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부고속도로 (문단 편집) === 공사 === 고속도로 공사가 처음이다 보니 재원 조달에 앞서 도대체 얼마의 건설 예산이 필요한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그나마 공신력이 있어 보이는 곳들에 예산안을 내놓게 했는데, 건설부가 650억 원(후에 450억으로 재조정), [[현대건설]]이 380억 원(혹은 280억 원[* 국가기록원에서는 이쪽을 기록했다.]), 육군 공병감실 490억 원, 경제기획원 '''[[기권]]''', [[서울특별시]] 180억 원이었다.[* 이렇게 낮았던 것은 '''시내 도로'''를 건설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산출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주영]] 회장 자서전('이 땅에 태어나서')에도 언급된 내용이다. 당시엔 김포가도(현재 [[공항대로]])를 '한국 최초의 고속도로'라고 부르는 수준이었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6081500329212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66-08-15&officeId=00032&pageNo=12&printNo=6410&publishType=00020|#]]] 최종안은 아무래도 해외 고속도로 공사 경험도 있는 현대건설의 안에 가까운 '''330억 원'''으로 결정되었다. 실제 비용은 이보다 100억 원 더 추가한 '''430억 원'''이었다.[[https://theme.archives.go.kr/next/gyeongbu/roadStatistics02.do|#]] [* 이때 비화로 청와대에서 km당 들어갈 예산을 짜 보라고 명령을 내렸는데, 건설부는 9억, 공병감실은 7억을 써냈다. 당연히 청와대에서는 왜 이렇게 비싸냐며 노발대발했는데 이때 현대의 정주영 회장이 km당 '''1억'''에 해보겠다고 말해서 그것을 기준으로 예산을 짰다. 사실 이는 현대가 엄청 적게 부른 것이다. 한 마디로 이 공사는 대놓고 기업들에게 적자 사업이었다. 그 결과, 같이 참여한 다른 시공사들도 최고 큰형님 격인 현대가 1억을 불렀는데 자신들이 더 높게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라 울며 겨자 먹기로 저 예산에 맞춰 공사를 해야 했다. 현대나 동아같이 덩치가 있는 기업들은 어떻게든 버텼지만 그보다 작은 기업들은 결국 도산해 버리는 일이 속출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big_road_photo04_5.jpg|width=100%]]}}}|| || 우여곡절 끝에 준공된 경부고속도로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101_b040.jpg|width=100%]]}}}|| || 준공된 경부고속도로에 술을 뿌리는 박정희 전 대통령 || 어쨌거나 많은 반대와 우려를 무릅쓰고 경부고속도로는 건설되었다. 과거 정권의 치적 중에서도 유독 자주 거론되는 편인데, 이는 그 시기 개발 정책을 대표하는 기념비적인 구조물로서 단순한 고속도로 이상의 의미를 가졌던 까닭이다. [[경인고속도로|먼저 완공된 고속도로]]가 [[인천광역시|인천]]과 [[서울특별시|서울]]을 연결하는 정도였던 것에 반해, 국토를 종으로 꿰뚫는 한국의 대동맥이자 고속버스 탄생과 함께 전국을 반나절 생활권으로 만듦으로써 한반도를 심리적으로 가깝게 해 주었다. 그래서인지 [[강준만]]은 <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에서 [[전태일]]과 함께 '1970년대를 상징하는 두 가지 중 하나'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전태일이 1970년대 산업화의 '암(暗)'이라면 경부고속도로는 '명(明)'을 상징하는 것이다. 공사 중 희생된 사람들은 공식으로 77명[* 2018년에 이 77명을 위한 뮤지컬을 만들었는데 제목은 '''77인의 영웅'''이다.], 비공식적으로는 수백 명이다. 건국 이래 최대 건설 사업이었던 만큼 희생자가 많았다.[* 원래대로라면 '''16년'''이 걸렸어야 할 공사를 '''29개월'''만에 끝냈다. 정말 16년이 걸렸더라면 1983~1984년경에 개통했을 것이었다.] 이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위령탑이 충청북도 옥천군 [[금강휴게소]] 부근에 있는데, 이는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청주)|옥산면]]에서 옥천군 [[청성면]] 묘금리까지 이어지는 대전공구 70 km 구간이 대표적인 난공사 구간이었으며, 특히 아래에도 언급될 당재터널(現 [[옥천터널]]) 구간 역시나 이 근방에 위치해서였다. 이 구간에 있는 영동터널은 아직도 옛 토목 기술을 느낄 수 있고 내부에 요철이 있다. 현재는 확장 이설로 인해 더이상 고속도로로 쓰이지는 않으나, 폐쇄를 거쳐 지금도 마을 진입로와 국도 진입로를 서로 연결하여 일부만이긴 해도 통행이 가능해 직접 당시의 자취를 느껴볼 수 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big_road_travel05_3.jpg|width=100%]]}}}|| || 당재터널(現 [[옥천터널]]) || 옥천군 [[금강휴게소]] 동남쪽 3 km 지점에 있는 당재터널 구간은 '''난공사 중 난공사'''였다. 해당 지역이 절암토사로 된 퇴적층이었기 때문인데, [[발파]] 작업을 하면 토사가 무너져 내리기 일쑤였다. 처음 20 m 정도 파고들어갔을 때는 낙반 사고로 3명이 숨지고 1명이 중상을 입었다. 지금이야 이 정도 터널은 어렵지 않게 뚫을 수 있지만 당시의 토목 기술로는 한계가 있었다. 인근 주민들이 신령이 깃들었다고 믿고 있던 [[느티나무]]를 벤 군 책임자가 사고를 당하자 많은 작업자들이 일당의 몇 배를 더 주겠다는 시공사측 제안에도 불구하고 도망치기도 했을 정도로 마의 구간이었다. 결국 시공사인 [[현대건설]]이 흑자를 포기하고 공기를 맞추기 위해 20배나 빨리 굳는 데다 서너 배 튼튼하기까지 한 조강시멘트[* 고급시멘트, 한국에서 생산하는 곳은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쌍용C&E|쌍용양회]] 단 한 곳'''이다. 그리고 조강시멘트는 사용 물량이 많지 않으므로 주문을 받아서만 생산하며, 일반 시멘트보다 몇 배로 가격이 비싸다. 단 이때는 현대시멘트 단양공장(후일 [[한일시멘트]]에서 인수)에서 생산했다. 조강시멘트를 생산하려면 기존의 시멘트 제조공정을 중단하고 청소하는 등 준비기간만 2주가 걸린다. 제조사가 현대그룹 계열사였던 덕분에 빠른 생산이 가능했다.]를 현장에 전격 투입하는 한편 인부를 세 배로 증원해 공사 속도를 올려서[* 일반 시멘트가 타설 후 일주일 뒤 발파를 진행할 수 있다면 조강시멘트는 12시간 뒤 발파가 가능하다.][* "주판을 엎고서 공사를 하자"며 일반 [[시멘트]]보다 가격이 3배 이상인 조강시멘트 투입을 제안한 당시 현장소장이었던 고려산업개발 양봉웅 회장의 의견을 정주영이 과감히 수용한 것이었다. 현대시멘트에게 조강시멘트를 주문하자 자기들은 생산만 해도 되냐고 되물었다 한다. 이는 운송은 현대건설이 해 줄 것이냐는 뜻이었다. 당시는 화물 운송에 [[화차(철도)|화차]]를 사용했던 까닭이다. 황급히 여기저기 알아봐도 화차를 쓸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자 건설현장에서 쓰던 트럭을 불러서 단양에서 옥천까지 시멘트를 운송했다고 한다. 현대시멘트가 운송까지 해야 했다면 돈이 문제가 아니라 불가능하다고 주문을 거절했을 것이다.] 개통 예정일 '''이틀 전에''' 겨우 완공했다. 정말 기적과도 같은 공사였으며, 정주영이 조강시멘트 사용을 과감히 결정하지 않았다면 절대 개통 예정일에 맞추어 완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영웅시대]] 드라마에서도 언급되는 내용이다. 이 때 주판을 엎자고 한 양봉웅의 코멘트도 그대로 대사로 나왔고 심지어 공사 속도가 상당히 진척되자 대놓고 개통식 준비하라는 말까지 하는 배포를 보여주었다.] 그렇게 어렵게 뚫었던 당재터널은 중간에 옥천터널로 이름이 바뀌며 30년 넘게 경부고속도로 구간으로 활약했다. 아치형 터널로 경부고속도로를 한 번이라도 이용해 본 사람에게는 가장 인상 깊게 기억에 남는 구간 중 하나다. 2002년 선형 개량 구간의 개통과 함께 옥천터널은 고속도로 구간에서 해제되었다. 현재 옥천터널 하행선은 지방도인 금강로의 터널로 활용 중이고, 끝에 아치 구조물이 함께하는 상행선은 사시사철 습도와 온도 변화가 크지 않고 안정적인 터널 특성을 이용하여 전세계 최대 크기의 터널 기반 스마트 팜으로 사용중이고, 상행선에서 영화 '[[터널(영화)|터널]]'[* 버려진 터널 입구를 꾸며 작중 등장하는 하도터널 입구와 그 앞에 설치된 구조본부를 구현했다.]을 촬영하기도 했다. 1970년대 당시 기술로 지어진 도로인지라 터널을 최소화하는 구간으로 건설되었다. 국토의 대동맥으로 불리는 가장 긴 노선에 구간 내 가장 긴 터널이 1.6 km인 옥천3터널일 정도로 터널의 길이가 짧다. 그나마 이 터널도 선형 개량으로 21세기인 2003년에 뚫린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산지를 최대한 피할 수 있는 구간으로 건설된 것이 주효한 것은 사실이다. 지금이야 터널 기술의 발달로 이정도는 수월하게 뚫겠지만 그 당시에는 터널을 피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피해서 짓는게 최고이자 최선의 방법이었다. 21세기 이후에 건설되는 고속도로는 건설공법의 발전 덕분에 충분한 터널과 다리를 놓아 가면서 [[유령정체]]를 유발할 수 있는 고저차를 최대한 없애고 직선화하여 건설하는 경우가 많이 늘었다. 경부고속도로도 21세기부터는 [[경부동탄터널]]을 필두로 현대적 공법을 최대한 도입하여 서울-수도권 일대 상당구간을 지하화하는 방식으로 지하 터널화가 진행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