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인 (문단 편집) === 기원과 정착 === 고려인은 19세기부터 [[프리모리예 지방|연해주]] 지역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이 기원이다.[* 1863년이냐 64년이냐는 약간의 논쟁이 있다.] [[http://koreascience.kr/article/JAKO200429734174389.pdf|연구]]. 1860년, 2차 [[아편전쟁]]이 [[청나라|청]]의 패배로 끝나고 [[베이징 조약]]이 체결되면서 러시아는 [[외만주]] 및 연해주를 할양받았다. 1869~1874년 조선 북부에서 대흉년이 발생하자, 많은 조선인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월경하여 그 이북에 아예 터를 잡고 농사를 지으며 살기 시작했고, 1871년 평안도관찰사 한계원은 정부의 승인 없이 압록강 대안의 조선인 개간지를 28개 면(面)으로 분할하여 각각 강계군에 11면, 자성군에 4면, 초산군에 11면, 벽동군에 2면 귀속시키고 항약을 설치하여 관리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동북 지방, 즉 [[만주]]와 [[프리모리예 지방|연해주]]로 이주했다. 청에서는 봉금령 조치가 이완되고 러시아는 인력 확보를 위해 조선인들의 국경 침범을 묵인하고 있었기에 조선인들의 이주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물론, 국경의 질서 유지 및 치안 문제로 청에서는 봉금령을, 러시아는 국경 통제를 일시적으로 강화하기도 했지만, 청은 1875년에 봉금령을 완전히 철폐하고 러시아도 조선인 이주 자체를 완전히 막진 않았다. 또한 조선인의 만주 - 연해주 이주를 단속해야 할 조선 정부도 통제에 실패했다. 고종대에는 연해주의 조선인 집단의 숫자가 크게 증가하였고 러시아 정부의 정책 변화는 연해주에서 조선인들이 입지를 굳히게 해주었다. 러시아 정부는 러시아 통치와 문화 수용을 거부하는 [[만주족]]과 [[한족]]의 통제에 애를 먹고 있었고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어의 사용에 거부감이 적고 러시아 정부에 어느 정도 복종하는 조선인들의 이주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지원했다. 또한 [[블라디보스토크]]에 이주한 일부 조선인들이 [[러시아 정교회]]를 받아들이는 등, 러시아 문화를 수용하던 것도 영향을 주었다. 조선을 비롯해 여러 아시아 지역을 방문한 영국인 여행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만주, 연해주의 조선인들이 번성하는 모습을 보고는 "주체성과 독립성, 영국인에 가까운 터프한 남자들로 변해 있었다. 그들의 변화는 정직한 정부 밑에서 자신들의 생계를 보호받을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라는 평을 남겼다.[[https://www.google.co.kr/amp/weekly.chosun.com/news/articleViewAmp.html%3fidxno=16247|#]] 1897년 러시아 제국의 센서스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 내에 한국어 화자가 26,005명에 달했다. 1900년대 초에는 [[그레이트 게임|영-러]] 간 갈등의 첨예화, 러시아의 남진, [[아관파천]] 등의 문제로 러시아와 조선 모두 일본과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그리고 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전한 뒤로 조선인들의 이주가 극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해 이 때부터 연해주는 한국 독립 운동의 중심지가 되기 시작했다. [[최재형(독립운동가)|최재형]]과 같이 러시아에서 큰 성공을 거둔 이주 한인 지도자들은 막 이주해 온 의병장, 독립 운동가들을 지원하고 연해주의 한국 독립 운동을 이끌었다. 특히 최재형은 [[안중근]]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의거 이후에는 권업회의 초대 회장으로 재임했다. 사실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는 조선이 일본에 협력한다고 여겨서 이주에 제약을 두려고 했지만, 이민은 계속 늘어나 1914년 기준으로 한국계의 숫자가 64,000명에 달했고 러시아 국적자도 20,000명이나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연해주의 한인들은 러시아군에 입대해 독일군과 싸웠다. 당시 독일군에 포로가 된 조선인 러시아 병사의 육성이 녹음되어 독일 박물관에 남아 있다. 당시 조선인 부대의 군가를 들어보면 "[[을지문덕]], [[이순신]]처럼 열심히 싸워 베를린을 점령하여 러시아에 은혜를 갚고, 전쟁 경험을 살려 일본을 몰아내고 조선을 해방하자."라는 내용이다.[[http://dylanzhai.egloos.com/3518061|참조바람]] 세계 대전과 [[러시아 혁명]]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연해주 한인들은 독립 운동을 벌였으며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독립군을 양성하고 1919년에는 [[3.1 운동]]에 호응해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만세 운동을 벌였다. 만세 운동 직후, 연해주 한인들은 대한 국민 의회를 결성, 임시 정부를 수립했다. 연해주만의 독자적인 정부이던 국민 의회는 독립 운동의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공론을 받아들여 [[상해임시정부]], [[한성 정부]]와 단일 정부로 통합하는데 동의했다. 그러나, 상하이, 한성과의 의견 차이가 커서 완전 통합은 이루어지지 못하였기에 대한 국민 의회는 정부 통합 이후에도 연해주의 독립 운동 단체로 운영되었다. [[러시아 내전]]이 터지자, 연해주 한인들과 유럽 러시아로 이주한 한인 노동자 단체인 고려인 동맹도 [[소련]] 정권을 지지하기로 결의했다. 1920년 4월 4일, [[일본군]]은 '백군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적백내전에 개입하고 [[러시아 극동|러시아의 극동]] 지역을 침공했다. 연해주 한인들의 독립 운동을 뿌리 뽑기 위해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과 각지의 한인 정착지들을 공격하였고 이 사건으로 최재형을 비롯해 수백 명이 넘는 한인들이 사망했다. 이를 '신한촌 사건' 또는 '[[연해주 4월 참변]]' 이라고 부른다. 4월 참변 이후, 연해주의 독립 운동은 기세가 꺾였지만 한인들은 이전보다 더 나빠진 환경 속에서도 계속해서 독립 운동을 이어나갔다. 러시아 내전 초기에 적군에 대한 지지를 표한 것과 일본군이 백군을 돕는다는 점 때문에 연해주 한인들은 붉은 군대에 합류해서 백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내전이 종결된 후, 소련 정부는 고려 혁명군을 비롯해 붉은 군대에 협력한 독립군들을 무장해제시켰다. [[한국 독립군]]의 입장에서 이것은 배신 행위였으나, [[우크라이나]] 흑군, 녹군, [[백군]]계 [[카자크|카자키]] 등, 다양한 [[소수민족]] [[분리주의]] 군대와 처절한 싸움을 벌였던 소련 정부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는 소수민족 무장 집단의 존재를 인정할 수가 없었다. 결국 독립군들은 무장해제당했으며 대한 국민 의회도 소멸, 소련 공산당의 통제하에 놓인 한인 동맹이 연해주 한인들의 유일한 자치 단체가 되었다. 소련 정부의 이러한 조치에 반발한 일부 독립 운동가들은 만주로 떠났다. 가령 대한의용군 사령관으로서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의 일원으로 백군과 싸웠던 이용과[* [[헤이그 밀사]]로 유명한 [[이준(열사)|이준 열사]]의 아들. 망국 이후 저장성 군관학교 포병과를 졸업하고 이동휘의 영향을 받아 만주로 향했으며, 대한국민회의 중책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된 항일무장투쟁에 나섰다. 국민회 소속 사관학교 교장으로 활동하고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도 참전하였으며, 이후 러시아로 가 대한의용군을 수립했다가 [[자유시 참변]] 당시 체포되어 압송되던 도중 탈출했다. 군비단 병력이 포함되어 대한의용군이 재편되자 사령관직과 사관학교 교장직을 겸하며 원동해방전쟁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후술할 이유로 러시아를 떠나 중국으로 가서 국민혁명군에 참여하고 김홍일이 국부군에 들어올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때까지는 김홍일과 같이 싸운 동지였지만, 장제스가 [[4.12 상하이 쿠데타]]로 국민당 좌파와 공산주의자를 숙청하며 [[국공합작]]이 결렬되자 국민당을 떠났다. 후에는 일본에게 잡히고 나서 한동안 연금당했다가 탈출했다. 1930년대 내내 행방이 묘연했지만 광복이 되자 38선 이남 한반도로 돌아왔고, [[중도주의]]성향인 신진당의 부당수로써 단독정부 수립 반대 운동을 하다가 김구가 암살되는 등의 사건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월북]]했다. 그리고 [[북한]] 정부 초대 내각에서 도시경영성을 비롯한 각 부처의 장관을 지내며 김홍일과는 완전히 반대편에 섰다가 1954년에 사망했다. 외증손자 조근송씨가 조사한 중국측 기록에 의하면 김일성에게 숙청되어 사형되었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사후인 1990년에 민족통일상을 받았으며, 현재는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어 있다.] [[김홍일(군인)|김홍일]]은[*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육군]] 중장, [[외무부]] 장관. 임정에 가담했다가 독립운동을 위해 러시아에서 싸웠고, 내전 종결 직전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에 가담했다. 임정과 공조하여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에 조력했고, 국부군에서 중장까지 진급하며 [[중일전쟁]] 당시 맹활약했다. 해방 이후 귀국하여 신생 대한민국 국군에 임관하여 북한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 국군 [[제1군단]]의 초대 군단장이기도 하다.] 소비에트의 배신에 격분하여 만주로 떠났고, 이후 상하이로 돌아가 [[국민혁명군|중국 국민혁명군]]에 가담했다. || [[파일:포시예트 구역.png|width=400]] || [[파일:고려인ND.jpg|width=400]] || 1927년부터 1937년까지는 아예 고려인들 위한 자치 지역이 연해주 내 포시예트라는 곳에 할당되기까지 했다. 행정상 "민족구역(Национальные районы/National District)"이라는 형태로, 고려인들 말고도 [[소련]] 내 여러 민족들이 할당받은 구역 형태[[https://ru.wikipedia.org/wiki/%D0%9D%D0%B0%D1%86%D0%B8%D0%BE%D0%BD%D0%B0%D0%BB%D1%8C%D0%BD%D1%8B%D0%B5_%D1%80%D0%B0%D0%B9%D0%BE%D0%BD%D1%8B_%D0%A1%D0%A1%D0%A1%D0%A0#%D0%9A%D0%BE%D1%80%D0%B5%D0%B9%D1%81%D0%BA%D0%B8%D0%B5|였다.]] [[일제 강점기]]로 인해 [[나라 없는 민족]]이 된 당시 고려인들에게는 반가운 일이었다. 1923년 고려인의 숫자는 10만을 넘었고, 1937년에는 17만에 이른다. 고려인 학교가 370곳, 신문도 7개나 있었으며 연해주에서 고려인들의 자치 공화국 '고려인 [[소비에트 공화국]]'이 구상되어 설치 직전까지 갔다. 이때가 연해주에서 고려인의 최절정기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