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시대 (문단 편집) == [[원 간섭기]]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원 간섭기)] 고려는 원의 내정간섭을 받게 됐지만 국체를 보존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이는 당시 국왕이던 [[원종(고려)|원종]]의 적절한 외교 정책(거래)과 오랜 저항의 결과였다. 특히 원종이 태자 시절 입조하여 직접 교섭한 [[원나라]]의 창시자 [[쿠빌라이 칸]](세조)은 세조구제(世祖舊制)안에 '불개토풍(不改土風)', 즉 고려의 풍습과 제도를 바꾸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나 외왕내제는 끝났다. 고려는 이후 몽골의 부마국이 되면서 몽골 문화가 점점 퍼져갔고 ([[몽골풍]]) 고려의 풍습도 몽골에 전달되었다 ([[고려양]]). 공물에 시달리고 원정에 동원되기도 했으며, [[카다안의 침입]] 같은 사건도 있었다. 그래도 전쟁 자체가 종식된 건 다행이었다. 원나라의 간섭과 함께 원 황제에 대한 충성을 의미하는 충성 충(忠)자로 시작하는 왕들의 "원의 부마국이 되었다.[* 여기서 몽골에 항복한 원종은 첫 왕이어서인지 그대로 종으로 알려져 있다. 나중에 [[공민왕]]이 이 왕들에게 새 시호를 바치지만, [[우왕|아]][[창왕|들]] [[공양왕|대]]부터는 [[그런거 없다|그런 거 없었다]].] 반원 자주 정책을 펼쳤다는 [[공민왕]]도 왕비는 원의 [[노국대장공주]]였다. 때문에 외국에서는 몽골 제국의 지도를 그릴 때 고려를 포함시켜서 그린다. 사실 고려가 점령이 된 건 아니어서 엄밀히 따지면 포함시키면 안되지만 [[킵차크 한국]]에 점령되거나 공물을 바쳤던 [[러시아]] 공국들 역시 포함된다. 앞서 나왔듯이 원나라 간섭의 단적인 예가 첫 충자 돌림 왕인 [[충렬왕]] 때인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두차례의 걸친 쿠빌라이의 일본 원정]]과 [[공녀]], 그리고 외왕내제 폐지다. 이름 뿐이었던 고려 왕실은 황제국의 [[부마]]로서 예전의 왕권을 어느 정도 회복하게 되었다. 심지어 충선왕 때는 원나라의 황위 계승 분쟁에 한몫을 거들어 상실된 영토와 요동 지역을 포괄한 [[심양왕]] (후에 더 높아진 심왕)을 받아서 '''고려 왕 겸 심양 왕'''으로 두배의 강역을 다스리던 시절도 있었다. 탐라 총관부와 동녕부 같은 다른 지역은 이미 충렬왕 때인 1290년에 돌려받았다. 한편 심양왕은 충선왕의 관직으로, 이후 고려 왕에게 세습되지 않고 조카 연안군 왕고에게 세습되었으며 5년간의 (명목적) 영광에 그쳤다. 그러나 [[다루가치]]나 정동행성 이문소 등 원의 간섭은 계속되었다. 정동행성은 원래 일본 정벌용 임시 기관이었으며 차츰 원나라의 고려 통감부가 되었다. 당시 고려 국왕은 부마국의 반 독립적 왕이지만 사실은 원 제국의 서열 n위 황족이기도 했다. 이 왕들은 '''고려사 최고의 막장 왕들이 된다.''' [[충선왕]]은 개혁을 하려다가 실패하고, 후에 권세를 얻은 뒤에는 고려에 돌아오지 않고 원의 수도 연경에서 학문과 수도 생활에만 몰두했으며, 양위를 받아 뒤를 이은 [[충숙왕]]도 좀 나았지만 비슷한 템포를 겪다가 결국 역시 양위, 그의 아들 [[충혜왕]]은 아예 향음에 빠져 몽골 공주까지 [[겁탈]]한 막장 왕이 되어 몽골 사신에게 잡혀가고 아버지 충숙왕이 다시 왕좌를 차지하였다가 사망한 이후에 복위했다가 다시 폐위당했다. 결국 이 시대 왕들의 모순, 즉 권력은 상대적으로 강해졌지만 정작 고려 내에서 그 권한을 이용할 수 없는 점이 있었다. 밉보이면 폐위되었다가 빌고 빌어 복위하는 과정이 반복된다. 그 점이 이 왕들의 막장화를 이끌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원나라를 등에 업고 날뛰는 [[권문세족]](부원배)의 횡포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심해졌다. * [[여몽 관계]] 문서에서도 자세한 내용을 확인 가능.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