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복궁 (문단 편집) == 개요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TKLdb8Q9rZ8)]}}} || || {{{#gold '''하늘에서 바라본 경복궁 영상'''}}} || >'''《시경(詩經)》 주아(周雅)에 있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는 영원토록 그대의 크나큰 복(景福)을 모시리라.’라는 시(詩)를 외우고, 새 궁궐을 경복궁(景福宮)이라고 이름 짓기를 청하오니, 전하와 자손께서 만년 태평의 업(業)을 누리시옵고, 사방의 신민으로 하여금 길이 보고 느끼게 하옵니다.''' >---- > [[정도전]], 《[[태조실록]]》 8권, [[태조(조선)|태조]] 4년(1395년) 10월 7일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410007_002|정유 2번째기사]] 中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서울)|사직로]] 161 ([[세종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번지 일대]에 있는 [[조선]]시대의 [[조선의 궁궐|궁궐]] 중 하나이자 조선의 [[법궁|정궁(법궁)]]이다. [[대한민국의 사적|사적]] 제117호로 지정받았다. [[태조(조선)|태조]]가 조선을 건국하고 한양 천도를 단행[* 천도하기 전에는 [[개성시|개성]] [[수창궁]]에서 기거했고, 천도한 뒤 경복궁이 다 지어지기 전까지는 한양부 객사를 임시 궁궐로 사용했다.]하면서 조선 시대에 가장 먼저 지은 궁궐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275년간[* 대중성에 비해 다른 궁궐보다 생각보다 역사가 그렇게 길지 않다. [[창덕궁]]이 훨씬 더 긴 시간 동안 조선의 정궁으로 사용되었고 원형 보존성도 이쪽이 더 높다. 게다가 경복궁은 19세기에 와서 아예 새로 지은 것이다. ] 방치되다가 19세기에 [[흥선대원군]] 주도로 중건되었다. 당시에는 7천여 칸이라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건축물로 거듭났었지만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수천 칸의 전각이 헐리고 매각되며 [[조선총독부 청사]]와 같은 다른 건물이 들어서는 등 궐내가 크게 훼손되었다. 1990년에 이르러서는 고작 36동의 건물([[고종(대한제국)|고종]] 재위 당시의 7% 수준)만 남았고 지금도 계속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다만 사라진 전각들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여 최근 복원한 전각들도 원형이라는 보장은 없으며, 후일에도 완전한 경복궁의 모습을 볼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