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건륭제 (문단 편집) ==== 언론 탄압 및 사상 통제 ==== 청나라는 기본적으로 소수 (수백만)인 만주족이 최상위 지배층이 되어 다수 (수억) 한족을 지배하는 구조였다. 게다가 명나라 시절까지만 해도 만주족의 전신인 여진족은 한족의 지배를 받았던 문명 수준이 낮은 이민족이었다. 이렇게 오랑캐로 불리던 만주족이 여러가지 호조건이 맞아 떨어져 중원을 지배하게 되었지만, 이민족 지배에 대한 한족의 반발은 피할 수 없었다. 여러 선비들이 정통중화와는 결이 다른 이민족이 중국을 지배하는 현실을 개탄하거나 불만을 토로하는 글을 쓰기도 했으나, 이들은 가차없이 처단되었다. 건륭제 뿐만 아니라 명군으로 추앙받던 강희제나 옹정제, 심지어는 청나라 말기에도 만주족 황실에 대한 비방에는 전혀 관용이 없었다. 이는 건륭제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문자의 옥]]이라는 청나라의 언론과 사상 탄압은 건륭제 시대에 들어 더 심화되었다. 그렇다 보니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글이 반청사상으로 해석될까봐 몸을 사리게 되었다. 이는 사실 건륭제뿐만 아니라 성군이라고 추앙받던 강희, 옹정제 시절도 마찬가지였다. 대표적으로 옹정제는 사사정이 시경에서 인용한 維民所止(유민소지) 문구를 유와 지가 자기 연호인 옹정(雍正)에서 위에 있는 변을 뗀 것이니 자기를 참수할 뜻이 있다는 억지를 써서 죽였는데, 건륭제 시절에는 이런 문인이나 학자에 대한 억압이 훨씬 강화되었다. 건륭제 시기에는 문자의 옥이 활발히 일어나서 청나라 기간에 벌어진 문자의 옥 전체 사건의 80%가 건륭제 시기에 일어났다. 하지만 이미 명나라가 망한지 1세기나 지난 시점에서 갑자기 반청운동이 일어났을 리는 없을 텐데 그럼 왜 일어났냐면 '''사소한 걸로 건륭제가 침소봉대했기 때문이다.''' 사사정 사건이 더 합리적으로 보일 정도로 별의 별 이유로 문자옥이 마구 벌어졌고 오죽하면 이 시기에 이르자 청나라 학자들 사이에서는 고서만 죽어라 파고드는 학문인 고증학이 유행했으며 단순한 서신을 주고받는 일조차 꺼렸는데 서신을 주고받으면 문서가 남게 되고 어느 순간에 그 문서들에 적힌 글자 어디가 트집잡혀 죽을지도 모르니 서신을 주고받는 일을 꺼렸고 설령 서신을 주고받더라도, 조선 사신단과 필담을 하고 나면 문서를 읽고 나서 불태우는 게 국룰이던 시대였다. 여기에 건륭제 자신도 문자옥을 남발하기를 꺼리지 않아 심지어는 자기를 불쾌하게 만든 사람을 문자옥에 얽어넣어 보복했을 정도다, 문제는 워낙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사람들을 때려잡다 보니 사람들의 불만도 올라가고 문자옥 앞에선 한족과 만주족이 평등했기에 한족도 때려잡았지만 만주족도 때려잡았다. 거기다 아부하려는 사람들조차 문자옥에 걸려 죽기도 했으니 건륭제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어떠했을지... 건륭제에 대한 비판자들은 저렇게 서슬퍼런 문자의 옥이 수십년간 이어지다 보니 그 시간 동안 도저히 정상적인 학문 연구나 문학 활동이 이뤄지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까딱하면 목이 날아가는 상황에서 어느 누가 학문을 연구하고 문학 활동을 하겠는가? 즉 문자의 옥으로 인해 건륭제 자신이야 목표인 황권 강화를 이루었을지는 몰라도 그 내면을 들여다 보면 반대파는 물론 자기에게 아부하는 사람들, 동족인 만주족까지 때려잡은 병크에[* 오죽하면 문자의 옥을 피해 한족으로 위장하는 만주족이 속출할 정도였다.] 중국의 학문과 문학의 발전까지 가로막은 어리석은 행위라는 것이다. 다만 위에서 말했듯이 청나라는 문화적 수준이 낮았고, 머리수에서 소수인 만주족이 지배층인 정권이다보니 이렇게 정통성을 건드릴 수 있는 문제에 관대할 수 없었다. 건륭제 시절에는 이런 탄압 때문에 반만주족 정서는 수면아래 가라앉았지만, 아편전쟁 이후에 청나라의 행정력이 약화되자, 북경 정권의 힘이 닿지 않는 남부 (특히 광동성)에서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어 [[태평천국의 난]]으로 타오르고 결과적으로 청나라의 멸망까지 이르게 된다. 여담으로 신해혁명 이후 반청, 반만주족적인 입장에서 문자의 옥이 실제보다 과장되어 알려진 경우도 있는 듯 하다. 조선왕조실록의 정조10년 3월 27일자 [[https://sillok.history.go.kr/id/kva_11003027_004|기사]]에 의하면 건륭제가 황제를 비방했다는 혐의를 받아 옥에 갇힌 사람을 여러모로 따져보고 "이사람은 무고하다"고 판정해 풀어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때 건륭제의 나이가 이미 80이었으니, 건륭제가 늙으면서 망녕이 들어 총기를 잃었다고는 하지만, 적어도 상식적인 판단은 내릴 정도의 인지능력은 갖추고 있었으며, 따져보고 무리하다 싶으면 풀어주었으니 무고한 사람을 꼬투리를 잡아 처형했다는 식의 선전은 반청적인 입장의 한족들이 과장한 듯도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