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성제국대학 (문단 편집) === 인적 교체 === [[광복]] 후 [[일본인]] 교수들이 모두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자연스럽게 거의 대부분의 교수진이 공석이 되었다. 거의 대부분이 [[도쿄대학|도쿄제국대학]] 출신이고 일부 [[교토대학|교토제국대학]] 출신 소수가 있었던 경성제대의 일본인 교수들이 일본으로 돌아가고 나서[* 경성제국대학의 모든 일본인 교수는 해방 후 사실상 업무를 중단했고 그해 10월 내지 11월까지 공식적으로 미군정에 의하여 퇴출되었다. 한편 조선인 교수들이 9월부터 채워지기 시작했다. 의학부의 경우 윤일선(훗날 서울대학교 총장을 지냄.)의 경우 와 같이 경성제국대학과 그 부속병원의 조선인 조수들이 교수직을 물려받은 경향이 짙었다.] 이들의 자리는 대부분 여러 [[제국대학]] 출신 조선인들로 채워졌으며 제도적으로도 미국식 학제로 바뀌었다. 1945년 10월 미군정은 경성대학의 총장과 학부장을 임명하여 학부 수업을 재개했는데, 이에 앞서 9월부터 미군정 학무국은 [[유진오]], [[조윤제(1904)|조윤제]], [[백낙준]], [[백남운]], [[이병도]] 5인으로 하여금 교수 인선을 담당하게 하여[* .[[https://www.google.co.kr/url?sa=t&source=web&rct=j&url=http://165.132.79.212/kje/archive/vol21/no2/kje_21_2_1.pdf&ved=2ahUKEwiY0f6Nis3tAhWyyosBHfCoBFA4ChAWMAF6BAgJEAE&usg=AOvVaw2M3OEkSEi85k4_PtBkPJKu|해방 전후 崔虎鎭의 학문세계와 학술활동]] 참조] 12월에 한국학자 27명을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 조교수로 임명하였다. 군정장관 아놀드 소장 명의로 1945년 12월 24일부 발령된 미군정청 임명사령 제56호에 따르면 법문학부의 교수진은 다음과 같았다. [[유진오]](헌법), 서재원[* 일제강점기 판사였던 서광설 변호사의 아들로, 1931년 경성제대 예과 8회를 입학 수료하고, 1936년 법문학부를 제8회로 졸업하고 1937년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으나 판검사나 변호사의 길을 가지 않고 경성제대 연구실에서 학문의 길을 지속했다. 6.25 전쟁 당시 아버지와 함께 납북당함.](민법), 윤동직[* 1932년 경성제대 예과를 9회로 입학 수료하고 경성제대 법문학부 법학과를 1937년 졸업.](형법), 이태진(행정법), 이종갑[* 1912년 출생, 대구농림학교, 1932년 경성제대 예과를 9회로 입학 수료하고 경성제대 법문학부 법학과를 1937년 졸업하고 1941년 [[고등문관시험]] 사법과 합격. 경성제대에서 [[홍진기]]와 더불어 유이하게 재학 중 경성제대 발행 학술지에 논문이 실린 학생이었다고 하며([[홍진기]] 항목 참조), 경성콤그룹에서도 활동했다고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33240|한다]].](상법),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8593|김갑수]](국제사법), 윤행중[* 아래 박극채와 유사하게 [[교토대학|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 졸업 후 보성전문학교 교수를 거쳐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로 근무하다 북한의 모시기 공작으로 월북하여 김일성종합대학 교수, 경제법학연구소장 등을 역임](경제학), 최호진[* [[보성전문학교]] 교수 시절 [[유진오]]의 애제자로 [[규슈대학|규슈제국대학]] 법문학부 졸업. [[https://www.google.co.kr/url?sa=t&source=web&rct=j&url=http://165.132.79.212/kje/archive/vol21/no2/kje_21_2_1.pdf&ved=2ahUKEwiY0f6Nis3tAhWyyosBHfCoBFA4ChAWMAF6BAgJEAE&usg=AOvVaw2M3OEkSEi85k4_PtBkPJKu|해방 전후 崔虎鎭의 학문세계와 학술활동]] 참조](경제사), [[백남운]](재정학), 박극채[* [[교토대학|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 졸업, 보성전문학교 교수를 거쳐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로 근무하다 북한의 모시기 공작에 넘어가 월북하여 1946년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로 부임.](화폐학), [[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newsis/201112/02/NISI20111202_0005537883_web.jpg|강정택]][* 1907년 울산 출신으로 울산공립보통학교, [[경북고|대구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구제고등학교#s-3.2|제1고등학교]]를 나와 [[도쿄대학|도쿄제국대학 농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 부수로 연구했다. 해방 후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 제2대 농림부 차관을 역임했으나 6.25 전쟁 때 납북당하고 말았다. [[http://m.ks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375641|기사]] 참조.](농업정책), 황도연[* [[교토대학|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만주 [[건국대학]] 교수로 있었다.] (통계학), [[이희승]](조선어학/문학), [[조윤제(1904)|조윤제]](조선문학), [[이숭녕]](조선문학), [[이양하]](영문학),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7637|최정우]](영문학),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5623|이인영]](조선사), [[이병도]](조선사), [[손진태]](조선사),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9340|김상기]](동양사), [[백낙준]](서양사), [[박종홍]](철학), [[안호상]](철학),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9028|김두헌]](윤리학), [[이상백]](사회학), 이본녕[* 경북 경산 출신으로 1931년 대구사범학교에서 독서회 사건으로 퇴학당하고, 이후 대구 계성학교를 거쳐 경성제대 선과생으로 입학해 철학과를 1938년 졸업. 해방 직후부터 경성대학 심리학과 교수로 재임하다 6.25전쟁 당시 서울에서 후퇴하는 인민군을 따라 월북.](심리학) 등(법문학부장은 [[백낙준]] 겸임).[* 최호진,「경성대재건과 국대안파동의 와중에서」, 신동아, 1990.8, p.251] 이들 27명의 출신을 보면 [[경성제국대학]] 출신이 11명[* 유진오, 서재원, 윤동직, 이종갑, 김갑수, 이희승, 조윤제, 이숭녕, 이인영, 박종홍, 이본녕]으로 최다였고 [[도쿄대학|도쿄제대]] 4명[* 김두헌, 최정우, 이양하, 강정택], [[교토대학|교토제대]] 3명[* 박극채, 윤행중, 황도연], 규슈제대 1명[* 최호진] 등 제국대학 출신이 19명으로 70%였다. 법문학부 외의 다른 학부의 교원 목록은 밑의 명단 참조. |'''{{{+1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진 명단(1946년)}}}'''[* [[유진오]], [[김증한]] 회고 및 최종고 등을 통한 복원] {{{-1 (▲이전, ▼이후)}}}| '''직위''' || '''담당과목''' || '''성명''' || '''출신교''' || '''학위''' || '''주요 경력''' || || 학부장 ||-|| [[백낙준]] ||예일신학교[br][[파크 대학교]] 사학과||신학박사[br]문학사||▲ 연희전문 교수[br]▼ 문교부장관, [[대한민국 참의원|참의원]] 의장|| || 교수 ||헌법 및 행정법|| [[유진오]] ||경성제대 법학과||법학사||▲ 보성전문 교수[br]▼ 고려대 교수, 법제처장, 국회의원|| || 조교수 ||헌법 및 행정법|| 이태진 ||[[와세다대학|와세다대]] 법학부||법학사||▼ {{{#red 월북}}}|| || 교수 ||민법|| 서재원 ||경성제대 법학과||법학사||▲ [[고등문관시험|고문]] 사법과 합격. 변호사 개업. 보성전문 교수[br]▼ {{{#red 납북}}}|| || 조교수 ||민법|| 김봉관 ||경성제대 법학과||법학사||▼ 농림부 차관보|| || 조교수 ||민법|| [[주재황]] ||경성제대 법학과||법학사||46년 임명[br]▲ [[고등문관시험|고문]] 사법과 합격[br]▼ 고려대 교수. 서울고검 검사. 대법관|| || 조교수 ||민법|| 조림행 ||[[주오대학]] 법학부||법학사||46년 임명[br]▲ [[고등문관시험|고문]] 사법과 합격[br]▼ 행방불명|| || 교수 ||형법|| 윤동직 ||경성제대 법학과||법학사||▲ [[고등문관시험|고문]] 사법과 합격[br]▼ 이종갑과 변호사 개업. 우익 괴한에게 납치, 사망|| || 교수 ||상법|| 이종갑 ||경성제대 법학과||법학사||▲ [[경성 콤그룹]] 연루. [[고등문관시험|고문]] 사법과 합격[br]▼ {{{#red 월북}}}|| || 조교수 ||상법|| 주유순 ||경성제대 법학과||법학사||46년 임명[br]▼ 서울법대 교수. 중앙대 교수. {{{#red 월북}}}|| || 교수 ||국제법|| [[김갑수(법조인)|김갑수]] ||경성제대 법학과||법학사||▲ [[고등문관시험|고문]] 사법과 합격. 총독부 법관[br]▼ 국회의원, 내무부차관, 대법관|| || 교수 ||정치학|| 정진태 ||경성제대 법학과||법학사||46년 임명[br]▲ 경성제대 조교[br]▼ 민전 활동. {{{#red 월북}}}|| || 조교수 ||정치학|| 최희범 ||만주 [[건국대학]] 정치학과||정치학사||46년 임명[br]▼ {{{#red 월북}}}|| || 조교수 ||정치학|| 전학연 ||[[도쿄대학|도쿄제대]] 정치학과||법학사||46년 임명[br]▼ {{{#red 월북}}} 추정|| || 교수 ||외교사|| [[신기석]] ||경성제대 법학과||법학사||46년 임명[br]▲ [[고등문관시험#만주국 고등문관시험|만주고문]] 합격. 만주국 사무관[br]▼ 서울문리대 교수, 부산대 총장, 국회의원|| || 교수 ||재정학|| [[백남운]] ||[[히토쓰바시대학|도쿄상대]]||상학사||▲ 연희전문 교수, 조선사정연구회 사건 연루 구속[br]▼ {{{#red 월북}}},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 || 교수 ||경제학|| 윤행중 ||[[교토대학|교토제대]] 경제학부||경제학사||▲ 보성전문 교수[br]▼ {{{#red 월북}}}, [[김일성종합대학|김일성대]] 교수. 숙청|| || 조교수 ||경제학|| 최호진 ||[[규슈대학|규슈제대]] 법문학부||경제학사||▼ 동국대, 연세대 교수|| || 교수 ||화폐론|| 박극채 ||교토제대 경제학부||경제학사||▲ 보성전문 교수[br]▼ {{{#red 월북}}}, 김일성대 교수. 숙청|| || 교수 ||농업정책|| 강정택 ||도쿄제대 농경제학과||경제학사||▼ 농림부차관, {{{#red 납북}}}|| || 교수 ||통계학|| 황도연 ||교토제대 경제학부||경제학사||▲ 만주 건국대학 교수[br]▼ {{{#red 월북}}}|| || 교수 ||조선어문학|| [[조윤제(1904)|조윤제]] ||경성제대 조선어문전공||문학사||▲ 경성사범 교원, 동성상업 등 강사[br]▼ 서울문리대 교수|| || 교수 ||조선어문학|| [[이희승]] ||경성제대 조선어문전공||문학사||▲ 이화여전 교수, 조선어학회 사건 연루 구속[br]▼ 서울문리대 교수|| || 조교수 ||조선어문학|| [[이숭녕]] ||경성제대 조선어문전공||문학사||▲ 평양사범 교원[br]▼ 서울문리대 교수|| || 교수 ||영문학|| [[이양하]] ||도쿄제대 영문학과||문학사||▲ 연희전문 교수[br]▼ 서울문리대 교수|| || 교수 ||영문학|| 최정우 ||도쿄제대 영문학과||문학사||▼ 외무부 조사국장, 동국대, 외대 교수|| || 교수 ||조선사|| [[손진태]] ||[[와세다대학|와세다대]] 사학과||문학사||▲ 민속학회 창설, 보성전문 교수[br]▼ 서울문리대 교수, {{{#red 납북}}}|| || 교수 ||조선사|| [[이병도]] ||와세다대 사학과||문학사||▲ 이화여전 강사, 조선사편수회 촉탁[br]▼ 서울문리대 교수|| || 조교수 ||조선사|| 이인영 ||경성제대 조선사전공||문학사||▲ 연희전문 강사[br]▼ 서울문리대 교수, {{{#red 납북}}}|| || 교수 ||동양사|| 김상기 ||와세다대 사학과||문학사||▲ 이화여전 강사[br]▼ 서울문리대 교수|| || 교수 ||철학|| [[안호상]] ||[[예나 대학교]] 철학과||철학박사[br]문학사||▲ 보성전문 교수[br]▼ 서울문리대 교수, 문교부장관|| || 교수 ||철학|| [[박종홍]] ||경성제대 철학전공||문학사||▲ 이화여전 교수[br]▼ 서울문리대 교수|| || 교수 ||윤리학|| 김두헌 ||도쿄제대 윤리학과||문학사||▲ 중앙불전 교수, 진단학회 발기인[br]▼ 서울문리대 교수, 숙대 총장|| || 조교수 ||심리학|| 이본녕 ||경성제대 심리학전공||문학사||▼ 서울문리대 교수, {{{#red 월북}}}|| || 조교수 ||사회학|| [[이상백]] ||와세다대 철학과||문학사||▼ 서울문리대 교수|| ^^[[:파일:1946_법문학부_교수진.png|출처 이미지]]^^ |'''{{{+1 경성대학 의학부 교수진 명단(1946년)}}}'''[* [[권이혁]] 회고를 통한 복원] {{{-1 (▲이전, ▼이후)}}}| '''직위''' || '''담당과목''' || '''성명''' || '''출신교''' || '''학위''' || '''주요 경력''' || || 교수 ||내과 제1강좌|| 이정복 ||경성제대 의학부||의학사||▼ 서울여의대 교수. {{{#red 납북}}}|| || 교수 ||내과 제2강좌|| 최응석 ||도쿄제대 의학부||의학박사[br]의학사||▼ {{{#red 월북}}}. 김일성대 교수|| || 교수 ||내과 제3강좌|| 이돈희 ||경성제대 의학부||의학박사[br]의학사||▼ 서울의대 교수|| || 조교수 ||내과|| 김경식 ||경성제대 의학부||의학박사[br]의학사||▼ 서울의대 교수|| || 조교수 ||내과|| [[한심석]] ||경성제대 의학부||의학박사[br]의학사||▼ 서울의대 교수, 서울대 총장|| || 조교수 ||내과|| 이윤응 ||경성제대 의학부||의학사||▼ 개업|| || 조교수 ||내과|| 오세헌 ||경성제대 의학부||의학박사[br]의학사||▼ 개업|| || 교수 ||방사선의학|| 이부현 ||경성제대 의학부||의학박사[br]의학사||▼ 서울의대 교수, {{{#red 월북}}}|| || 조교수 ||방사선의학|| 조중삼 ||경성제대 의학부||의학사||▲ 경성여의전 교수[br]▼ 서울의대 교수, 서울대병원장|| || 교수 ||병리학 제1강좌|| 이제구 ||경성제대 의학부||의학사||▼ 서울의대, 경희의대 교수|| || 학부장[br]교수 ||병리학 제2강좌|| [[윤일선]] ||교토제대 의학부||의학박사[br]의학사||▲ 세브란스의전 교수[br]▼ 서울의대 교수, 서울대 총장|| || 조교수 ||병리학|| 박우균 ||경성제대 의학부||의학사||▼ {{{#red 월북}}}|| || 조교수 ||병리학|| 정창수 ||경성약전|| ||▼ 마산고 교감|| || 교수 ||피부비뇨기과|| 최재위 ||경성제대 의학부||의학박사[br]의학사||▼ 서울의대 교수|| || 조교수 ||피부비뇨기과|| 박동일 ||경성제대 의학부||의학사||▼ 서울의대 교수|| || 교수 ||산부인과|| 김석환 ||경성제대 의학부||의학박사[br]의학사||▼ 서울의대 교수, 국립의료원장|| || 교수 ||생리학|| 이갑수 ||오카야마의전||의학박사[br](교토제대)||▲ 경성제대 강사|| || 교수 ||생리학|| 이종윤 ||경성의전||의학박사[br](경성제대)||▼ 전남의대 교수|| || 조교수 ||생리학|| 남기용 ||경성제대 의학부||의학사||▼ 서울의대 교수|| || 조교수 ||생리학|| 김봉한 ||경성제대 의학부||의학사||▼ {{{#red 월북}}}. 평양의대 교수|| || 교수 ||생화학|| 이기녕 ||경성의전|| ||▼ 서울의대 교수. 파리대학 이학박사 취득|| || 조교수 ||생화학|| 김철 ||경성제대 의학부||의학사||▼ 서울의대, 가톨릭의대 교수|| || 교수 ||미생물학|| 허규 ||경성제대 의학부||의학박사[br]의학사||▲ 경성여의전 교수[br]서울의대 교수. 전쟁 중 사망|| || 조교수 ||미생물학|| 박진영 ||경성제대 의학부||의학사||▼ 서울의대 교수|| || 교수 ||소아과|| 이병남 ||경성제대 의학부||의학박사[br]의학사||▼ 개업. {{{#red 월북}}}|| || 조교수 ||소아과|| 이국주 ||경성제대 의학부||의학박사[br]의학사||▼ 서울의대 교수|| || 교수 ||안과|| 윤봉헌 ||경성제대 의학부||의학사||▼ 서울의대 교수, 육군병원장|| || 조교수 ||안과|| 공인호 ||경성제대 의학부||의학사||▼ 서울의대 교수|| || 조교수 ||안과|| 윤원식 ||경성제대 의학부||의학사|| || || 교수 ||외과 제1강좌|| 문인주 ||경성제대 의학부||의학박사[br]의학사||▼ 서울의대 교수|| || 교수 ||외과 제2강좌|| 김성진 ||경성제대 의학부||의학박사[br]의학사||▼ 서울의대 교수, 보사부장관|| || 교수 ||외과 제2강좌|| 김시창 ||경성제대 의학부||의학박사[br]의학사||▼ 서울의대 교수, {{{#red 납북}}}|| || 조교수 ||외과|| 한격부 ||경성제대 의학부||의학사||▼ 개업|| || 조교수 ||외과|| 전성관 ||경성제대 의학부||의학사||▼ 서울의대 교수|| || 조교수 ||외과|| 박병수 ||경성제대 의학부||의학사||▼ {{{#red 월북}}}|| || 교수 ||위생학|| 최희영 ||경성제대 의학부||의학박사[br]의학사||▼ 서울의대 교수, {{{#red 월북}}}|| || 교수 ||이비인후과|| 한기택 ||경성제대 의학부||의학사||▼ 서울의대 교수|| || 조교수 ||이비인후과|| 우형직 ||경성제대 의학부||의학사||▼ {{{#red 월북}}}|| || 교수 ||정신과|| 명주완 ||경성제대 의학부||의학박사[br]의학사||▲ 개업[br]▼ 경성대학 부속병원장. 서울의대 교수, 의학협회장|| || 조교수 ||정신과|| 임문빈 ||경성제대 의학부||의학사||▼ {{{#red 월북}}}|| || 조교수 ||정신과|| 최재혁 ||경성제대 의학부||의학사||▼ 도일|| || 교수 ||치과|| 조호인 ||미상||미상|| || || 조교수 ||치과|| 방태우 ||미상||미상|| || || 조교수 ||치과|| 문동성 ||미상||미상|| || || 교수 ||해부학|| 나세진 ||경성제대 의학부||의학박사[br]의학사||▲ 경성여의전 교수[br]▼ 서울의대 교수|| || 조교수 ||해부학|| 이명복 ||경성제대 의학부||의학사||▲ 경성여의전 교수[br]▼ 서울의대 교수|| || 교수 ||약리학|| 이세규 ||경성제대 의학부||의학박사[br]의학사||▼ 보건부차관, 이화의대 교수|| || 교수 ||약리학[br]개성생약연구소|| 오진섭 ||경성제대 의학부||의학박사[br]의학사||▲ 경성여의전 강사[br]▼ 서울의대 교수|| || 조교수 ||약리학|| 서성중 ||경성제대 의학부||의학사||▼ 서울의대 교수|| || 조교수 ||약리학|| 최한웅 ||경성제대 의학부||의학사||[[최남선]]의 자[br]▼ 서울의대 교수|| || 조교수 ||약리학|| 이찬범 ||경성제대 의학부||의학사||▼ 서울의대 교수|| || 조교수 ||약리학[br]개성생약연구소|| 우인근 ||경성약전|| ||▼ 서울약대 교수|| ^^[[:파일:1946_의학부_교수진.png|출처 이미지]]^^ |'''{{{+1 경성대학 이공학부 교원 명단(1946년)}}}'''[* 잡지 현대과학 창간호] {{{-1 (▲이전, ▼이후)}}}| '''성명''' || '''연령''' || '''원적''' || '''전공''' || '''학력''' || '''학위''' || '''직급''' || '''주요 경력''' || || 김재을 || 37 || 전남 || 수학 ||연희전문학교 수물과[br]교토제국대학 수학과|| 이학사 || 교수 ||▼ {{{#red 월북}}} 후 김일성대 교수|| || 김지정 || 37 || 평남 || 수학 ||사가고등학교[br]도쿄제국대학 수학과|| 이학사 || 교수 ||▼ {{{#red 월북}}} 후 김일성대 교수|| || [[이임학]] || 25 || 함남 || 수학 ||경성제국대학 예과[br]경성제국대학 물리학과|| 이학사 || 조교수 ||▼ {{{#red 월북}}} 후 김일성대 교수,[br]재월남 후 서울문리대 교수, 캐나다 유학|| || 한필하 || 31 || 함남 || 수학 ||오사카제국대학 수학과|| 이학사 || 전임강사 ||▼ {{{#red 월북}}} 후 김일성대 교수,[br]재월남 후 고려대 교수|| || 유충호 || 27 || 경기 || 수학 ||제6고등학교[br]도쿄제국대학 수학과|| 이학사 || 전임강사 ||▼ {{{#red 월북}}}. 김일성대, 해주사대 교수|| || 박유봉 || 38 || 경기 || 수학 ||미상|| - || 조수(조교) ||▼ 미상|| || 박철재 || 42 || 경기 || 물리학 ||연희전문학교 수물과[br]교토제국대학 물리학과|| 이학사[br]이학박사[br](교토제대) || 교수 ||▲ 교토제대 강사[br]▼ 서울문리대 교수, 문교부 국장|| || [[도상록]] || 44 || 함남 || 물리학 ||제6고등학교[br]도쿄제국대학 물리학과|| 이학사 || 교수 ||▲ 만주 신징공대 교수[br]▼ {{{#red 월북}}} 후 김일성대 교수, 원자력연구소장|| || 한인석 || 38 || 경기 || 물리학 ||연희전문학교 수물과[br]도호쿠제국대학 물리학과|| 이학사 || 교수 ||▼ {{{#red 월북}}} 후 김일성대 교수|| || 정근 || 28 || 경기 || 물리학 ||경성고등공업학교 전기공학과[br]경성제국대학 물리학과|| 이학사 || 조교수 ||▼ {{{#red 월북}}} 후 김일성대 교수|| || [[전평수]] || 31 || 경북 || 물리학 ||홋카이도제국대학 예과[br]홋카이도제국대학 물리학과|| 이학사 || 조교수 ||▼ {{{#red 월북}}}|| || 김이문 || 34 || 전남 || 물리학 ||도쿄물리학교|| - || 조교수 ||▼ {{{#red 월북}}}|| || 김종철 || 29 || 경기 || 물리학 ||경성고등공업학교 응용화학과[br]경성제국대학 물리학과|| 이학사 || 전임강사 ||▼ 서울문리대 교수|| ||[[이태규]] || 45 || 충남 || 화학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br]교토제국대학 물리학과|| 이학사[br]이학박사[br](교토제대) || 교수 ||▲ 교토제대 교수[br]▼ 서울문리대 교수, 도미|| || 조광하 || 40 || 함남 || 화학 ||제6고등학교[br]도호쿠제국대학 화학과|| 이학사[br]이학박사[br](오사카제대) || 교수 ||▲ 오사카제대 강사[br]▼ 서울공대 교수|| || 최상업 || 25 || 평남 || 화학 ||제3고등학교[br]교토제국대학 화학과|| 이학사 || 전임강사 ||▼ 서울문리대 교수|| || 안법섭 || 25 || 전북 || 화학 ||교토제국대학 화학과|| 이학사 || 전임강사 ||▼ 미상|| || 김태열 || 25 || 함남 || 화학 ||후쿠오카고등학교[br]교토제국대학 화학과|| 이학사 || 전임강사 ||▼ {{{#red 월북}}}|| || 김준용 || 27 || 함남 || 화학 ||경성약학전문학교|| - || 조수(조교) ||▼ 미상|| || [[김종원(1900)|김종원]] || 48 || 경북 || 지질학[br]광산학 ||마쓰야마고등학교[br]도쿄제국대학 지질학과|| 이학사 || 교수 ||▲ 경성제대 교수(조선인 유일)[br]▼ 서울문리대 교수|| || [[손치무]] || 36 || 평남 || 지질학[br]광산학 ||우쓰노미야고등농림학교[br]홋카이도제국대학 지질광물학과|| 이학사 || 조교수 ||▼ 서울문리대 교수|| || 최평집 || 48 || 평북 || 지질학 ||연희전문학교 상과[br]홋카이도제국대학 지질광물학과|| 이학사 || 전임강사 ||▲ 조선총독부 식산국 기사[br]▼ 미상|| || 윤동석 || 30 || 경남 || 광산학 ||야마구치고등학교[br]도호쿠제국대학 금속공학과|| 공학사 || 조교수 ||▼ 서울공대 교수|| || 오정길 || 27 || 함남 || 광산학 ||경성광산전문학교 채광학과|| - || 조수(조교) ||▼ 남한 잔류|| || 문원주 || 43 || 경남 || 야금학 ||제2고등학교[br]교토제국대학 채광학과|| 공학사 || 교수 ||▼ 서울공대 교수|| || 최호영 || 41 || 함남 || 야금학 ||경성고등공업학교 응용화학과[br]규슈제국대학 야금학과|| 공학사 || 교수 ||▲ 경성제대 강사[br]▼ 서울공대 교수|| || 이재병 || 25 || 경기 || 야금학 ||경성제국대학 예과[br]경성제국대학 광산야금학과|| 공학사 || 전임강사 ||▼ {{{#red 월북}}}|| || 안명환 || 30 || 평남 || 야금학 ||아키타광산전문학교|| - || 조수(조교) ||▼ 미상|| || 소규흡 || 28 || 평북 || 야금학 ||대동공업전문학교 야금과|| - || 조수(조교) ||▼ 미상|| || 최경렬 || 40 || 평남 || 토목공학 ||사가고등학교[br]교토제국대학 토목공학과|| 공학사 || 교수 ||▲ 조선총독부 내무국 기사[br]▼ 내무부 건설국장, 서울부시장|| || 심윤섭 || 27 || 경기 || 토목공학 ||경성고등공업학교 토목학과|| - || 조교수 ||▲ 경성공전 교수[br]▼ 서울공대 교수, 경기공고 교장|| || 신영기 || 26 || 경기 || 토목공학 ||야마구치고등학교[br]도쿄제국대학 토목공학과|| 공학사 || 조교수 ||▼ 서울공대 교수|| || 서도원 || 31 || 충남 || 토목공학 ||경성제국대학 예과(중퇴)[br]제3고등학교[br]교토제국대학 토목공학과|| 공학사 || 조교수 ||▼ 미상|| || 정보영 || 25 || 경남 || 토목공학 ||경성제국대학 예과[br]경성제국대학 응용화학과|| 공학사 || 전임강사 ||▼ 롯데칠성 사장|| || 김봉집 || 54 || 평남 || 전기공학 ||와세다대학 전기공학과|| 공학사 || 교수 ||▲ 연희전문 교수[br]▼ {{{#red 월북}}}|| || 황갑성 || 37 || 충남 || 전기공학 ||후쿠오카고등학교[br]규슈제국대학 전기공학과|| 공학사 || 교수 ||▼ 체신부 전무국장, {{{#red 납북}}}|| || 이성준 || 34 || 충남 || 전기공학 ||연희전문학교 수물과[br]교토제국대학 전기공학과|| 공학사 || 교수 ||▼ {{{#red 월북}}}|| || 최창하 || 33 || 충북 || 전기공학 ||와세다대학 기계공학과|| 공학사 || 교수 ||▼ {{{#red 월북}}} 후 김일성대 교수|| || 최성세 || 32 || 평북 || 전기공학 ||사가고등학교[br]도쿄제국대학 전기공학과 || 공학사 || 교수 ||▼ {{{#red 월북}}} 후 북한 [[국가계획위원회|국가계획위]] 부위원장|| || 이한희 || 28 || 충북 || 전기공학 ||경성제국대학 예과[br]경성제국대학 전기공학과|| 공학사 || 교수 ||▼ {{{#red 월북}}} 후 북한 흥남공업대 교수|| || 이시현 || 31 || 평북 || 기계공학 ||제5고등학교[br]도쿄제국대학 기계공학과|| 공학사 || 교수 ||▼ 미상|| || 박영조 || 25 || 경남 || 기계공학 ||경성제국대학 예과[br]경성제국대학 기계공학과|| 공학사 || 전임강사 ||▼ 한양대 교수|| || 정기호 || 23 || 경북 || 기계공학 ||경성제국대학 예과[br]경성제국대학 기계공학과|| 공학사 || 전임강사 ||▼ 한양공대 교수, {{{#red 납북}}}|| || 윤창흠 || 28 || 평북 || 기계공학 ||요코하마전문학교|| - || 조수(조교) ||▼ 사립 정의여고 교장|| || 조휘영 || 34 || 함북 || 기계공학 ||도쿄부립고등기계학교(?)|| - || 조수(조교) ||▼ 남한 잔류|| || [[리승기|이승기]] || 41 || 전남 || 응용화학 ||마쓰야마고등학교[br]교토제국대학 공업화학과|| 공학사[br]공학박사[br](교토제대) || 교수 ||▲ 교토제대 강사[br]▼ {{{#red 월북}}} 후 북한 [[국가과학원]] 함흥분원장|| || [[김동일]] || 39 || 평남 || 응용화학 ||사가고등학교[br]도쿄제국대학 응용화학과|| 공학사 || 교수 ||▼ 서울공대 교수|| || 여경구 || 34 || 경기 || 응용화학 ||와세다대학 응용화학과|| 공학사 || 교수 ||▼ {{{#red 월북}}}, 북한 [[국가과학원]] 후보원사|| || 마형옥 || 29 || 함북 || 응용화학 ||다이호쿠제국대학 응용화학과|| 공학사 || 조교수 ||▼ {{{#red 월북}}} 후 북한 화학섬유연구소장|| || 김용호 || 31 || 경북 || 응용화학 ||도호쿠제국대학 화학과|| 공학사 || 조교수 ||▼ {{{#red 월북}}}, 김일성대 교수|| || 이세훈 || 26 || 경기 || 응용화학 ||제6고등학교[br]도쿄제국대학 응용화학과|| 공학사 || 조교수 ||▼ {{{#red 월북}}}|| || 류점수 || 30 || 충북 || 응용화학 ||도쿄물리학교|| - || 조수(조교) ||▼ 미상|| || 임호신 || 25 || 평북 || 응용화학 ||도쿄물리학교|| - || 조수(조교) ||▼ 미상|| ^^[[:파일:경성대학 이공학부(1946년).png|출처 이미지]]^^ 일본인 교수들이 돌아가면서 생긴 빈 자리를 조선인 교원들이 채운 것처럼, 경성제국대학 학부와 예과의 일본인 학생들이 귀국하면서 생긴 공석에는 [[도쿄제국대학]]을 비롯한 [[제국대학]], [[히토츠바시대학|도쿄상과대학]]과 [[츠쿠바대학|도쿄문리과대학]] 등의 [[관립대학]] 등 국외의 [[구제대학]]에 재학 중이던 대학생들과 [[구제고등학교]] 생도들을 편입생으로 받아 충원했다. 이렇게 해방 당시 국외 [[구제대학]] 및 [[구제고등학교]] 재학생들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오늘날 한국의 대학 [[편입학]]이 생기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1945년 말에는 경성대학 명의로 1946학년도 예과 신입생 모집을 실시하였다.[* 참고로 [[정원식]] 전 [[국무총리]]가 경성대학 예과 46학번이다.] 1946년 7월에는 경성대학 명의로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이들은 유일하게 경성제국대학도 서울대학교도 아닌 경성대학 출신이 되었다.[* 이때 졸업생으로 [[김명윤]], [[서돈각]], [[장하구]] 등이 있다.] 학생 측면에서 법문학부 문학과[* 舊 문학과, 사학과, 철학과]와 이공학부 이학계열(물리학과, 화학과)는 타 전문학교와 섞임 없이 순수하게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이 되면서 [[구제고등학교|경성제국대학 예과]]까지 포괄해 경성제대의 인적 구성이 명백하게 계승되었다.([[http://www.kps.or.kr/content/50years/html/kps20.htm|경성제대 물리학과의 해방 전후]] 참조) 반면 법문학부 법학과는 명목상 경성법학전문학교와 통합되어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구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 제1류 법학전공, 제2류 정치학전공, 제3류 경제학전공] 학생들이 [[제국대학]]인 경성제대와 [[구제대학]]도 아니로 [[구제전문학교]]에 불과했던 [[서울대학교/학부/법과대학#s-3.3|경성법학전문학교]]를 섞는 것은 자신들의 격을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격렬히 반대하면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소속으로의 학적 변경을 거부하고, 경성제국대학의 정통 계승이라 여겨지던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소속의 정치학과로 끝까지 남았다. 이 때문에 서울대학교에는 정치학과가 [[법과대학]]이 아니라 [[문리과대학]]에 소속되어 있었고, 그래서 초창기에는 문리과대학 정치학과에서 오히려 법과대학보다도 더 많은 [[사법고시]] 합격자가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출처: 서울대학교정치학과60년사] 결과적으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은 실질적으로 [[구제전문학교|경성법학전문학교]]를 모체로 출범하게 되었고, 경성제대 법문학부 법학과의 계승 자격을 주장하면서 청량리 경성법전 캠퍼스에서 동숭동 경성제대 캠퍼스로 이사를 시도했으나, 법문학부 캠퍼스를 계승하고 있던 정치학과 등 문리과대학 학생들에 의해 실력으로 저지당해 좌절되었고, 결국 법과대학은 동숭동캠퍼스 바로 옆에 있던 방송통신대학 자리로 이사하게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서울대학교/학부/법과대학#s-3.4|법과대학 이전 분쟁]] 참조. 이러한 연유로 다른 [[전문학교]]와 섞이지 않은 순수한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의 후신으로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은 서울대 중의 진짜 서울대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출처: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육십년사.] 그러나 법과대학이 경성제대와 완전히 무관한 것은 아니고, 극소수지만 법문학부로 진학이 예정되어있던 [[구제고등학교|경성제대 예과]]의 문과반 수료생 중에서도 상과대학 등 타 단과대학으로 간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http://sangdae.com/s5/s5_1.php|서울상대 총동창회 회보인 향상의탑]] 제165호(2018.12)에 실린 [[http://www.sangdae.com/webzine/2018-12-165/EBook.htm|정기준 명예교수의 회고]]에 따르면 1943년 10월 경성제대 입학생인 조영휘, 서우택, 송겸호, 최형규 등 4명이 경성경제전문학교의 후신으로 여겨지는 서울대 상과대학의 제1회 졸업생으로 졸업하였으며 1945년 4월 경성제대 최후 입학기수인 조철 역시 서울상대 제2회 졸업생으로 기록되어있다고 한다. 해방 이후 국대안 시행 이전까지 경성대학으로 입학한 학생들(대부분은 [[도쿄대학|도쿄제국대학]] 등 일본의 [[제국대학]] 재학생들) 중에서도 17명이 상과대학 소속으로 서울대학교를 졸업하였다고 한다. 또 각 단과대학의 초창기 교수진을 보면 경성제대 출신의 교수들이 있는데, 법학과 졸업생도 대부분은 문리과대학 정치학과로 출강했으나, [[김증한]](민법) 교수처럼 [[서울대학교 법과대학|법과대학]] 교수로 나아가 법대의 기틀을 세운 법학자들도 있으며 [[황산덕]](법철학) 교수처럼 문리대에서 가르치다 [[한국전쟁]] 이후 법대로 옮긴 학자들도 다수 있다.[* 각 단과대학들의 대학연합 수준이었던 초창기 서울대학교는 한국전쟁으로 부산에서 고려대 연세대 등 타 학교까지 전부 다 모여 수업을 받은 전시연합대학 시기를 거치며 단과대학간 인적 교류가 생겨났는데, 덕분인지 전후 문리과대학에 교양과정부를 설치해 모든 단과대학 신입생을 교육하게 하는 등 크게 재편되며 차차 종합대학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는 그 자체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이 되면서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의학부보다 하위인 [[구제전문학교]]급의 '[[전문부]]'로 흡수하였고,[* 이는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체제로 대다수 제국대학이 [[의학전문학교]]를 모체로 삼아 제국대학으로 승격되었는데, 제국대학에 의학부를 설치하면서 기존의 의학전문학교는 의과대학 부속 [[전문부]]([[구제전문학교]]에 상당)로 흡수하였다. 일본어 위키백과 [[https://ja.m.wikipedia.org/wiki/%E5%B8%9D%E5%9B%BD%E5%A4%A7%E5%AD%A6|제국대학]] 항목을 참조하면 종전 당시 제국대학들은 경성제대를 제외하고 8곳 모두 예외없이 부속 의학[[전문부]]를 두고 있었다. 이외에 [[규슈대학|규슈제대]]는 공학[[전문부]], [[홋카이도대학|홋카이도제대]]에는 농림[[전문부]]와 토목[[전문부]] 등이 존재했다.][* 대만의 [[다이호쿠제국대학]] 역시 1936년 의학부를 설치할 때 흡수한 [[대만총독부]] 다이호쿠의학전문학교를 1945년 종전때까지 부속 의학[[전문부]]로 두고 있었다.] 당연히 경성제대 의학부와 [[경성의전]]을 통합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은 경성제대 의학부 출신들에게 의해 장악되었다.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들은 [[전문부]]로 [[편입]]되어 경성제대 의학부 학생과 같은 '의학사' 학위를 받지 못했으며, 경성제대 부속병원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제1부속병원으로 메인병원으로 기능한 데에 반해, 경성의전 부속병원은 서울대 제2부속병원이 되며 찬밥 취급을 받아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또 [[일본 제국]]의 패전 이전 교육학제가 미국식 신학제로 개편되면서 고등교육기관이었던 [[구제대학]] [[대학예과|예과]] 또한 폐지되는데, 경성제대 예과는 문과(법문학부)/이과갑류(이공학부) 과정을 폐지하고 기존의 의학부 진학과정인 이과을류를 남겨 그대로 의예과로 계승하였다.[*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의예과로 삼을 수도 있었지만, 청량리의 [[한림대학교#s-11.4|경성제국대학 예과]]를 의예과 캠퍼스로 승계하고, 의예과의 소속 또한 [[의과대학]] 대신 경성제국대학의 정통이라는 [[문리과대학]]에 귀속시켜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완전히 곁가지로 내쳐버렸던 것이다.][* 참고로 [[일제강점기]]에도 [[의사]] 선호현상이 상당해서 경성의학전문학교는 경성법학전문학교 등의 관립 [[구제전문학교]]는 물론이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등의 사립 의학전문학교 보다도 압도적인 선호도를 보여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의 최상위권 학생 대부분이 경성의전을 지망하는 해도 있었고, [[일본]] 본토에서도 [[경성부]]는 물론, [[평양]]과 [[대구광역시|대구]], [[함흥]]과 [[광주광역시|광주]] 등에 있는 한반도의 관립 의학전문학교 진학희망자가 쇄도하여 전원 일본인 학생이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조선총독부에서 입시에 조선인을 2/3 이상 뽑으라는 지침을 내릴 정도였다고 하는데, 지방의 의학전문학교 입학생의 절반 이상이 [[일본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성의전은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에 절대 도전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명주완 박사는 경성제국대학 개교를 기다리며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한 후 반수를 해서 [[구제고등학교|경성제대 예과]]에 입학한 바 있다. 전종휘 박사는 경성제국대학 [[대학예과|예과]] 입시 낙방 후 경성의전에 [[수석]] 입학했으며, 직장에서 상사로 만난 경성제대 교수의 추천으로 경성제대 의학부에서 연구생 생활을 했는데 경성의전이 경성제대에 한참 못 미쳤다는 평가를 말년 회고록에 남길 정도였다.] 이로 인해 [[경성의학전문학교]] 출신 학생들이 격렬히 반발했고, 경성제대 의학부 출신 교수들은 경성의전 학생들은 경성제대(예과 3년+의학부 4년)과 경성의전의 수학연한 차이만큼 2~3년을 더 다니면 의학사를 수여하겠다고 했으나 경성의전측에서는 이를 거부하여 1947년 제1회 서울대 의과대학 졸업식은 [[전문부]] 졸업생 전원이 보이콧하여 의학부 졸업생들로만 치러졌다고 한다. [[경성의학전문학교]]와 통합되었다고는 하지만,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학장은 경성의전 교장이었던 초대 심호섭 학장이[* 경성대학 의학부장이었던 [[윤일선]] 교수는 1946년 통합 당시 서울대학교 대학원장으로 영전하였다.] 학사호 파동[* "학사호"문제로 학생이 교수 구타(동아일보, 1947.07.05). 서울국립대학교의 의과대학 내의 [[전문부]] 일부 학생들은 졸업한 뒤의 '학사호'문제로 말미암아 지난 2일 1학년 말 시험이 끝난 뒤, 허규 씨 등 교수 2명을 구타하는 동시에 학교 건물을 파괴하고 학장 주택을 습격하였는데, 학교 당국에서는 8명을 퇴학시키고 169명을 정학에 처하였다. 즉, 전 경의전 계열의 학생들은 벌써부터 학교 당국에 자기들이 학습하고 있는 강의과목과 교수는 의학부 학생(전 성대)이 학습하고 있는 과목과 동일한데도 불구하고 학부 출신자들은 졸업 후 학사호를 달게 되나, 자기네들은 학사호를 얻지 못하게 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여 수차에 걸쳐 동일한 대우를 해주도록 요청하는 동시에, 예과과목에 대한 자격시험을 실행하여 합격된 의전 출신자에 대해서만이라도 학사호를 수여할 것을 당국에 요청하였으나, 국대 총장은 지난 28일 의학부 출신과 같은 자격을 요구하는 자는 문리과대학에 가서 2년 간 더 수업을 하라는 지시가 의전부 학생들에게 전달되었는데 이에 분격하여 지난 2일 드디어 수 명의 교수를 구타하는 동시에, 학교 건물과 설비 등을 파괴하고 오후에는 학장 심호섭 씨 댁을 습격하였으며, 그 다음날인 3일에는 의과대학 사무장 댁까지를 습격한 것이다.]으로 1년도 되지 않아 낙마한 후 경성제대 의학부 강사였던 이갑수[* 1917년 오카야마의학전문학교 졸업 후 교토제국대학 의학박사, 1931~1945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강사 역임] 제2대 학장의 뒤를 이어 1950년 10월 취임한 제3대 학장부터 1986년 4월 퇴임한 제17대 학장까지 전원이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졸업생들에 의해 완전히 독점되었고([[https://m.dcinside.com/board/medicalscience/559812|참조]]) 이후 서울대 학사 출신으로 바로 넘어갔다. 또한 [[http://www.snuh.org/content/M005003002.do|서울대병원장]] 역시 경성제국대학 예과 1회 및 의학부 제1회 졸업생인 [[https://m.terms.naver.com/entry.nhn?docId=1797300&cid=49363&categoryId=49363|명주완 박사]]가 광복과 동시에 경성대학 의학부 부속병원의 초대 [[원장]][* 경성대학 의학부 신경정신과학교실 초대 주임교수 겸임]으로 취임해 1947년 3월까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제1부속병원 초대 원장을 역임했고, 이후 김두종(1924년 [[교토부립의과대학|교토부립의전]] 졸업)·김동익(1924년 [[경성의전]]을 졸업한 원로의사) 원장 이후 제4대[*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병원이었던 제1부속병원과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이었던 제2부속병원이 행정통합된 시점의 초대 통합병원장이었다.] [[https://m.terms.naver.com/entry.nhn?docId=562093&cid=46638&categoryId=46638|진병호]] 원장[* 1926년 경성제대 예과 제3회 입학, 1932년 경성제대 의학부 졸업, 외과학교실 조수, 1937년 경성제대 의학박사(박사학위논문:[[https://ndlonline.ndl.go.jp/#!/detail/R300000001-I000000194950-00|絞縊性腸閉塞症に関する研究 (1937)]])]과 김성환(1924년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원장까지는 경성의전과 번갈아가며 차지했으나, 제8~9대 [[한심석]] 원장[* 1932년 경성제대 예과 입학, 1938년 경성제대 의학부 졸업, 의학부 연구실 조수로 근무. 1943년 경성제대 의학박사를 받고 의학부 강사로 있던 도중에 1945년 광복이 되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1964년 서울대학교병원장 등을 지내고 의대를 지지기반으로 총장(1970~1975년)을 역임하였다. [[서울대학교]] 역사상 유일한 연임 [[총장]]이다.]부터는 김홍기(제10~13대, 특수법인 초대), [[권이혁]][* 1941년 경성제대 예과 제18회 입학, 1943년 9월 경성제대 의학부 진학, 1945년 8월 3학년 때 광복을 맞이하여 1947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제1회 졸업.](제2대), [[http://www.gilmokin.org/board_mhFn07/4120|홍창의]][* 1923년 황해도 황주군 영풍면 출생으로 평양숭실중학교를 거쳐 [[구제중학교|평양제3공립중학교]]를 1941년 졸업하고 [[구제고등학교]]인 야마구치고교에 입학하여 1943년 9월 졸업, 동년 10월 [[교토대학|교토제국대학]] 의학부로 진학했다. 전쟁 중이던 1945년 5월 교토제국대학 의학부에서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로 전학하여 서울에서 해방을 맞이하고, 1947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제1회 졸업생(53명)이 되었다.](제3대), [[http://www.kams.or.kr/business/fame/sub1.php?mode=view&sid=45&keyfield=all|이영균]][* 1937년 경성제대 예과 제14회 입학, 1940년 경성제대 의학부 진학, 1944년 9월 의학부 졸업.](제4~5대) 원장 등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출신 한용철(제6~7대) 원장으로 넘어갈 때까지 경성제대 의학부 출신이 [[서울대학교병원]]장 자리를 독점하였다. 개교와 동시에 설치되어 17~18회 졸업생을 낸 법문학부나 의학부와 달리,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이공학부 1회 학생들은 1938년 예과 이과갑류 입학해 1941년 이공학부로 진학했는데, 이들 중 조선인은 15명이었고, 이공학부 1회 졸업생 중 조선인은 13명이었다.] 3회 졸업생을 배출하고 광복을 맞게 되었다. 그 중 이학계열 2개과[* 물리학과, 화학과]가 법문학부와 함께 경성제대의 정체성이 확실한 [[문리과대학]]으로 별도 [[단과대학]]을 구성한 것과 달리, 공학계열 5개과[* 토목공학과, 기계공학과, 전기공학과, 응용화학과, 광산야금학과]는 [[구제전문학교]]인 경성고등공업학교, 경성광산전문학교 등과 통합되어 서울공대를 구성하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경성제대 이공학부 교사는 미군이 점유해 사용 중이었고 1948년 미군이 철수하였지만 학교당국은 공덕리 교사로 복귀하는 데 소극적이었던 바 [[구제전문학교|경성광업전문학교]] 교사에서 강의를 받던 서울공대 [[전문부]]와 고등부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교사이전운동을 전개하여 1949년 가을 공덕리의 이공학부 캠퍼스에 입주했으며, 기존 경성제대 이공학부의 후신인 서울공대 학부생들은 상당수가 청량리의 [[구제고등학교|경성제대 예과]]캠퍼스에 있던 문리과대학 이학부로 옮겼다고 한다. [[서울대학교/학부/법과대학|법과대학]]의 경우 [[구제전문학교|경성법학전문학교]]가 주축으로 설립되어, 경성제대 법문학부의 후신으로 동숭동캠퍼스를 독점하고 있던 문리과대학의 거부와 물리적 저지로 [[서울대학교/학부/법과대학#s-3.4|문리대-법대 강의실 분쟁사건]]이 발생한 것과 비슷한 배경이 있으나 결과가 반대가 된 케이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은 한국전쟁 와중에 부산 서대신동 가교사로 임시 이전하였다가 전쟁 후인 1953년 9월 동숭동의 [[서울사대부중]] 교사를 거쳐, 1954년 8월 파손된 건물을 수리하여 다시 경성제대 이공학부의 공덕리 캠퍼스로 복귀하였다. 이후, 서로 떨어진 여러 서울대학교 캠퍼스들에 대한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서울대학교 종합화 계획이 수립되고, 관악캠퍼스를 계획하여 1975년부터 이전이 시작되어 공과대학도 1980년 2월 관악캠퍼스로 이전하였다.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로 건설된 서울공대의 공릉동 캠퍼스 부지와 건물은 당시 경기공업전문대학(현 [[서울산업대학교]])으로 이관되어 1호관은 현재 다산관으로, 2호관은 현재 창학관으로, 4호관은 현재 다빈치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경성광산전문학교 건물은 대륙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2000년대부터 일제강점기를 재평가하는 사조가 과학사학계에서도 대두하였고, 서울대 역사연구소장 이성규 교수(동양사학과)는 [[https://www.sciencetimes.co.kr/news/과학으로-다시-짚어보는-근현대사/|「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의 식민사적 의의」]]에서 "경성제국대학의 이공학부의 수준은 매우 높았다.”며 “경성제국대학이 3회에 걸쳐 배출한 졸업생 중 조선인 이공학부 졸업생은 37명으로 이들은 해방 후 신생 독립국의 엘리트로서 대학교육건설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하였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his=문단, title=제국대학, version=430, paragraph=6.1)]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