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구려어 (문단 편집) == 관련 연구 == [[고구려]]의 정체성을 다룰 때 자주 논란이 되는 부분이다. 옛 [[한국어]] 자체가 [[훈민정음]] 창제 이전의 언어 자료는 많이 빈약하지만, 그나마 [[신라어]]는 [[향가]]나 기타 [[금석문]]이라도 좀 남아 있어서 비교적 여러가지를 유추할 수 있는 반면 고구려어는 그 자체로 쓰인 문장을 유추할 수 있는 자료가 없다. 《[[삼국사기]]》 지리지 지명과 관련한 자료, 중국의 사료, 《[[일본서기]]》에 기록된 인명과 지명 자료가 거의 전부이며, 천여 년이 지난 뒤인 《[[세종실록지리지]]》나 《[[택리지]]》 등에서 지명의 역사를 밝히는 대목을 참고해야 하는데 이것 마저도 빈약한 상황이다. 그래도 일단 [[광개토대왕]]과 관련 있는 [[광개토대왕릉비]]나 [[충주고구려비]] 등에서 간간이 보이는 [[이두]]식 표기를 통해 기본 어순 등은 [[중국티베트어족]]이나 [[퉁구스어족]]과는 전혀 다르고 [[한국어]]를 포함한 [[한국어족]]으로 속한다는 점을 확실히 밝히긴 했지만, 그밖에는 단어를 비교하는 정도뿐이라 규명 작업이 가로막히고 있다. 그만큼 고구려를 비롯한 삼국시대의 언어를 분석하는 자료가 그리 많지 않다. [[현대 한국어]]의 근원이 된 언어가 고구려어인가 신라어인가에 관하여 논쟁이 있다. 국내 국문학계와 사학계에서는 예전부터 신라어가 삼국통일 이후 중세 한국어로 이어져 현재 한국어의 근간이라는 설이 정설이었으며, 2000년대 초반까지도 기본적으로는 이쪽에 무게가 실리는 중이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2843|#]] 그러다 최근 들어 크게 두 가지 형태의 반론이 등장하였다. 첫째는 고구려어 계통이 근간이 되었다는 주장이고, 둘째는 애당초부터 고대 삼국의 언어는 그 차이가 적었을 것이므로 어디가 근간인가를 따지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이른바 일축적 주장이다. 신라어 근간설을 비판하는 국내 주류 진영에서는 급진적 입장인 전자보단 신라어 근간설을 완전히 부정하진 않고 유보적으로 보고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 두는 후자에 가깝다.[* 한국어의 계통과 형성에 관한 서술 내용의 통시적 검토 : 중등학교 '국어', '문법' 교과서를 중심으로, 2003. 청람어문교육] 해외에서는 동아시아 여러 언어들의 연구자로 저명한 [[알렉산더 보빈]](Alexander Vovin) 교수 같은 언어학자들은 고구려어(부여어계)를 [[현대 한국어]]의 어원이 된 언어로 보기도 한다. 대체로 [[신라어]]를 현대 한국어의 근간으로 보는 편이지만 [[신라]]는 지방 통제력이 [[고려]]와 [[조선]] 만큼의 중앙집권 국가 수준으로는 도달하지 못했던 탓에 실질적으로 현대 한국어의 어원이 만들어진 시기는 후삼국시대 이후인 [[고려]]시대로 보는 의견이 있기 때문이다.[* [[신라]]의 중앙집권화가 [[고려]]와 [[조선]] 수준으로 이르지 못하였음은 대부분의 사학자들이 인정하는 부분이다. 만약 신라의 중앙통제력이 지방의 구 고구려, 백제권 지역들의 언어와 정체성까지 완전히 바꿀 수 있는 수준이었다면 [[고려]]와 [[후백제]]가 탄생한 [[후삼국시대]]는 아예 개막하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실제로 신라의 중앙어인 [[경주시|경주]]쪽 언어가 다른 지방들의 언어를 완전히 대체하였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오히려 경주만 벗어나도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기록만이 확인 될 뿐이다. 심지어 그 고려 조차도 초기에는 주현에서나 겨우 현지 [[호족(한국사)|호족]]세력을 통제할 관원들을 보내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신라의 지방 통제력이 조선만큼은 아니라도 고려 초중기보다는 짜임새 있었다는 주장도 있으므로 단순히 뒷 시대라고 더 중앙집권일 거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가령 [[삼국사기]] 직관지 외관조에는 통일신라가 전국 주군현에 파견한 관리 숫자가 하나하나 적혀 있는데, 지방에 파견한 지방관 숫자는 고려 대부분 기간보다 오히려 통일신라가 더 많았다. 통일신라나 조선이 모든 지방 행정단위에 지방관을 파견한 것과 달리 고려는 고려 말 이전까지는 관리를 파견하지 않고 현지 지방세력이 자치하는 속현이 많았기도 하다.(박종기. "지배와 자율의 공간, 고려의 지방사회". 2002, p. 83) 즉 후삼국시대를 태조 왕건이 지방 [[호족(한국사)|호족]]의 대표로서 지방 호족 간 연합체를 꾸려서 타개한 탓에 고려 초의 지방 장악력은 통일신라 전성기에 비해서도 상당히 약화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설을 따른다 해도 [[로마사]]나 [[일본사]]도 그렇듯, 역사라는 것이 시대가 흐를수록 중앙집권이 항상 꾸준히 강화되는 것만은 아니므로 특이한 일은 아니다.] 실제로 현대 한국어의 표준어가 된 서울어는 14세기 조선의 한양 천도로 인해 개성어가 그대로 이식된 결과이며, [[고려]] 왕조의 개성어는 애초에 [[고구려]] 계승 의지를 공공연하게 피력하였던 [[패서]], 즉 오늘날 [[황해도]] 및 [[평안남도]] 남부의 [[고구려]]계 [[호족(한국사)|호족]]들의 언어를 그대로 계승하였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현대 한국어는 [[고구려어]]([[부여어족]])의 직계 후손이라고 보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https://homaranisto.tistory.com/29|고구려에서 탐라까지(From Koguryǒ to T’amna)]] [[https://en.wikipedia.org/wiki/Peninsular_Japonic|반도 일본어족(Peninsular Japonic)]][* [[반도 일본어설]] 참고] 이러한 점에 대해서는 국내의 국문학계와 사학계에서도 일부 급진적 학자들은 진정한 의미의 [[한반도]] 최초 중앙어는 고려가 수도로 정하였던 [[개성시|개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언어라고 추정하기도 했다.[* "중부방언은 기원적으로 '''고려가 왕도(王都)를 개성으로 정하면서 형성된 중심으로 하여 중앙어(中央語)에 소급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중앙어는 조선이 왕도를 개성과 동일한 방언권에 있는 현 서울로 옮김으로써 그대로 유지되어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의 중앙어로서 군림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서울의 말은 곧 표준어의 중추를 이루므로 중부방언은 말을 바꾸면 표준어의 특징을 다른 방법보다도 가장 많이 공유하고 있는 방언이라 할 수 있다." (국어국문학자료사전, 1998. 한국사전연구사)] 중앙어가 지방으로까지 완전히 퍼진 시점은 [[고려]] 건국 이후로 보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여전히 현대 한국어는 고구려어보다는 신라어의 직계 후예라는 주장 또한 일각을 차지하고 있다. 위의 가설대로라면 통일신라와 고려 사이의 교체기에 언어적으로 큰 변화가 있었다고 봐야 하는데 엄연히 신라 왕실 및 신라계 호족들도 고려 지배층으로 골고루 편입된 데다, 고구려어보다 훨씬 대량으로 자료가 남아있는 [[향가]], [[금석문]]들을 통해 신라어가 고려, 조선의 [[중세 한국어]]와 같은 계통임과, 고려시대 향가인 [[보현십원가]]나 [[정과정]] 등 통일신라의 언어 전통이 고려에서도 큰 변화 없이 이어지는 사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예맥]]계 나라인 [[고조선]], [[부여]]에서 나온 나라들이다. 고구려와 백제가 말이 통하고 백제와 신라가 말이 통했다는 기록도 있는 데다 현대 언어학 기준으로도 [[고구려어]], [[백제어]], [[신라어]]는 모두 [[한국어족]]으로 포함되는 언어들이니 서로가 비슷한 고대 한국어 계통의 언어를 사용했을 것이고, 그래서 통일신라의 언어 전통이 고려에서도 큰 변화 없이 이어졌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소리다.] 요약하자면 기존까지 국내 학계에서는 '[[신라어]] 직계설'이 통설이었지만, 알렉산더 보빈 교수의 구체적인 논증으로 인하여 최근에는 '[[고구려어]] 직계설' 역시 주목받는 상황이다. 여담으로 [[고구려]]의 중심 지역은 지금의 [[황해도]]·[[평안도]], 특히 3경이 있는 [[재령군]]이나 [[평양시]]가 중시되었다. 다만 탈북민이 평양말, 황해도말이 서울말 같다는 것은 이들이 90%는 성조가 있는 [[동북 방언]]권 출신이기에 억양이 부드러운 한반도 서부 말투를 다 비슷하게 느끼는 것이 크다. 원래 평양 사투리는 전라북도 전주 정도의 차이가 있고 황해도는 서울말과는 충청도 수준의 차이가 있다고 보면 된다. [[서북 방언]] 문서 참조. 다만 서북 방언과 경기 방언 사용 지역 사이에는 후술하지만 큰 지리적 장애물이 없어 삼국시대에도 방언연속체적 성격을 띤다는 말은 있다. 그런데 현대 국가적 특성을 고대 국가에 투영한 신라어, 고구려어, 백제어라는 개념이 과연 적절한지도 따져보아야 한다. 여러 사서와 제한적으로 남은 사서와 목간 등을 통해 혹시 잔존했을지 모르는 반도 일본어를 제한 삼국의 언어가 매우 동질적이었음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또한 삼국시대 내내 수시로 발생하던 국경 변화에 맞추어 그 지역의 언어가 격변했을리도 만무하기에 삼국의 언어를 삼분법적으로 나누기는 다소 어렵다. 어쩌면 삼국의 언어라는 분절적인 용례보다는 윗 문단에서 짧게 언급한 [[방언연속체]]가 삼국시대의 언어상을 설명하는데 더욱 적합할 지 모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