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륜화경공주 (문단 편집) == 생애 == 옹정 9년에 태어났으며 영수궁 근태비에게 양육되기도 했다. 건륭 초년, 지금의 작위인 고륜공주에 봉작되었다. 순서상으로는 건륭제의 황3녀였으나 [[효현순황후]] 소생의 동복언니인 황장녀와 [[철민황귀비 부찰씨(건륭제)|철민황귀비]] 소생의 황2녀가 모두 요절하면서 실질적으로 건륭제의 장녀였다. 건륭 12년 3월에 과이심친왕 보르지기트 색포등파이주이[* 科爾沁毅親王 博爾濟吉特 色布騰巴爾珠爾]와 혼인하였다. 당시 유일한 적녀였고 건륭제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기 때문에 혼사에 대단히 신경을 써줬다. 혼수품도 기존의 적통공주보다 훨씬 많이 받아갔고[* 내무부는 공주의 혼수를 장만하고 상자와 장막, 좌요, 호반 등을 추가로 장만하였는데 그 비용이 은 2천 5백냥이었다. 하가하기 전 내무부는 매일 먹는 식사의 예를 마련하고 화석공주와의 급식 예규에 따라 이를 참작하여 고륜공주의 정식 기준으로 정했다. 이런 예는 황귀비를 훨씬 능가하고 황후보다 조금 낮은 급이었다.], 최초로 몽골이 아닌 북경에서 남편을 데리고 살았다. 건륭제가 딸을 멀리 시집보내는 것도 꺼렸고 당시 청나라의 군사력이 굉장히 강대했기 때문에 과이심 친왕과 혼인했더라도 북경에 거주할 수 있었던 것. 훗날 같은 고륜공주인 [[고륜화정공주]]와 [[고륜화효공주]]도 화경공주의 대우를 넘지 못하였다.[* 같은 고륜공주지만 적녀는 화경공주 뿐이고 나머지는 서녀였다.] 화석공주[* 청황실에서 후궁 소생의 공주에게 내려지는 작위로 조선 왕실의 [[옹주]]와 비슷하다. 당연히 고륜공주는 황후 소생의 적녀에게 내려지는 작위로 조선의 [[공주]]에 해당한다. 서녀인 화석공주는 군왕과 같은 지위이며, 적녀인 고륜공주는 그보다 높은 친왕과 같은 지위이다.]와의 예고를 참작하여 보내니 이게 건륭제 시절 고륜공주의 표준 대접이 되었다. 훗날 건륭제에게 "유래공주격하혼의례"라는 상서가 있었다고 하나, 후대의 고륜공주들은 단 하나도 이를 따르지 않았다. 과이심 친왕 사이에 딸들과 아들 하나[* 보국공 악륵철특목이액이극파배(鄂勒哲特穆爾額爾克巴拜). 건륭제가 직접 지어준 이름이다. 어머니인 화경공주가 죽은 다음해에 죽었다고 한다.]를 두었다. 현대에도 화경공주가 살던 공주부가 남아있다고 한다. 고륜화경공주의 초정 때 건륭제는 보화전에서 몽골 왕공을 하사하였다. 결혼 할 때 건륭제는 여전히 보화전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장리(長理) · 호위(護衛) · 전위(典衛) 등 총 8명을 배속시켜 12호를 같이 보냈다. 외명부에서는 화경공주의 어머니인 [[효현순황후]]가 장춘궁에서 연회를 배풀었다. 이후 고륜화경공주는 하가했고 연회는 화경공주의 열을 절반으로 줄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