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조선 (문단 편집) === 정치 체계와 지방행정 === 미흡하나마 왕, 장군, 대부, 상, 비왕 등의 관직 제도로 보이는 것이 확인되기에 중국식의 관료제를 수입했을 것이라 예측하기도 한다. 혹은 토착 세력을 중앙 관료화시킨 이후, 중국측에서 이를 기록하는 과정에 중국 관직 제도가 투영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연과의 전쟁을 막은 예가 가진 ‘대부’라는 직위는 관직이 아닌 왕의 자문역을 이르는 말이라는 것이 통설이며, 위만이 받은 박사도 관직명인지 확실하지 않다. >'고조선에서는 10월에 무천이 열렸고, 출정에 앞서 소를 잡아 그 발굽의 형상으로 길흉을 점치던 우제점(牛蹄占)을 행했다' 7세기경의 '둔황문서'중 하나인 《[[토원책부]]》에 인용된 《[[위략]]》의 내용이 발굴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흔히 [[동예]]의 제천 행사로 알려진 무천이 고조선의 풍속이었다고 한다. 또한 소를 잡아 발굽의 형상으로 점을 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0&aid=0000303020|#]] 우제점(牛蹄占)은 《[[정사 삼국지]]》 <위서(위지)> -동이전-(東夷傳) '부여조'에도 동일하게 나오며, 장초금(張楚金)이 지은 《한원》(翰苑) 권30 <고려[* 高麗 : 여기서는 고구려를 가리킴.]조>에 인용된 《위략》(魏略)에 의하면 고구려에도 이와 같은 관습이 있었다고 하며, 한편 경상남도 창원시 웅천패총(熊川貝塚)에서 6점의 복골(卜骨)이 나온 것으로 미루어볼 때 삼한사회에도 역시 이와 같은 관습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비교하자면, 중국은 [[상나라]] 시대부터 갑골(거북이 등껍질)로 점을 쳤었고, 고조선 영역에서는 우제점(소뼈로 점을 침)이 성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방행정의 경우, 준왕이 다스리던 때, 위만을 박사에 임명한 뒤 서쪽 변경의 수호를 맡겼다는 걸로 보아 중앙집권적 행정화는 이루어지지 않고, 한 인물에게 특정 지역을 할당하는 방식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위만조선 시대에 오면 중국의 [[승상]] 제도가 '''상'''으로 낮춰져 수입된 것으로 보인다. 고조선의 '상'은 다른 국가와 달리 여러 명이었으며, 조선상 [[역계경]]이 수하에 있던 2,000명을 이끌고 고조선을 이탈해 버릴 정도로 독자적인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걸로 보아 중국처럼 관료 조직이라기보단 지방 수장과 같은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서북쪽에서 독자 행동을 했던 위만과 달리 왕과 중앙에서 협의해 일을 처리한 걸로 보아 노태돈 교수는 왕과 각 '상'들은 조정에서 나름의 회의체를 통해 의사결정을 했는데 이는 마치 훗날의 고구려가 각 부의 수장들이 상당한 자치력을 보유하면서도 임금과 함께 제가회의를 통해 국가를 이끌어가는 '부체제'와 아주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고 추정했다. 즉 고구려만큼의 고도의 부체제는 아니고 아직 초기 형태였지만 고조선 멸망 이후 간접 통치를 받았던 구려족에게서 부체제가 발전되어 고구려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사기》에는 '''비왕'''이란 관직이 나온다. >섭하(涉河)가 돌아가면서 국경인 패수(浿水)에 이르러서 마부를 시켜 전송나온 조선(朝鮮)의 '''비왕'''(裨王) 장(長)을 찔러 죽이고 바로 [패수를] 건너 요새 안으로 달려 들어간 뒤, 드디어 천자(天子)에게 ‘조선(朝鮮)의 장수(將帥)를 죽였다’고 보고했다. >---- >《사기》 <조선열전> 즉 '비왕'(裨王)은 무관임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비왕'은 흉노에서도 발견이 되며, 흉노에서의 '비왕'은 각 왕들의 분봉지 내의 부족장 정도의 성격으로 이해되는 것을 고려하면 노태돈 교수는 고조선의 경우, '상'이 왕권에 일정한 통제를 받듯이 '비왕'도 '상'의 일정한 통제를 받는 읍락의 족장으로 이해했다. 즉, 그는 비왕이 자신이 속한 읍락을 자치적으로 이끌어 나가던 족장이자, 유사시에는 자신의 읍락원들을 이끌고 참전하기에 '장수'로 이해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노태돈 교수는 고조선의 지방 행정을 '''왕(국가) > 상(자치 집단) > 비왕(읍락)'''으로 볼 수 있으며, 사회 차원에서 본다면 읍락의 비왕들은 상의 지배를 받고, 여러 상들은 왕의 지배를 받는 누층적인 지배구조였다고 본 것이다. '''장군'''이란 관직도 나오는데, 고조선-한 전쟁 당시 장군 왕겹은 한음, 노인, 참과 같이 왕검성 내에서 한나라에 투항하려고 시도했다. 그런데 고조선 멸망 이후, 장군 왕겹은 별다른 공로가 발견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봉호 1,480호의 열후로 봉해졌다. 한음이 540호, 참이 1,000호를 받은 것에 비하면 봉호가 굉장히 많은 편인데(《사기》 <건원이래후자연표>), 이는 공로와는 무관하게 한나라 조정이 그의 이용가치를 높게 평가했거나 고조선 내에서 장군 왕겹의 위치가 높았던 것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노태돈 교수는 그렇다면 장군 왕겹은 고조선 왕실의 직속 부대의 장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옳으며, '상'이 자신의 집단 주민들로 구성된 군사를 이끌고 전쟁에 참여한다면 장군 왕겹은 왕실에 소속된 직할 주민들로 이루어진 군사를 이끈 것이라고 추정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