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문 (문단 편집) ==== [[일제강점기]] ==== 전근대 시절의 고문은 [[영조]] 때 들어서 일부 심한 형벌들은 폐지되었고, [[갑오개혁]] 때는 근대적인 사법 체계가 들어오는 등의 개선 여지를 보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고문은 완전히 폐지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는 고문이 더더욱 기승을 부렸다. 일본은 [[1873년]]에 고문을 폐지했지만 실제로는 [[2차대전]] 패전 이전까지 경찰관들의 불법 고문이 횡행했는데, 일제강점기 조선이라고 다를 바 없었다. 특히 일제 경찰관들 그 중에 [[특별고등경찰|특별고등경찰관들]]이 [[독립운동가]]들에게 행했던 고문은 참혹했다. [[일본 제국 육군/헌병|육군 헌병]]들의 고문 기술도 악명높았다.[* 고문의 무용성의 역사적 증거 중 하나이다. 악명만 높았지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한국의 독립운동이 지리멸렬하게 된 이유는 내분이지 일본의 강력한 고문기술이 아니다. 단적인 예로 [[김구]]는 커녕, [[김원봉]] 등 주요인물들은 잡아내지도 못했으며, [[이봉창]] 의사의 [[사쿠라다몬 의거]]를 예방하지도, 범죄자를 단죄하지도 못했다.] 특히 이 시기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잡혀온 [[종로경찰서]], [[서울서대문경찰서|서대문경찰서]], [[서울용산경찰서|용산경찰서]], [[동대문경찰서]], 본정경찰서[* 현 [[서울중부경찰서]]] 등은 악랄한 고문이 많이 이뤄졌다. 그 외에 [[서대문형무소역사관|서대문형무소]], [[대전교도소|대전형무소]], 목포형무소 등 [[교도소]]에서도 고문이 행해졌다. [[노덕술]], [[김덕기]], [[하판락]] 등의 [[고문기술자]]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잔인한 고문을 자행했고, 이 때문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곤욕을 치러야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