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게르만족 (문단 편집) === 고대 === || [[파일:북유럽 청동기 시대 사회.png|width=100%]] || || 청동기 시대의 게르만족 || || [[파일:FjiRqkOWIAEXI0R.jpg|width=100%]] || || 기원전 50년~ 기원후 300년 사이의 게르만족의 분포도 || ||<-2> [[파일:1280px-Germanic_tribes_settlements_750BC-1AD.svg.png|width=100%]] || ||<-2> 고대 게르만족의 이동 || ||<#FF0000>||기원전 750년 이전 || ||<#FF9955>||기원전 750년과 기원후 1년 사이 || ||<#FFEEAA>||기원후 100년까지 || ||<#99FF55>||기원후 100년 이후 || 독일을 영어로 Germany라 부르다 보니 현 독일 지역이 이들의 주 영역이었다는 인식이 있으나, 실제 게르만족은 전부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내려왔다. 기원전 700년 이전 게르만족은 스칸디나비아 남안과 유틀란드 반도에서만 거주하고 있었다. 기원전 600년~300년 사이 스칸디나비아의 온도가 내려가자 게르만족은 대거 발트해를 남하하여 발트해 남안에 거주하게 되었고 이후 남하를 계속하여 [[켈트족]]을 몰아내고 [[중부유럽]]을 차지하여 정주하게 된다. 기원전 120년 유틀란드 반도에 대기근이 닥치자 이곳에 거주하고 있던 게르만족의 일파인 킴브리족과 테우토니족(튜튼족) 등이 살 곳을 찾아 남하하다가 로마와 맞닥뜨리게 된다. 로마는 이들이 이탈리아로 침공할 것을 우려하여 수차례 군대를 보냈으나 전멸하고 [[집정관]]이 연이어 전사하고 말았다. 이에 큰 위협을 느낀 로마는 기원전 105년 무려 12개 군단을 동원하는 총력전을 펼쳤으나 [[아라우시오 전투]]에서 8만 명이 전사하는 로마 역사상 전무후무한 최악의 참패를 당하게 된다.[* 다만 국내에서는 아라우시오 전투의 내용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유는 고대 로마사를 다룬 베스트셀러인 [[로마인 이야기]]에서 아라우시오 전투에 대해 철저히 침묵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로마인 이야기가 출간되기 전의 국내에서는 로마사나 게르만족 역사를 비롯한 고대 서양사에 대한 지식 자체가 거의 전무하다시피한 실정이었다.] 이에 로마 시민들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고, 국가적 위기를 맞은 로마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지도하에 로마의 사회 체제를 뒤엎는 군제 개혁을 실시했다. 그런데 킴브리족과 테우토니족은 곧장 이탈리아로 진격하지 않고 [[이베리아 반도]]와 [[갈리아]]를 유랑하면서 선주민들과 전투를 치르며 전력을 소모하다가 급기야는 분열되고 말았다.[* 왜 이들이 [[이탈리아]]로 진격하지 않았느냐면, 그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진짜 목적은 [[로마 공화국|로마]]에 대한 정복과 약탈이 목적이 아니라, 한 곳에서의 정착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절대다수의 게르만족은 [[유목|유목민]]이 아니라 농경민이었고, 따라서 유랑 생활을 오래 지속하는 것이 불가능했기에, 선주민과의 무력 충돌이 있거나 말거나 정착지를 찾고자 노력했다. 이런 상황에서 불필요한 전쟁은 부담되는 일이었다.] 한편 로마군은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으로 직업군인화되어 강도 높은 훈련을 받고 있었다. 분열된 게르만족이 각각 다른 방향으로 이탈리아로 접근해 오자 로마군은 기원전 102년 마르세유 인근에서 테우토니족을 격퇴했고, 이어 기원전 101년 알프스 산맥을 넘어오느라 약화된 킴브리족을 밀라노 인근에서 섬멸했다. 킴브리족과 테우토니족은 전멸했고 여자들과 어린이는 자결하여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이때 군제 개혁으로 로마군은 용병화되어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이행하는 중요한 한 원인이 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킴브리 전쟁]] 참조. ||<-2> [[파일:Germanic_dialects_ca._AD_1.png|width=100%]] || ||<-2> 기원후 1년경 게르만어의 분포 || ||<#009FE3>||[[북게르만어군|북게르만어]] || ||<#FF6E69>||북해 게르만어 || ||<#F7B859>||저지 프랑크어 || ||<#FFFF59>||고지 독일어 || ||<#009640>||[[동게르만어군|동게르만어]] ||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만족과의 경계를 [[라인 강]]에서 [[엘베 강]]으로 확장하기 위해 11개 군단을 투입하여 10여 년에 걸친 대규모 [[게르마니아]] 정복 사업을 펼친다.([[게르마니아 전쟁]]) 그러나 서기 9년에 [[아르미니우스]]가 이끄는 게르만족 연합이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로마군을 전멸시키는 대승을 거두면서 로마 제국은 게르마니아 정복을 포기하게 되고 로마와 게르만족의 국경은 [[라인 강]]과 [[도나우 강]]으로 확정된다. [[토이토부르크 전투]] 이후에도 게르만족과 로마는 라인 강과 도나우 강에 이르는 넓은 지대를 국경으로 마주하면서 수시로 크고 작은 전투가 이어진다. 3세기에는 게르만족의 한 부류인 [[고트족]], [[프랑크족]], 알레마니족[* 알레마니족은 [[프랑스어]]에서 독일을 칭하는 알마뉴의 어원이 되었다.]이 로마를 공격하여 로마에게 타격을 주기도 했다.[* 다만 게르만족이 열세이다 보니 로마와는 전면전으로 나가지는 못했고 주로 게릴라전으로 나갔다. 왜냐면 로마 제국과 게르만족 간의 인구 격차가 매우 컷다. 일례로 로마는 인구가 6천만의 대제국이었지만 게르만족은 대이동이 시작되는 시기에도 인구가 100만도 안되는 75만에 불과했다.] 동시에 게르만족과 로마 사이에 조심스러운 교류가 진행되기 시작되어 게르만족은 로마 사회로 조심스럽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게르만족의 범위는 굉장히 넓었고 그 속에 많은 부족들이 있었으므로 로마는 일부 게르만족과는 대립각을 세우는 한편 다른 일부 게르만족과는 동맹을 맺는 식의 정책을 쓰며 게르만족을 다루었다. 4세기에 들어설 무렵엔 게르만 족과 로마 사이에 상당한 교류가 진척되어 용병으로 당시 이미 상당히 와해되어버린 로마의 국방제도를 메워주기도 하고, 로마 농민들이 경작을 포기한 변경지대에 대신 이주하여 그 땅을 경작하고 세금을 내기도 했다. 한편 수세기에 걸친 교류를 통해 게르만족과 로마와의 문화, 문명적 수준 차이가 점점 좁아졌다. 피터 히더의 '로마 제국과 유럽의 탄생' 중 2장 '세계화와 게르마니'에 의하면 4세기 들어서는 군사를 전담하는 귀족 종사단, 즉 초보적인 형태의 [[장교단]]이 형성되었고 그들 중에서 좀 더 뛰어난 자들이 부족/종족 전체를 이끄는 부족장/왕이 되었다. 즉 부족장/왕 입장에서 이들은 잠재적인 경쟁자였다는 이야기가 되고, 이들 중에서 본인의 위치에 도전하려는 것이 보이거나, 그런 것이 확실하지 않더라도 실력과 인망이 빼어나게 좋았던 경우 내분이 있었으며 심하게는 내전도 있었다. 로마가 이들 간의 갈등관계를 이용해서 같은 게르만 부족/종족 내 [[디바이드 앤 룰]]을 성공시킨 사례도 더러 있다. 그러나 달리 보면 저 귀족 종사단은 부족장/왕이 되기 위한 일종의 예비 인재풀이라서, 여러 부족/종족을 한꺼번에 통제하는 부족장/왕이 상설직이 아니라 이전의 [[아르미니우스]]나 옆 갈리아의 [[베르킨게토릭스]]와 같은 특출난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거했던 나머지, 이들이 죽고 나서 이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던 일은 없어졌다. 지도자가 죽었는데, 그 아들이 나이가 충분히 차 있으면서 리더십이 되면 성공적으로 세습하는 것이고, 리더십이 없거나 나이가 너무 어리면 귀족 종사단 중 실력과 인망이 있는 사람이 새로이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즉 세습이 어느 정도 인정되되, 절대적인 원리가 아니라는 면에서 로마 제국과 거의 같다.] 즉 일가 내 세습이 정착되지는 않았다 해도 부족장 내지 왕 자리는 예전과 달리 상설직으로 정착되었어서 정치적으로 훨씬 더 안정되었고 결집력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렇게 발전한 게르만족은 로마에게는 종전보다 훨씬 강적으로 다가왔다. 물론 이렇게 되니 귀족 종사단과 그 밑의 평민과의 사회경제적 차이는 종전에 비해서 점점 벌어졌다고도 한다. 또한 제국과의 국경인 [[라인 강]] 혹은 [[다뉴브 강]] 한가운데에서 로마 황제들과 선상 [[정상회담]]을 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이렇게 로마 황제와 1:1로 회담을 하는 것은 제정 초기에는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4세기 후반, 동방에서 갑자기 [[훈족]]이 나타나자 난리가 나버렸다. 갑자기 동쪽에서 훈족이 나타나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연맹왕국 비스무리한 것까지 형성하면서 게르만족 중 가장 잘나가던 동고트족을 휙 밀어버리자 이들이 서진하면서 주변의 여타 게르만족들을 도미노 쓰러뜨리듯 밀어버렸고, 그 결과 일어난 것이 바로 '''게르만족의 대이동 또는 민족 대이동'''이다. 이로 인해 로마의 영토와 [[유럽]], [[아프리카]] 각지에 게르만족들이 각자의 왕국을 세우게 된다. 대표적인 왕국들은 아래와 같다. * [[반달족]] - [[반달 왕국]] * [[고트족]] - [[동고트 왕국]]·[[서고트 왕국]] * [[부르군트족]] - [[부르군트 왕국]] * [[프랑크족]] - [[프랑크 왕국]] * [[앵글로색슨족]] - [[칠왕국]] || [[파일:3039fbd4294657528f48aa1c69beb1c6.jpg|width=100%]] || || 476년 말의 유럽 || 특히, 이러한 왕국들 중 가장 눈에 띄는건 프랑크 왕국인데 짧은 이동거리와 종교적으로 보았을 때는 클로비스가 시작한 로마 카톨릭 개종, 경제적 관점에선 대서양 근처 영토장악 후 곡창지대라는 지리적 우월함에 힘입어 주변 국가의 왕실들과 혼인을 하는 등 지속적으로 교류하는 움직임이 번영의 이유로 볼 수 있다. 그래서 로마는 후에 여러모로 골치아픈 이들을 저지하려고 했지만 그게 잘 먹히지 않은 게, 로마도 인력 부족이라서 이들이라도 받아들여 머릿수를 채워야 했던 안 좋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부족째로 이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전사를 군에 편입시켜 계속 인력을 충원하는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인적, 물적 자원은 동로마 지역이 풍부한데 그 지역은 절반 이상이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대치 전선에 그게 투입되어야 하는지라(...). 이때 로마 병사들이나 지휘관들이 게르만족이기 때문에 이들을 막지 않았다는 것은 전형적인 편견이다. 실제로는 [[플라비우스 스틸리코]] 등의 게르만계 로마인들이 라틴계보다도 더 열심히 노력해가며 분투하기도 했다. 애초에 게르만족은 단일 민족을 가리키는 말도 아니며,[* 예나 지금이나, 게르만족이란 [[인도유럽어족]]의 [[게르만어파]] 계열 언어를 쓰는 [[유럽]]계 민족들을 싸잡아 부르는 말이다.] 같은 게르만족이라도 전근대 시대에는 같은 부족이 아니면 그냥 남일 정도로 철저한 부족 사회였는데,[* 이런 일은 꼭 전근대 시대가 아니더라도 어디서나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몽골도 그랬다.] 당연히 그 내부에서 친(親) [[로마 제국|로마]]파 부족과 반(反) 로마파 부족은 서로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겼다. 일례로, [[고트족]]은 서로 같은 민족인데도 불구하고 각각 [[서고트 왕국|서고트족]]과 [[동고트 왕국|동고트족]]으로 갈리면서 서고트족은 [[로마 제국]]의 신민이 되었고, 동고트족은 [[훈족]]에게 정복당한 뒤로 뒷날 훈 제국이 붕괴된 뒤에 [[동고트 왕국]]을 세워 독립하기 전까지 그들과 함께 따라다녔다. 그 결과로 [[카탈라우눔 전투]]와 같이 로마 제국의 운명이 걸린 큰 전투에서 같은 고트족끼리 칼끝을 겨누는 일도 비일비재했다.(서고트는 로마 편, 동고트는 훈족 편) 그리고 엄밀히 말하자면 라틴족 또한 로마 제국 말기의 시점에서는 단일 민족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로마의 [[이탈리아반도]] 통일 이전에는 [[하나의 중국|하나의 라틴족]]이라는 개념이 없었으며, 이후 로마의 이탈리아 반도 통일 및 다른 문화권([[이베리아 반도]], [[발칸 반도]], [[북아프리카]] 등)으로의 팽창을 통해 라틴족은 보다 더 다양한 혈통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사치와 퇴폐에 빠진 로마 제국이 게르만족 용병들을 쓰게 되어 차츰 군사력이 저하되어 기강이 빠져 결국 망했다는 것은 틀린 해석이다. 로마군의 중추를 형성했던 게르만족들은 적어도 4세기까진 대부분 어디까지나 "로마 시민"으로서 직업 군인으로 복무하던 상비군이었고, 게르만족 출신 병사들과 장교들은 전반적으로 로마에 대단한 충성을 바쳤다. 당시의 [[로마 제국]] 내의 게르만족들의 삶은 이랬다. 게르만족들 중에서 귀족이거나 부유한 상인이나 지주쯤 되는 유력자의 자녀들은 로마에 반항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볼모]]로 붙들려서 수도인 [[로마]]로 보내졌다. 물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한 후에는 그곳으로 보내졌는데, 이 볼모 생활은 강제적으로 유폐된 생활이 아니었다. 오히려 볼모들은 사실상 로마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공부하는 유학생으로 간주되었고, 이곳에서 로마식 교육을 받은 후에 로마 제국의 [[고관대작]]으로 임용되어 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이 때 로마의 군사기술, 정치조직 등을 배워서 돌아가고 나서는 그것을 게르만 사회에 접목시켰고, 이게 세대마다 반복되다 보니 시간이 지나며 게르만 사회가 로마 사회를 점점 따라잡게 되었다. 이 때는 현대의 [[무어의 법칙]]처럼 로마가 기술발전에 박차를 가해서 더 기술력의 차이를 벌릴 수도 없는 전근대였다.] 때가 되어 족장의 자리를 물려받거나 가업을 잇기 위해 출신 부족의 영토로 귀국할 때에는 그야말로 [[금의환향]]이 따로 없었다. 엄청난 액수의 퇴직금, (명목상이나마) 제국 고위 인사임을 인증해주는 직인, 부족민들에게 나누어줄 각종 로마산 선물과 줄줄이 붙은 호위병을 대동하고 온 유력자 자녀를 게르만 족이라면 너도나도 부러워하였다. 그래서 아무래도 부족 내 영향력이나 발언권이 강한 상류층에서부터 반로마 감정이 무뎌질 수밖에 없었다.[* [[동맹시 전쟁]] 직후 이탈리아 자체가 로마를 수도로 하여 해외 식민지를 거느리는 '본국'으로 완전히 자리매김하기 이전, 라틴/이탈리아 동맹시들에서도 이와 같은 과정으로 상류층들은 로마에 포섭되어 친로마 성향이었던 반면, 로마가 각지에서 벌이고 다니는 전쟁에 그저 끌려다니던(작전권, [[군령권]], 외교관계 등은 동맹시에 전혀 없었고 로마가 독점했다) 일반인들은 반로마 성향이 제법 있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자기 자녀가 다니는 회사가 잘못되길 바라는 부모는 없다. 그 회사가 복지나 위신을 세워준다면 더더욱. 물론 이는 꼭 게르만족들에게만 한 정책은 아니고, [[유대인]]이나, [[켈트족]], [[아랍인]] 등의 여러 비(非) [[라틴]]계, 비 [[그리스]]계 민족들에게 두루두루 실행된 정책이었으므로, 로마 제국의 역사에는 이 정책의 혜택을 받고 출세하여 로마에 충성한 이민족 출신자에 대한 기록이 무수히 나온다. 유대인 출신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서부터, 게르만족의 일파인 [[반달족]]의 피가 반쯤 섞인 [[플라비우스 스틸리코]], 시대를 잘 타서 아예 황제로 즉위하기까지 한 아랍인 장군 [[필리푸스 아라부스]] 등, 그 수가 매우 많다. 먼 훗날 서로마가 멸망한 후 동로마 시대에는 심지어 게르만족(고트족) 출신 로마 황제도 [[티베리오스 3세|1명 나왔다.]] 용병이 정말로 문제를 일으키게 되는 건 로마 제국의 재정이 엄청나게 취약해져 로마군 중 부족 단위로 편제되어 싸우는 단위들이 많아져 버렸기 때문이지, 게르만족 자체가 원인이 아니다. 오히려 지속적으로 제국에 인력을 공급해주고 제국을 경모했던 게르만족이 아니었더라면, 제국의 서부 경계는 이미 3세기에 붕괴했을 것이 분명하다.[* 애초에 게르만족이 없으면 제국의 서부 경계가 위험할 이유 따윈 없었을 거라는 얘긴 근거가 없다. 이런 말이 실제로 가능하려면 게르마니아에서 게르만족이 없어진 뒤 게르마니아가 무인지경으로 남아있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게르마니아 같은 거대한 땅덩어리가 무인지경으로 남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게르만족이 없어졌다면 그 자리에 슬라브족이나 훈족 같은 또다른 야만인들이 빈 땅을 채웠을 수밖에 없다. 그러면 로마를 멸망시킨 건 게르만족이 아니라 슬라브족이나 훈족이 되었을 것이다.그리고 게르마니아의 모든 게르만족들이 로마 제국에 적대적인 것은 아니었으며 로마 제국에 우호적인 부족들도 많았다. 후기에 게르만족들의 침입을 격퇴하는 데 자국 내 게르만족의 공이 매우 컸다.] 즉, 처음에 게르만족이 로마에 들어왔을 때는 "내 밥그릇"이 아니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세월이 지나면서 게르만족이 로마에 정착해 군역도 하고 농경도 하며 살아가는 사이 게르만=로마, 다시 말해 게르만족 입장에선 "내 밥그릇"이 된 셈이다. 상식적으로 봐도 내 것이 아니라면 빼앗으려 들거나 아니면 그게 망하거나 말거나 나한테 피해 없다면 내버려두고 말지만 그게 곧 내 것이 된다면 더더욱 애착을 가지게 되어 관리하려고 들게 된다. 이것과 마찬가지인 상식적 논리이다. 그런데 게르만족이 이제 자기와 동일시된 로마 제국을 즉, 자기 밥그릇을 지키지 않고 망하게 내버려 두었겠는가? 게르만족 입장에서 로마 제국이란 맨 처음 이주해 들어갈 당시 초창기에는 남의 나라였겠지만 시간이 지나 이젠 지켜야 될 나의 조국, 내 나라가 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라틴족으로 구성된 군단병들이 라틴족에서 게르만족으로 변화되면서 엄격한 기강과 국가에 충성을 보이는 집단이 아니게 되었다는 건 "전통적인 해석"이 아니라 그냥 "틀린 얘기"다. 군단병의 구성 다수가 "이탈리아인"이 아니게 된 시기는 이미 2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며, 부족 단위로 고용되는 게르만족이 무시할 수 없게 통제 불가능이 되는 건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 이후에서부터의 일이다. 후기 로마군의 전술 변화는 게르만족이 로마군의 주력취급을 받으면서 로마인들 특유의 편제에 따른 세심한 전술적 움직임을 보이기가 어려운 게 결코 아니라, 역으로 "로마군 특유의 편제에 따른 세심한 전술적 움직임"을 게르만족이 보여줬고, 이에 대한 대응 때문에 이뤄진 것이다. 게르만족이 야만적이고 무식해서가 아니다. 사치에 퇴폐에 빠져 서로마가 게르만족 용병들을 쓰다가 무너졌다는 것은 건전하지 못한 오류로, 역사와는 무관한 얘기다. 이 시기 게르만족에 대해 다룬 책으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와 [[타키투스|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의 [[게르만족의 기원과 위치]]가 있다. 갈리아 전기에 따르면 재미있는 게르만의 풍습이 하나 나오는데, '''전사의 키와 힘이 [[동정]]을 유지하는 기간에 비례해서 커진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일찍 잃는 것을 수치스러워하기도 했고, 성경험이 늦을수록 자랑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진지하게 부연하자면, [[성조숙증|유전이나 섭식상의 이유로 2차 성징이 빨리 나오면]] 성장판이 일찍 닫히는 경향이 있기는 하다. 그리고 동정을 지키는 것 내지 성관계를 하지 않는 것과 힘 또는 집단이 높이 평가하는 성질을 습득하는 것이 관계 있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통해 찾기 어렵지 않다.] 그들 사이에서는 '''[[마법사|가장 오래 동정을 지킨 자가 가장 큰 칭찬을 받았다]]'''(...). ~~[[토이토부르크 전투|토이토부르크]] 승리의 비결~~ --대마법사, 대현자-- 이런 풍습은 [[켈트족]]에게도 있어서 동정인 사람을 우대했다고 한다. 한편, 서로마 각지에 정착하고 나서도 6세기의 게르만 왕국들은 로마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독립하지 못한 상황이라 주화, 직함 등을 완전히 독자적으로 사용하지 못한 채 제국의 권위를 일정 부분 빌렸었다. 이 정도가 가장 약했던, 즉 반대로 독립성이 가장 강했던 것은 [[반달 왕국]]이었는데, 동서로마와의 전투에서 여러 번 이겼으며(특히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Cape_Bon_(468)|468년의 소위 Cape Bon 전투]]에서 1천 척도 넘는 동서로마 합동 해군을 꺾었던 승리가 결정적이었다.) 또한 바다 건너 아프리카에 있어서 콘스탄티노플과 가장 물리적으로 멀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반면 이탈리아 및 달마티아의 [[오도아케르]] 정권 및 [[동고트 왕국]]은 그 반대였는데, 구 서로마의 중심지라 현지의 구 서로마인들의 영향력이 다른 곳보다 더욱 강했고, 또한 게르만 국가들 중 가장 콘스탄티노플과 물리적으로 가까웠던 탓에 동로마 정부의 비위를 완전히 거스르기 힘들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동로마와의 결전이 임박했거나 혹은 이미 전쟁 중이었던 때 대하는 태도를 보면 차이가 확 드러난다. 반달의 [[겔리메르]]는 유스티니아누스로부터 폐위된 힐데릭을 복위시키거나 아니면 콘스탄티노플로 보내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둘 다 거절하며 유스티니아누스에게 보내는 서신에 '이것은 우리 내부의 문제다. 군주라면 누구나 자기 일에 신경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라고 항변하여 당신이나 나나 같은 군주라는 독자의식을 드러냈으나, 동고트의 [[토틸라]]와 테이아는 전쟁 중인 상황에서도, (차마 당장 침략해온 적군의 수괴(...)인 유스티니아누스의 명의로 주화를 발행할 수는 없으니) 명목상으로 제국의 산하 종족 혹은 세력으로서 조약/동맹(foedus)을 제국과 최초로 맺었던, 즉 동고트 왕국이 세워지던 493년 당시의 황제인 [[아나스타시우스 1세]]를 주화에 꼬박꼬박 넣어서 발행했다. [* [[움베르토 에코]] 편저 중세 I의 60p에는 ''왕국들'은 곧 자국의 화폐를 주조하기 시작하지만 황제의 이름으로 그렇게 했다. 제국과 갈등을 빚을 때에도 왕의 이름을 동전에 넣지 않았으며, 기껏해야 현재의 제국 통치자를 과거의 통치자로, 예를 들어 최초로 '포이두스'(foedus)를 맺었던 황제의 이름으로 대체했다. 동고트 왕국의 토틸라와 테이아가[* 모두 이 전쟁기의 왕들이다.] 아나스타시우스의 이름으로 대체한 솔리두스 금화가 바로 그러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