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사 (문단 편집) === <열전>(列傳) 50권 === 본시 《[[한서]]》에서 정립된 <열전>의 순서에 의하면 <후비전>, <종실전> 다음에는 창업자와 자웅을 겨룬 <군웅 열전>이 나와야 한다. 가령 《[[명사(역사책)|명사]]》의 경우 <후비전>, <제왕전>, <공주전>이 <열전>의 첫머리를 이루고 있고, 그에 이어서 한때 태조 [[주원장]]의 주군이었던 [[곽자흥]]과 그 라이벌인 [[진우량]], [[장사성]], 원나라 측 장수인 코케테무르 등의 <열전>이 제시된 다음 [[서달]], 탕화, 송렴과 같은 명나라의 개국공신들의 <열전>이 나온다. 때문에 《고려사》에도 [[궁예]], [[견훤]]의 <열전>이 수록되고, 그다음에 창업공신의 <열전>이 나와야 하지만 궁예, 견훤의 <열전>은 《삼국사기》에서 다룬 관계로 《고려사》에서는 생략되었다. 한편 [[우왕]]과 [[창왕]]은 [[조선]] 건국의 명분인 '폐가입진론'에 따라 [[신돈]]의 자손으로 취급되어 신우, 신창이라는 이름으로 '''<반역 열전>'''에 수록되었다. 물론 현대에는 '우창비왕설'의 근거가 빈약하다는 것이 중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조선시대에도 후기에 들어서는 우왕이 왕위를 부정하게 찬탈한 것이 아니라 엄연히 공민왕에 의해 아들로 인정되고, 후계자로 지목되어 왕위를 계승하였던 만큼 <반역 열전>에 수록한 것은 부당하였다는 반성이 나오기는 했으나, 《고려사》는 조선 전기에 편찬된 관찬 사서이므로 편찬 당시 조선의 공식 입장이 반영되었다. 이렇게 총 139권이다. 《고려사》의 축약판이 《[[고려사절요]]》인데, 때때로 《고려사》에 없지만 《고려사절요》에는 있는 기사도 있기에 서로 참조하는 것이 중요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