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양시/역사 (문단 편집) == [[고대]] == [[한강]]을 끼고 있으며 구릉지 사이로 넓은 골짜기가 많아 예로부터 논농사가 적합한 지역이었다. 다만 논농사 자체는 한강의 범람원보다는 현 고양시의 북부에 해당하는 [[덕양구]] [[삼송동]]이나 [[일산동구]] [[고봉동]] 일대에서 성행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이유는 수리시설의 미비 때문이다. 19세기 이전만 하더라도 조석작용에 의해 바닷물이 잠실 유역까지 거슬러 오를 정도였다고 하며, 그 때문에 수운은 발달했을지언정 강 인근은 오히려 논농사를 안정적으로 짓기 힘들었다. 벼를 심어도 홍수에 쓸려나가고 물이 빠지지 않아 도로 습지가 되기 일쑤였기 때문. 한강 주변의 습지대가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건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 이후부터이며, 이 당시의 수리시설은 [[경기도]] [[부천시]] 북부 등에 아직 남아있다. 이 때문에 고속도로 인터체인지 닦다가 선사시대 집터가 발견된다든지 하는 뉴스가 가끔 나온다. [[고양시청]] 1층에 가 보면 이들 선사시대에 발굴된 볍씨 조각 등을 복도에 전시해놓고 있다. [[삼국시대]] 이전에는 [[삼한]]의 토착민들이 살았다. 그러다 기원전 281년 [[중국]] [[전국시대]] 전국칠웅 중 하나였던 [[연나라]]의 [[소양왕(연)]]이 장군 [[진개]]를 위시하여 [[고조선]]을 대대적으로 침공하자 고조선은 [[요동]] 일대에서 현 [[평양시]] 일대로 중심지를 옮기게 되는데 현 고양시 지역 또한 이때 고조선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이 [[전한]]의 [[무제(전한)]]에게 멸망한 후 옛 위만조선의 영역과 영향권에는 [[한사군]]이 설치되는데 위만조선의 중심지였던 평양 일대에는 [[낙랑군]]이 설치되었고 현 고양시 지역은 현 [[황해도]] 일대에 설치된 [[진번군]]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된다. 이때 쯤부터가 [[원삼국시대]]에 해당한다. 기원전 82년 전한 [[소제(전한)]]는 한사군 중 진번군을 낙랑군에, [[임둔군]]을 [[현도군]]에 각각 병합시킨다. 낙랑군은 옛 진번군의 영역에 남부도위라는 부속기관을 설치하여 관리하였는데 따라서 현 고양시 지역은 낙랑군 남부도위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된다. 이후 전한이 [[왕망]]의 [[신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경시제]]의 [[현한]]이 신나라를 멸망시키고 잠시 들어섰다가 부하들에게 배신당한 경시제가 농민 반란군인 [[적미]]에게 피살당해 다시 [[광무제]]가 [[후한]]을 세우고 한참 뒤 또 혼란기가 도래해 [[삼국시대(중국)]]로 이어지는 등 중국에서는 연속적인 정치 혼란이 발생했는데 그 와중 요동에서는 독립세력인 [[동연]]이 들어서게 되고 한사군을 장악한 동연은 3세기 초 낙랑군 남부도위를 낙랑군에서 떼어내 [[대방군]]을 설치하고 [[공손모]]와 [[장창]] 등을 파견해 일대를 정리하였다. 따라서 현 고양시 지역 또한 대방군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된다. 현 [[인천광역시]] [[강화군]]~경기도 [[파주시]]·[[연천군]]에 걸친 지역을 영역으로 삼았던 걸로 추정되는 [[마한]]의 소국인 '''[[신분활국]](臣濆活國)'''이 이즈음부터 한사군의 통제를 받는 토착세력으로 사서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영역상 현 고양시 지역 또한 신분활국의 영향권에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분활국이 정확히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원래 고조선부터 한사군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지역은 직할통치보다는 느슨한 간접통치가 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기반이 되는 경기 북부 일대의 토착민들 또한 원래부터 계속 반자치적인 생활을 이어왔다고 추정될 뿐이다. 237년 [[위(삼국시대)]]의 [[조예]]는 [[관구검]]을 요동을 관할하는 유주자사에 임명해 동연의 마지막 군주인 [[공손연]]을 제거하도록 했으나 관구검은 [[랴오허]]도 넘지 못하는 등 성과가 시원찮았다. 238년 조위는 다시 [[사마의]]와 4만의 대군을 파견해 관구검을 지원하도록 했는데 사마의는 관구검을 휘하에 편입시키고 [[고구려]] [[동천왕]]과 연합해 공손연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이때 조위는 [[선우사]]와 [[유흔]]을 각각 낙랑태수와 대방태수로 임명해 낙랑군과 대방군을 점령하게 했다. 이에 현 고양시 지역 또한 조위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된다. 242년 동연 정벌을 지원하고도 얻은 게 없는 고구려는 조위에 불만을 품게 된다. 동천왕은 조위의 [[서안평]](현 중국 [[랴오닝성]] [[단둥시]])을 선제 공격한다. 244년 관구검과 현도태수 [[왕기]]가 역공을 가하자 [[비류수 전투]]에서 대패한 고구려는 계속 밀려나 수도 [[국내성]](+[[환도산성]])까지 초토화당하게 된다. 245년 전세를 가다듬은 관구검은 다시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공격한다. 이때 동천왕이 [[옥저]]로 달아나자 관구검은 왕기를 보내 추격하게 하였고 낙랑태수 [[유무]], 대방태수 [[궁준]]에게는 고구려에 복속하던 현 [[강원도]]와 [[함경도]] 일대의 소국들을 접수하도록 한다. 246년 왕기의 추격을 받던 동천왕은 [[밀우]]와 [[유유]]의 활약으로 왕기의 선봉장을 죽이고 겨우겨우 살아난다. 이즈음 낙랑군 부종사 [[오림]]은 본래 낙랑군이 삼한을 통치해 왔다고 주장하며 [[진한]] 8개국을 분할해 낙랑군에 속하게 하려 했다. 이때 통역이 잘못돼 마한의 군주인 [[신지]]들이 격분하였고 마침 유무와 궁준이 고구려 공격으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마한 연합군이 대방군 기리영(현 [[황해북도]] [[평산군]])을 공격하는 [[기리영 전투]]가 벌어진다. 이 기리영 전투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국가가 바로 신분활국으로 추정되는데 궁준이 전사하는 등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걸로 보이지만 결국 신분활국은 멸망하게 된 걸로 추정되며[* 혹은 그렇지 않았다 해도 이때 막대한 타격을 입어 그 사이 세력을 키운 [[백제]]에게 후에 흡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대의 소국들은 다시 한사군에 복속된다. 이때 백제 [[고이왕]] 또한 [[진충]]을 보내 낙랑군을 공격하게 해 포로를 잡아왔었는데 마한 연합군이 박살나자 후환이 두려웠는지 송환시킨다. 265년 [[사마염]]이 조위를 멸망시키고 [[서진]]을 세운다. 이에 한사군은 서진에 속하게 된다. 311년 고구려 [[미천왕]]이 서안평을 함락시키면서 서진 본토와의 교통로가 끊긴 낙랑군과 대방군은 [[월경지]]로 고립되게 된다. 313년 낙랑군이, 314년에는 대방군이 미천왕에게 차례로 멸망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