], 미행이나 사냥에도 그녀를 동반하여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곤 했다. 또 본인이 각별히 총애했던 권신이자 상상을 초월하는 거부(巨富)였던 허션의 장남 니오후루 펑션인더(ᠨᡳᠣᡥᡠᡵᡠ ᡶᡝᠨᡤᡧᡝᠨᠶᡝᠨᡩᡝ, Niohuru Fengšeninde, 紐祜祿 豊紳殷德, 뉴호록 풍신은덕)와 일찍이 정혼시켰고, 1789년 11월 17일에 결혼시켰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이 남았는데, 그녀의 혼인 당시 융숭한 총애와 사치스러운 혼수는 저번 공주의 혼사에 비해 10배나 되었고, 공주의 집으로 실어 보내는 물건들은 대충 어림잡아 봐도 수백만 금이 넘었으며, 그녀가 시가로 가던 날에는 수천 수백 명에 달하는 고관들이 참석하여 작별을 고하는 절을 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