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구려어 (문단 편집) === 현대 한국어와의 관계 === 부여어족을 신라어와 분리하는 일부 [[일본]] 학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한국]] 학계, 특히 [[북한]] 학계에서는 두 언어가 같은 계통의 언어로 보거나, 최소한 고구려어가 현대 [[한국어]]에 영향을 끼친 언어로 본다. 당장 중국 사서들은 고구려어 포함 [[부여]] 계통의 언어들이 [[말갈]] 계통의 [[퉁구스어족]]과는 구분된다고 했고, 고구려어와 [[백제어]]는 서로 통한다고까지 설명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들 부여계 언어가 과연 [[신라어]]와도 같은 계통의 언어인가에 관한 문제는 계속 추측밖에 나올 수 없다. 남아 있는 [[삼국시대]] 언어 자료가 너무 없다. 고구려어 어휘 약간이 우리가 알 수 있는 고구려어의 거의 전부. 수사라고 알려진 것들도 확실하진 않고 그저 그러리라는 추정일 뿐이다. 이렇게 자료가 없으니 다른 언어와 제대로 비교해볼 수가 없다. 그렇긴 해도 기존의 금석문이나 이후로 발굴되는 목간들을 통해 의미 있는 연구들이 나오고 있다. 일단 [[광개토대왕릉비]] 같은 금석문은 변체한문으로 적혀 확실히 한국어와 어순 구조가 비슷했음을 알 수 있다.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목간에는 백제어 수사가 적혔는데, 이들의 한자음 재구가 '''일본어 수사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신라어]] 및 현대 한국어와 비슷해서 백제어와 같았다는 고구려어가 [[신라어]]와도 같은 계통이었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수사뿐만 아니라 왕을 의미하는 어휘에서도 부여어족과 한(韓)어가 비슷하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 || 부여 || 고구려 || 백제 || 신라 || 가야 || || 한자 || 加 || 皆 || 鞬吉支/於羅瑕 || 居西干 || 干 || || 발음 || 가 || 개 || 건길지 / 어라하 || 거서간 || 간 || || 왕(王) || 가 || 가이 || 긔 / 가 || 간 || 간 || || 존칭 접미사 || || 支(ki) || 支 || 支 || 支 || [[알렉산더 보빈]](Alexander Vovin)은 여러가지 연구를 통해 [[고구려]]의 관직명, 지명 등에서 [[한국어]]와 연관된 단어들이 보이며[* 보빈의 주장에 따르면 고구려에서 왕비를 가리키던 어륙 및 백제에서 왕을 가리키던 어라하는 동일 계통의 단어이다. 일어서다는 한국어 단어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고대 한국어는 [[만주]] 지역의 민족들이 쓰던 언어가 점차 [[한반도]]로 남하하여 형성된 언어라는 가설을 내세웠다. '[[https://homaranisto.tistory.com/29|고구려에서 탐라까지(From Koguryǒ to T’amna)]]' 그는 [[한반도]] 중남부의 지명들이 일본어와 유사한 면이 보인 점에서 원래 [[한반도]] 중남부에는 일본어계 언어 사용자들이 있었는데, 점차 고구려어가 남하하여 퍼지면서 [[한반도]] 중남부의 일본어를 밀어내고 한국어가 형성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가설에 따르면, 원래 [[제주도]]를 가리키는 말이었던 [[탐라]]는 [[일본어]]인 타(田)+무라(村) 혹은 타미(民)+무라(村)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또한 일본어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던 건 오히려 초기 신라어이며 이마저도 삼국시대 중후기를 거치며 삼국의 언어 모두가 유사한 모습으로 수렴하였다고 한다. 탐라라는 국명은 신라가 하사한 것으로, 본래 '탁라'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오늘날의 정설이다. 하지만 [[탐라국]]은 신라에 입조하기 전부터 이미 탐라라는 국호를 사용하였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백제]] 문주왕 2년(476년)이다. 탐라라는 이름 자체의 기원은 더 오래되었을 것이다. 특히 보빈은 당대 실제로 사용되었던 고구려어를 더 정확하게 실증하기 위해 고구려어와 긴밀했던 말갈어-[[여진어]]-[[만주어]](이하 만주어 라인)를 비롯한 퉁구스어족의 각종 언어들[* 말갈족-여진족-만주족 라인을 비롯해 더 북쪽에서 쓰이던 퉁구스 계통 여러 종족이 사용한 언어가 포함된 어족. 위 라인에 대해 첨언하자면 보통 말갈어→여진어→만주어 순으로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본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보빈의 주장은 [[환빠]]들이 '''"[[고구려]]가 우리 역사니, [[거란]]이나, [[말갈족]], [[만주족]] 등도 전부 우리 민족이다!"''' 우기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보빈의 가설은 고구려어와 말갈어, 여진어 등은 잘해야 [[언어동조대]] 수준에 불과하다는 전제를 분명히 한다. 다만, 언어동조대라는 점을 역이용해서 고구려어에서 차용한 듯한 어휘들을 샅샅이 찾아내고, 이를 이용해서 고구려어의 기본적인 형태를 재구성했을 뿐이다. 굳이 근대식으로 비유를 하자면 식민지 주민들의 언어가 식민제국 언어의 영향을 받은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거란어와 만주어가 전자, 고구려어가 후자라고 볼 수 있다.] 및 당대 중국어 등에 남은 고구려어의 흔적 등을 심도있게 연구하였는데[* 보빈 교수는 이때 자신이 연구한 언어 중 [[거란]]어는 고대 고구려어에서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거란족이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주장한 역사적 사실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서희]]와 담판을 벌인 [[소손녕]]의 주장이 마냥 헛소리는 아니었다~~ 민족은 다르지만 언어, 문화적 영향을 크게 받았을 것이라는 주장. [[https://akademiai.com/doi/abs/10.1556/062.2017.70.2.4|해당연구]]], 그의 가설에 따르면 만주어 라인은 퉁구스 제어와 같은 계통이면서 고구려어의 영향도 짙게 받았으므로 퉁구스 제어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만주어 라인에서만 발견되는 단어를 비교분석하면 고구려어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다고 한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만주어 라인에서는 퉁구스 제어에서는 발견되지 않으면서 한국어의 영향으로 보이는 각종 언어적 특징이 다수 발견되었으므로 '''고구려어는 한국어와 관계가 긴밀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대표적인 예가 만주어로 부처를 가리키는 푸치키(puciki). ~기 혹은 ~지를 통해 무언가를 존칭하는 형태는 고대 한국어에서 흔하게 쓰였는데, 퉁구스 계통 언어에는 이러한 존칭접미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고구려어, [[일본어]] 동계 어족 설에 대해 '''회의적'''으로 보며 고구려어는 현대 한국어와 연관이 있다고 보는 것.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도 반론들이 있다. 하지만 보빈의 전공과 연구 실적상 벡위드의 주장보다 훨씬 공신력이 있기 때문에 결국 벡위드도 보빈의 연구 결과를 일부 수용해 [[삼국시대]] 전기는 몰라도 후기에는 삼국의 언어가 서로 유사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위에도 적시했다시피 벡위드는 자음동화 무시나 무리한 한자음 재구 등을 통해 비판을 받은 바 있다. 저널을 찾아보면 알 수 있는데 벡위드는 [[중국티베트어족]] 언어들을 전공으로 공부하다가 중앙아시아 제어로 연구 분야를 확장해나간 경우이고, 보빈은 [[일본어]] 전공으로 시작해서 동북아 제어들로 연구를 확장시켜 나간 경우이다. 적어도 일본어에 관련해선 보빈의 연구가 상대적으로 더 깊을 수밖에 없었다.] 보빈의 가설에 따르면 '''한반도 남부'''에 일본계 고대 종족이 일부 존재했다. 김부식(고려시대)이 쓴 삼국사기와 일연의 삼국유사를 비교하여 신라어가 일본의 아스카~나라 시대 6모음체계와 같다고 보고, 고대 한반도인이 일본으로 이주했다는 야요이인의 일본열도 이주설을 뒷받침하는 주장을 한다. 참고로 일본의 주류학계에서도 야요이인들이 대륙에서 한반도 전체를 거쳐 넘어간 것인지 아니면 바닷길을 통해 한반도 남부만 거쳐 넘어갔는지[*유력 이쪽이 더 유력한 가설로 취급받고 있다.]에 대한 논쟁만 있을 뿐, 적어도 한반도 남부를 거쳐갔다는 데에는 모두가 동의한다. 대규모 인구가 기원전 수준의 항해술로 남중국에서 동중국해를 거쳐서 일본 열도로 갔다고 말하기는 억지고[* 삼국시대 초기에도 항해술이 모자라 얕은 황해를 건너가는 것도 힘들었다. [[낙랑군]]이 중국의 선진 문물의 매개지역으로서 [[삼한]]에 대해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또한 [[백제]]가 황해를 통과하는 직통 항로를 개척한 시기는 [[고구려]]한테 털려서 한성과 서해안쪽을 잃어버린 이후이다. 이쯤 되면 삼국시대가 중반기에 접어든 시점이기 때문에 항해술에 발전이 있었다고 볼 여지는 충분하다.] 소규모의 인구가 한반도 남부에서 벼농사를 통해 숫자를 불려서 일본 열도로 건너갔다는 추론이 더 설득력 있다. 중국 기록에도 변한은 왜와 아예 붙어있다고 했다. 보빈의 주장에 따르면, 한국어의 고유어와 일본어의 고유어 모두 '''서로의 고대언어에서 차용'''한 것들이 있다. 한국어 내 일본어족 귀화어로는 '섬', '바다', '쌀' 등이 있다. 특히 양국 고유어 중에서 고대~중세 한국어에서 'p-' 계열로 나타나면서 고대 일본어에서 'w-' 계열로 나타나는 것들은 거의 다 일본어족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이처럼 한국어 내의 일본계 귀화어의 수는 많지 않고, 반대로 중부~서부 일본어(특히 규슈 일대)에 들어간 한국계 귀화어의 수가 훨씬 많다고 한다. 이는 고대 한반도에서 세형 동검 등의 문물과 기마술을 바탕으로 한 한국어족 사용자들이 남부의 일본어족 사용자들을 힘에서 압도해 쫓아내거나 흡수하거나 지배했기 때문으로, 대개 지배-피지배 관계에서는 지배층의 언어가 피지배층의 언어로 흘러들어가는 일이 많다. 이 때문에 [[가야]]의 [[이진아시]]왕 등 한반도 삼국 시대의 주요 지배층의 이름들은 실제로 고대 일본어로는 해석할 수 없는 이름들인 바, 한국어족일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고 한다.[* 일본어에 비해 한국어가 역사언어학적으로 훨씬 따지기가 어려운데, 가장 큰 이유는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에 이르는 광범위한 언어 조사를 통해서 동질성이 나타나는 어휘들을 추리면 한반도 중심과 일본 열도 중심의 것들로 나눌 수 있는데, 여기서 추적해 확인할 수 있는 아이누어, 일본어 계열을 빼고 나면 결국 남는 것이 한국어 계열밖에 없기 때문에 이런 결론이 나온 것이다.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이나 중국티베트어족일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오히려 이들 언어들은 한국어족보다도 역사언어학적으로 연구할 건덕지가 풍부해서 반박된다. 즉, 한반도~일본 열도의 옛 고유명사 중에서 일본어족으로로 보기 힘든 정체불명의 것들은 현재 전하지 않는 옛 한국어족 어휘이리라 잠정적으로 추정한다는 것이다.] 얼핏 한반도 남부에 일본어족 화자들이 살았다는 가설을 보면 한국인 입장에서는 [[임나일본부설]]을 떠올리기 쉬우나, 정작 보빈의 주장 및 역사적 연도를 따져 보면 임나일본부설보다 몇백 년 이상 앞서며, 그마저도 '''한국어족 화자들이 일본어족 화자들을 압도'''한 정황들만 나타나기 때문에 오히려 '''임나일본부설과는 백만 광년쯤 멀어진다.''' 즉, 행여나 보빈의 주장을 어설프게 이용하며 임나일본부설을 들이미는 [[일빠]]나 [[넷우익]]이 있다면 친히 보빈의 주장을 인용해서 [[역관광]]시킬 수 있다. 근대에 와서 명확하게 민족이 형성되기 전에는 여러 종족이 거부감 없이 뒤섞여 사는 경우는 세계적으로 흔하게 있던 일이다. 특히 [[삼한]]과 일본열도 사이에는 곡옥, 청동거울, 세형동검, 고인돌 등 고고학적 교류 흔적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애초에 빙하기 이후, 항해기술이 발달하기 전인 고대시대에 대륙에서 일본 열도로 대규모로 건너가기 위한 가장 유력한 방법은 연안항해인데 이를 위해서는 당연히 한반도를 거쳐갈 수밖에 없다. 여러 국가 형성 초기단계의 제민족 이동과정에서 (민족적인 의미의 일본인이 아닌) 일본계 고대 종족이 일부 한반도에 존재했을 수도 있다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며, 반대로 (민족적 의미의 한국인이 아닌) 한국계 고대 종족 또한 충분히 일본열도에 건너가서 살았을 수 있다.[* 보빈은 가야와 관계가 깊은 한국계 왕조가 일본 열도에 일정 기간 존재했을 것이라 추정했으며 여기에서 섬을 가리키는 일본어인 시마가 유래했을 것이라 추정했다.] 언어학은 아니지만 형질인류학을 통한 분석으로는 [[http://lyuen.egloos.com/5577997|중국 학회의 부여인들의 유골에 대한 분석이 있다.]] [[모용선비]]의 침략 때 부여인들이 대규모로 포로로 끌려가서(무려 1만여 명)[* 당시 [[의려왕]]도 자살했고 부여는 사실상 멸망했다고 여길 만큼 크나큰 타격이었다. [[동부여]]가 이때 못 견디고 현 함경북도 지역으로 대피해 떨어져 나간 분파로 추정된다.] 선비족 땅에서 살았던 적이 있었는데, 위의 링크는 바로 그 부여인들의 유골에 대한 [[중국]] 학회의 연구 성과에 대한 게시물이다. 결론만 말하자면 유골에서 추출할 수 있는 합리적인 자료를 모아서 통계분석하면 '''부여인들의 인골은 현대 한국인들과 가장 가깝다'''는 것이다. 실제로 선비족, [[거란]]족과 같은 몽골계 종족의 인골과 [[여진족]], [[만주족]]과 같은 퉁구스계 종족의 인골의 자료는 여타 종족들의 인골의 자료와 비교하면 충분히 구별할 만큼 편차가 있다. [[중국]] 학계의 형질인류학은 오랜 연구로 상당한 수준이기 때문에 신뢰도가 상당히 높다. 다만 형질인류학적 연구는 표본이 부족하여 한계가 있다.[* 한반도 토양은 산성도가 높은 편이라 유골이 부식되기 쉽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