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견신검 (문단 편집) === 후기 === 한편 고려로 귀순했던 견훤은 고려 조정으로부터 '상보(尙父)' [[호칭]]과 많은 [[식읍]]을 받는 등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고려의 왕건이 귀순해 온 견훤을 이용해 후백제를 완전히 무너뜨릴 계획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 그러나 자신이 직접 나서 군사를 일으키면 투항해 온 견훤 및 후백제 출신들에게 불만 및 반발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견훤이 직접 요청을 할 때를 기다려왔다.] 이듬해인 936년 견훤은 마침내 왕건에게 군사를 일으켜서 후백제를 치고 역모를 저지른 견신검을 벌해줄 것을 강력히 청했으며 왕건은 이에 호응하여 936년 9월 견훤과 말머리를 나란히 하여 후백제를 공격해 들어갔다. 견신검 역시 이에 맞서 군사를 이끌고 나가 일리천[* 오늘날의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을 사이에 두고 고려군과 대치했는데 이리하여 [[후삼국시대]]를 종결지은 [[일리천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후백제군의 사기는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바닥을 치고 있었는데 한때 자신들이 모시던 왕인 견훤이 적군의 선봉에 서있는 모습에 충격을 받기도 했거니와 왕건이 이끌고 온 10만 대군의 위세가 엄청났기 때문이며 결정타로 자기들의 왕이 "후백제의 [[충신]]들은 반역자를 버리고 나에게 돌아오라!"라고 외치니 이미 끝난 게임이나 다름없었다. 후백제군의 좌장군 효봉을 비롯해 덕술, [[애술]], [[명길]] 등은 아예 싸워보지도 않고 견훤의 앞으로 나아가 무기를 버리고 고려군에 투항했다. 좌장군 지위에 있던 인물이 투항함으로서 후백제군의 한축이 뚫려 중군이 노출되었고 투항한 효봉 등은 견신검이 후백제군의 중군에서 지휘를 하고 있다는 군사 기밀까지 털어놓았으며 견훤의 사위 박영규는 전투가 벌어지자마자 고려군에 내응하기로 약속까지 해둔 상황이었다. 이에 왕건은 [[강공훤]]을 시켜 견신검이 지휘하는 중군을 집중 공격했으며 중군이 무너져내리자 나머지도 저절로 붕괴되어 후백제군은 결국 참패를 면치 못했다. 이후 견신검은 두 아우인 견양검과 견용검, [[장군]]인 [[부달]], 소달, 능환 등과 함께 황산[* 공교롭게도 과거에 [[백제]]의 장군인 [[계백]]이 최후의 일전을 벌였던 [[황산벌]]과 같은 곳이다.]에서 고려군에게 항복하였다. 이로써 후백제는 멸망하고 말았는데 견신검이 쿠데타를 일으킨지 1년 남짓한 시간이 흐른 후였다. 왕건은 쿠데타의 주모자 중 하나였던 능환이 견신검 등을 꼬드겨 패륜을 저지르게 했다 하여 그 죄를 물어 능환을 곧바로 처형시켰으며 견신검의 두 아우였던 견양검과 견용검 등도 [[진주시|진주]]로 [[유배]]보냈고 몇 년 후 같은 죄목으로 처형했으나 정작 왕건은 쿠데타의 중심 인물이었던 견신검에게는 벌을 내리지 않았다. 견신검이 아버지를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한 것은 자신의 뜻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압박으로 인한 것이며[* 이 말은 한 국가의 왕이었던 견신검을 죽이기는 부담스러웠던 까닭에 견신검을 살릴 구실을 만들기 위해서 한 말이지 정말로 견신검이 자기는 왕위에 뜻이 없는데 다른 사람들의 억지로 왕이 된 것은 아니다. 다만 현재 학계에서는 신검은 능환과 호족들이 내새운 일종의 바지사장이었다는 의견도 있는 편.] 견신검이 스스로 항복해 벌을 줄 것을 청하니 비록 죽을 죄이나 용서해주겠다는 것이었는데 견신검은 오히려 왕건으로부터 [[관직]]을 하사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