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성제국대학 (문단 편집) === 입시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56e43f02.jpg|width=100%]]}}}|| || 경성제국대학 예과 교직원 및 생도 일동 || 경성제국대학 예과 생도[* 학부 본과생은 학생, 예과생은 생도라고 구분해서 불렀다.]는 예과 수료 후 본과에 무시험 진학할 수 있었다. 경성제국대학 대학규정에 따르면 학부는 예과수료자를 먼저 입학시킨 뒤(제4조), 예과 수료자를 입학시키고 남은 결원이 있을 경우 1순위로 [[구제고등학교]] 및 학습원 고등과의 문과 수료자로 법문학부에 지원한 자, 이과 수료자로 의학부 및 이공학부에 지원한 자를 입학시키고(제5조 1) 수용인원을 초과하는 경우 선발시험을 행할 수 있으며, 그래도 결원이 남는 경우 2순위로 법문학부 선과생 및 선과수료자, 공/사립대학 예과, [[고등사범학교]], 여자고등사범학교, [[고등상업학교]], 외국어학교 및 동등 이상의 학교 졸업자로서 학부에서 적당하다고 판단하는 자를 대상으로 시행하는 학력검정시험의 합격자를 입학시켰다(제5조 2).[* [[홋카이도대학|홋카이도제국대학]]의 경우는 이학부를 기준으로 1순위로 [[구제고등학교|홋카이도제국대학 예과]] 수료자, 2순위로 [[구제고등학교]] 고등과 이과 졸업생 및 [[구제고등학교|가쿠슈인 고등과]] 이과 졸업자, 3순위로 [[구제고등학교]] 고등과 문과 졸업생 및 [[구제고등학교|가쿠슈인 고등과]] 문과 졸업자를 입학시켰고, 이후에도 결원이 있는 경우 4순위로 [[고등사범학교]]와 [[고등사범학교|여자고등사범학교]] 이과 졸업생, 5순위로 기타 [[구제전문학교]] 졸업생으로 자격검정시험 합격자, 마지막 6순위로 [[구제중학교]] 교원면허소지자로 자격검정시험에 합격한 자를 입학시켰다고 한다.] 경성제대 예과를 수료 후 내지의 [[제국대학]]으로 진학한 경우와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5623|이인영]]의 사례처럼 내지의 [[구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대에 진학한 경우도 소수 존재하지만, 경성제대 학생의 90% 이상이 예과 출신이고 경성제대 예과생의 절대 다수가 수료 후 경성제대 학부로 에스컬레이터 진학하였으므로, [[구제고등학교|경성제대 예과]] 입시가 곧 경성제국대학 입시였다. 그리고 1924년 경성제대 예과의 설립은 "입시의 화마에 기름을 부었다"고 표현될 정도로 경성제대(예과)를 중심으로 한 학문적 서열화 구도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의 학생들 거의 모두의 목표는 경성제국대학 입학이 되었고, 예를 들며 [[보성고등보통학교]] 졸업생 80~90명 중 20~30명이 경성제대 예과 입시에 응시했는데 그 중 합격자는 매년 1~2명에 불과했을 정도로 극소수였고 해마다 지원자가 합격자의 10~15배나 될 정도였으니 학교마다 경성제대 합격생 수를 두고 경쟁이 붙었다.[* 김진섭, <일제강점기 입학시험 풍경>, 지성사, 2021. p.116 참조] 그 결과 오늘날 고교별 서울대 합격생으로 평가받는 것과 유사하게 조선에 소재한 [[구제중학교|중등교육기관]]들은 경성제대 예과 합격생 숫자로 그 서열이 매겨졌던 것이다. 서울대 사회학과 정진성 교수는 [[https://n.news.naver.com/article/001/0001502574|「경성제국대학의 입학 및 졸업 기회의 차등적 배분」]]에서 일제강점기의 경성제대 입시와 고교서열화를 정리한 바 있는데, 예과 1회(1924년 입학)부터 이공학부 신입생 선발이 이뤄지기 시작하기 전인 14회(1937년 입학)까지 경성제대 예과 입학생의 출신 [[구제중학교]] 분석 결과 경성중학교(현 [[서울고등학교]])가 430명을 기록해 압도적 1위였으며, 252명의 용산중학교(현 [[용산고등학교]])와 182명을 배출한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가 2위와 3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495373_60021_389.jpg|width=100%]]}}}|| || 경성제대 예과의 조선인 학생회였던 '문우회(文友會)'([[https://www.inche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495373|출처]]) || 주로 일본인이 입학하던 [[구제중학교]]뿐만 아니라 조선인 중등교육기관이었던 [[고등보통학교]][* 1938년에는 제3차 조선교육령에 의거 전부 [[구제중학교|중학교]]로 명칭이 통일된다.] 역시 경성제대 예과 합격생 숫자로 서열구조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정선이(2002)에 따르면 1924~1937년 사이에 예과를 입학해 수료한 조선인 학생 전체 687명 중 [[경기고등학교|경성제일고보]]가 182명(26.5%)를 배출해 최고 명문학교의 지위를 공고히 했고, 이어 [[경복고등학교|경성제이고보]]가 79명(11.5%)으로 2위, [[평양제이중학교|평양고보]] 51명(7.4%), [[경북고등학교|대구고보]] 38명(5.5%), [[청주고|청주고보]] 33명(4.8%), 함흥고보 25명(3.6%), [[서울고등학교|경성중학]](조선인 학생만) 23명(3.3%), 신의주고보 22명(3.2%) 등의 순서로 소수 학교에서 꾸준히 다수 합격자를 배출하여 명문으로 자리매김했고 [[구제중학교|중등학교]]의 위계적 구조화가 이루어져 해방 이후 고교서열화까지 연결되었다고 한다.[* 정선이, 「경성제국대학 연구」, 문음사, 2002. pp.95-99] 1924년 개교 당시 4:1 수준(160명 모집에 조선인 241명, 일본인 406명 등 도합 647명 지원)이었던 입시 경쟁률은 이듬해인 1925년 5.5:1(884명 지원)으로 올라갔고 1930년에는 10.6:1(1701명 지원)을 돌파하는 등 급격히 상승하여 12:1을 넘어서는 수준에 다다르게 된다. 경성제대 개교 당시인 1920년대에는 일본 내지에서도 진학열이 끓어넘치는 시기였고,[* 경성제국대학 외에 [[구제전문학교]]인 [[경성의학전문학교]], 경성고등상업학교 등도 일본인에게 문호를 개방하자 마자 일본인 지원자가 쇄도, 70~90%가 일본인으로 채워졌으며 이는 1933년 개교한 평양의전과 대구의전, 1944년 개교한 광주의전과 함흥의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기껏 조선의 최고학부라고 개교했더니 학생은 전부 일본인으로 채워지고 조선인 학생 비율이 너무 낮아지지 않을까 걱정한 [[조선총독부]]가 예과제를 채택하게 된 이유라고 한다(서울대학교 개학 반세기사).] 1910년대에 오직 넘버스쿨 8개교에 불과했던 [[구제고등학교]]가 38개교까지 추가설치되기 때문에, 다른 제국대학들의 입시가 치열해지는 것과 동조적으로 경성제대 예과 입시도 불이 붙을 수밖에 없었다. 일본 내지에서는 조선에서 가까운 규슈에서 특히 경성제대의 선호도가 높아서 [[경성제국대학]] [[구제고등학교#s-3.3|예과]]에 입학하는 일본인 학생 중 상당수가 규슈 출신이었을 정도였다. [[경성제국대학]] [[구제고등학교#s-3.3|예과]]의 1924년~1943년 신입생들의 본적지 통계자료에 따르면,[* 정근식 등, 「식민권력과 근대지식: 경성제국대학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1. pp.531-532. '표 IX-10. 본적별 예과 입학자수(문과, 이과 전체)' 참조.] [[도도부현]] 순위는 1위 [[경기도]]^^[[경성부]], [[인천부]], 개성부 포함^^ 290명, 2위 [[후쿠오카현]](福岡) 204명, 3위 [[야마구치현]](山口) 162명, 4위 [[히로시마현]](廣島) 118명, 5위 [[가고시마현]](鹿兒島) 115명, 6위 [[충청남도]]^^대전부 포함^^ 110명, 7위 [[나가사키현]](長崎) 107명, 공동 8위 [[평안남도]]^^[[평양부(일제강점기)|평양부]], 진남포부 포함^^ 및 [[경상북도]]^^[[대구부]] 포함^^ 101명, 10위 [[함경남도]]^^원산부, 함흥부, 흥남부 포함^^ 100명, 11위 [[오이타현]](大分) 97명, 12위 [[도쿄도]] 93명, 13위 [[구마모토현]](熊本) 91명, 14위 [[사가현]](佐賀) 88명, 15위 [[평안북도]]^^신의주부 포함^^ 87명(이하 생략)이다. 이를 보면 상위 등수에 후쿠오카(2위), 가고시마(5위), 나가사키(7위), 오이타(11위), 구마모토(13위) 사가(14위) 등 규슈의 각 지방[* [[미야자키현]](宮崎)은 33명.]이 포진하고 있으며, 이외에도 규슈에 가까운 야마구치(3위), 히로시마(4위)가 합격자를 다수 배출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한 인연에서 덕택인지, 경성제대와 [[규슈대학|규슈제대]]는 매년 축구부 시합을 포함해 정기전을 개최하는 밀접한 관계였다고 한다.[* 서울대학교, 「서울대학교 개학 120년 기념 국립서울대학교 개학 반세기사(1895~1946)」 p.575.]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clm1802110006-p1.jpg|width=100%]]}}}|| || 본관 앞 운동장에서 예과 생도들 || 아니나 다를까, 치열한 입시 경쟁의 와중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신문사와 잡지 등 민족언론은 경성제대 설립 직후부터 조선인 입학기회가 낮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비판하는 여론을 환기했으며,[* 동아일보 1925년 5월 22일 사설 '조선총독부의 교육방침', 조선일보 1927년 4월 1일 조간 2면 기사 '백사십칠인 중 조선인은 사십팔-외지대학과 다를 것이 무엇' 등] 1934년 [[경기도의회]]에서는 조선인 도의원 21인의 찬성으로 조선인 입학비율을 늘려달라는 공식 건의서를 조선총독부에 제출하였다.[* 동아일보 1934년 4월 7일] 조선인 비율이 너무 낮으니 늘려달라는 주장은 1945년 패전 때까지 여론을 통해 지속적으로 표출되었다. 예과 1회 신입생을 선발했던 1924년에 29%에 불과했던 경성제대 신입생 중 조선인 비율은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소학교 입학때부터 1922년 전면개정된 조선교육령(제2차 조선교육령)에 따른 내선공학 교육을 받고 자란 조선인들이 입시를 치르는 1930년대 중반이 되면 40%대로 올라섰다. 특히 종전 이전 마지막 졸업생인 1942년 예과입학생을 학부별로 보면 법문학부 68명 중 33명(49%), 의학부 64명 중 29명(45%) 등 50%에 근접하였으나 당시 일본 내/외지의 학교를 막론하고 최고 인기학부였던 이공학부가 50명 중 10명(20%)으로 조선인 비율이 특별히 낮아서 전체적으로는 182명 중 72명으로 40%에 그치게 되었다. 비교대상으로 대만의 [[대북제국대학|다이호쿠제국대학]] 1941년 입학생 내역을 보면 경성제대의 법문학부에 해당하는 문정학부 33명 중 2명(7%), 이농학부 48명 중 1명(2%), 의학부 19명 중 14명(74%)으로 총 100명 중 17명이 대만인이었는데, 이와 비교하면 조선인의 문과지향성이 강하게 나타난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1936년 [[일본]]에서 출판된 입시문제집 입시요강에 따르면 경성제국대학 예과는 [[구제고등학교]]처럼 [[문과]]는 갑(甲), 을(乙)류로 구성되어있고, 이 중 갑류반은 수료 이후 법문학과 [[법학과]], 을류반은 [[철학과]]나 [[사학과]]로 진학하는 걸로 정해져있었다고 한다.[* 일본 본토의 [[구제고]]는 갑을병류반을 어떤 외국어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정해졌다.] 반면 [[이과]]는 이 당시 [[의학부]]만 존재했기때문에 이과생이면 곧 예비 [[의대생]]이나 마찬가지였다고. 시험문제의 경우 매년 미세하게 다르긴 했지만 1936년의 경우 문과는 국한문(국문해석, 한문해석, 국문법), 영어(영문해석, 영작문, 듣기평가), [[수학]], [[일본]]과 [[만주]] [[지리]] 과목문제가 출제되었고, 이과는 국영수까지는 똑같지만 이과과목으로 [[생물|동식물]] 과목 문제가 출제되었다고 한다. 각각 국한문 200점, 영어 200점, 수학 200점, 선택과목 150점으로 총 750점 만점이었다고.[[https://twitter.com/thals_8282/status/1600030985974059008?s=20&t=n20M0OF7UZTKJygIXKw3Kg|#]] 다만 전체적으로 난이도는 일본 본토의 [[구제고등학교]] 입시문제와 비슷한 편이며, 당연하겠지만 [[도쿄제국대학]]이나 [[교토제국대학]] 등등 일본 본토의 제국대보다는 쉬운 편이었다. 이는 당연한게, 일본 본토의 제국대는 이미 예과과정이나 마찬가지인 [[구제고등학교]]에서 학업을 마친 이들이 치루는 시험이었으니 당연히 난이도에서 확연히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다. 입시 문제는 오늘날의 [[수능]]처럼 신문에 공개되었다. 1928년 예과 5회 [[영어]] 시험에 대한 평가는 [[https://m.blog.naver.com/remedies/222099947951|링크]] 참조. 역사과 문제 일부만 전재하면 아래와 같다. * 1925년 >문1.(총점 100) >1)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무역정책에 대해 쓰시오. >2) 동주시대의 미술·공예에 대해 쓰시오. >3) 다음 사항에 대해 아는 대로 쓰시오. >- 藏人所(구로도도코로)[* [[헤이안 시대]] 천황의 비서업무를 담당하던 관청] >- 藤原隆家(후지와라노 타카이에)[* [[헤이안 시대]]의 고관으로, 사실상의 규슈 총독인 대재부(大宰府) 대재권수(大宰權帥)를 지냈다.] >문2.(총점 100) >4) 송대의 유학에 대해 쓰시오. >5) 다음 사항에 대해 아는 대로 쓰시오. >- [[정화(명나라)|鄭和(정화)]] >- 尼布楚條約([[네르친스크 조약]]) * 1930년 >(총 100점) >1. [[메이지 시대]] 조약개정 문제의 경과에 대해 쓰시오. >2. [[헤이안 시대]]의 미술과 공예에 대해 쓰시오. >3.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존왕한 일들에 대해 쓰시오. >4. [[에도 시대]] 번주를 뽑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쓰시오. * 1931년 >(총 100점) >1. [[파리 강화 회의|파리강화조약]] 이후 산동문제의 교섭과 해결 과정에 대해 쓰시오. >2. 지나([[중국]])의 약도를 그리고, 아래 지명을 표시하시오. >- 낙양, 장안, 건강, 함양, 개봉, 임안, 연경, 무창 >3. 명대의 [[기독교]] 동진(東進)에 대해 쓰시오. >4. 다음 각 항에 대해 쓰시오. >A. [[개원의 치]] >B. [[카니슈카 1세|迦膩色迦 王(카니슈카 왕)]] >C. [[고증학]] >D. [[임칙서]] * 1934년 >국사([[일본사]]) 총 100점 >1. “[[겐무 신정|건무중흥]]”에 공을 세우고 근왕한 여러 장수들에 대해 쓰시오. >2. [[제1차 세계 대전|세계대전]]에서 우리나라([[일본]])의 전투경과에 대해 쓰시오. >3. 다음 항목들에 대해 설명하시오. >A. 豊受大神(토요우케오오카미)[* 토요우케히메(豊受姬)라고도 하며, 이자나미가 죽을 때 그 소변에서 태어난 신 와쿠무스비의 딸. 고사기에 그 이름이 등장하는 음식의 신.] >B. 臨濟宗([[임제의현|임제종]]) >C. 本朝通鑑(본조통감)[* 에도 시대에 하야시 가호(林鵞峰)가 집필한, 편년체의 고대사 관련 사서.]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