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종(송) (문단 편집) === 황제 시절과 가족 송환, 양위 후의 삶 === 고종의 양자인 [[효종(송)|효종]]이 뒤를 이었지만 원래는 고종에게 1남 5녀의 자녀가 있었다. 고종도 아버지 휘종만큼은 아니지만 후비가 많았다. 정비였던 [[헌절황후]]가 아이를 임신한 채 [[정강의 변]]으로 금나라로 끌려갈 때 말에서 떨어져 [[유산(의학)|유산]]하고 말았다. 헌절황후는 남송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금나라의 세의원에서 사망했으며, 고종의 모후인 [[현인황후]]가 남송으로 돌아올 때 이 소식을 전했다.[* 휘종의 아내들을 비롯한 많은 황족 여성이 세의원(洗衣院)으로 보내졌다. 세의원이 금나라의 기방이고, 금나라에서 모욕을 주기 위해 송나라 황족 여성들을 이곳으로 보내 [[창녀|창기(娼妓)]]로 만들었다는 내용이 널리 퍼져있다. 하지만 송사나 금사에 기록된 내용이 아니다. 정사가 아닌 야사이다.] 자칭 유복공주라는 사람이 자신이 금나라에서 탈출한 고종의 누이라고 사칭한 이야기가 인터넷에 퍼져있는데 이것은 정사가 아니라 야사이다. 송사 환관 풍익전에 유복공주를 사칭한 사람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나머지 자세한 이야기는 그냥 민담이다. 현비 반씨가 낳은 [[외아들]] 원의태자 [[조부(남송)|조부]]가 있었다. 1130년, 묘부와 유정언 등이 고종을 [[협박]]하여 강제로 퇴위시키고 어린 조부를 황제로 옹립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이 바로 묘유병변으로, 묘부와 유정언 등은 재상 장준에 의해 제거되고 고종이 복위하였다. 조부는 위국공으로 강등되었고, 이때의 충격으로 인해 불과 3세의 나이에 요절하였다. 이후 고종은 아이를 갖지 못했다. 왕위에 있는 동안 다시다난했기 때문에 스트레스 때문에 불임이 된 걸 수도 있다. 양주 행궁에서 후궁들과 즐기다가 금나라 군대가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놀라 장강을 건너 도망친 적도 있다. 금나라의 정예군이 장강을 넘어와 항주를 함락시키자 단신으로 남중국해로 도망쳐서 망망대해를 떠돈 일도 있었다. 조부를 잃은 후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등 갖은 노력에도 자녀를 얻지 못한 고종은 종실 중에서 양자를 들여서 황태자로 삼아야 했다. [[태종(송)|송태종]]의 자손은 유독 귀했다. 태종의 아들이 요절한 경우도 많았고, [[정강의 변]]으로 태종의 후손이 [[금나라]]로 많이 끌려갔다.[* 대가 끊긴 것이 아니라 황위 계통이 끊긴 것이다. 당장 태종의 후손으로는 남송의 재상이었던 [[조여우]]가 있는데 이 사람은 태종의 폐태자 조원좌의 후손이었다.] 태종의 후손들이 귀했던 상황에서 금나라를 다녀왔던 신하들이 [[태종(금)|금태종]]의 모습이 생전 태조 조광윤과 닮았다고 말했다. 나라에서는 죽은 태조가 동생 태종에게 빼앗긴 제위를 되찾으려고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고종은 이를 하늘의 뜻으로 생각하고 태종의 형 [[태조(송)|송태조]]의 자손에게 황위를 돌려주기로 결정하였다. 따라서 태조의 후손 중 2명을 선별하여 자신과 [[헌성자열황후 오씨]]의 양자로 입적시켰다. 이때 태조의 차남 [[조덕방]]의 6세손 조백종(趙伯琮)을 조신으로 [[개명]]시키고 양자로 삼았고, 조백구(趙伯玖)도 양자로 삼고 조거로 개명시켰는데 이중 조신이 그나마 남송의 중흥을 이끈 [[효종(송)|효종]]이다.[* 의도야 어찌됐건, 안보 불안이 심각했던 상황에서 사후 중대한 문제가 될 수 있었던 후계 문제를 생전에 확정하여 정통성을 확립하고 양위를 통해 안정적으로 승계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했음은 분명 적절한 판단이었다.] 고종은 정통성 문제로 친아버지 휘종과 이복형 흠종은 물론 다른 황실 가족의 송환에 소극적이었다. 심지어 친어머니 위씨도 처음에는 송환을 그닥 반가워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정강의 변 이후 생각보다 빨리 고종이 즉위하고 임안을 수도로 삼아 새로 조정을 꾸리고 송나라가 재건되자 금나라는 포로로 이용 가치가 떨어진 휘종과 흠종을 조용히 송환하려고 했는데, 고종은 이 제안도 거절했다. 이는 이해가 충분히 되는 일이다. 엄격한 적장자 상속제와 예율을 적용하는 유교국가 송나라에서 상황인 아버지 [[휘종(송)|휘종]]과 적장자[* 고종의 모후였던 [[현인황후 위씨|현인황후]]는 입궁할 당시 휘종의 궁녀였다. 1107년에 휘종과 현인황후 사이에 고종이 태어날 때 고종은 휘종의 서자였다.]인 이복형 [[흠종(송)|흠종]]은 고종에게 위협이 될 수 있었다. 휘종이야 자기가 때려쳤으니 그렇다 쳐도 적장자로 태어나서 황태자로 있다가 제위를 적법하게 이어받은 흠종은 별다른 결격사유가 없으므로, 복귀하면 흠종이 원하지 않아도 황위를 돌려줘야 하는 상황이 될 수 있다. 위기 상황에서 포로로 끌려가는 아버지와 형을 내팽겨치고 함부로 황제 자리에 올랐다고 문책당하고 재수없다면 황위 참칭자로 비참하게 죽을 수도 있다는 등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훗날, [[명나라]] 시절 [[정통제]]가 [[토목의 변]]으로 잡혀갔을 때 이복동생 [[경태제]]가 등극해 위기를 수습했지만, 송환된 정통제가 경태제의 와병을 틈타 [[탈문의 변|복벽을 단행하고 경태제는 폐위당한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더군다나 정통제는 황위에 복귀한 뒤 경태제 옹립에 공이 큰 [[우겸]][* [[우겸]]은 위기 수습을 잘해낸데다 청렴하고 나라에 충성하여 [[정통제]]가 죽인 뒤에 후회할 정도로 훌륭한 신하였지만, 정통제에게는 역적일 수밖에 없었다.]을 죽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송 고종을 옹립한 신하들 역시 휘종과 흠종의 귀환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송나라가 금나라와 강화한 뒤 휘종의 시신만 귀환하였다. 고종의 정통성에 걸림돌이 되는 형 흠종과 적모 현숙황후 정씨는 죽어서도 고국 땅에 돌아오지 못했다. 고종의 친모 위씨는 이때 송나라로 귀환했고 임안의 궁궐에서 20여 년 동안 호화롭게 살았다. 이후 완안량이 변량으로 천도했고 남송을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하였음에도, 조구는 전혀 이를 대비하지 않았다.[* 이후 [[채석기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송 효종 시기에는 북벌을 위해 노력한 [[우윤문]]이 금에 사신으로 갔을 때 금군이 배를 통해 변경 지역으로 물자를 운송하는 것을 보고 금군의 남침을 간파했으나 남송 조정에 의해 무시당하였다.] 위씨는 휘종의 후비로 금나라 오국성에 있을 때 휘종의 다른 후비였던 귀비 교씨와 의자매였다. 송환이 결정되자 교씨는 위씨를 축하해 주었다. 교씨는 울면서 자기는 돌아가진 못해도 위씨에게 이곳에서의 생활과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고 간곡히 말했다. 위씨는 잊지 않겠다고 말했고 다음날 아침에 금나라 군대의 호위를 받아 송나라로 가는 마차에 올랐다. 이 때 흠종 역시 서모 위씨에게 송나라로 돌아가면 동생 고종에게 자신은 '황제 자리 따윈 필요없고 그냥 평범하게 살겠으니 제발 고향 땅에 돌아가게만 해달라.'고 울면서 말했다. 위씨는 흠종에게 그러겠다고 말하고 마침내 귀향길에 올랐다. 당시는 한여름이라 무척 더웠는데 짜증이 난 금나라 군사들이 그냥 다 때려치우고 돌아가려고 했다. 위씨는 이대로 돌아가면 다시는 탈출할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여 송나라에 도착하면 은상을 베풀겠다 약속하고 사자를 보내 장준에게 재물을 빌려달라 요청했다. 그러나 장준은 함부로 나라의 재산을 쓸 수 없다면서 거절했다. 위씨는 간신히 송나라로 돌아와서 약속한 은상을 겨우 베풀 수 있었다. 그리고 마중 나온 고종에게 이 사실을 고자질했다. 분노한 고종은 장준을 죽이려고 했지만 좌우의 만류로 포기했다. 위씨는 돌아와서 연일 호화 잔치를 열었는데 차츰 고달프고 힘들었던 금나라에서의 연금 생활과 교씨, 흠종 같은 문제는 잊어버렸다. 처음에는 흠종 송환을 몇 번 얘기했지만, 나중에는 그냥 덮었다. 흠종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고 오국성에서 생을 마감했다. 관에 실려 돌아온 휘종은 영우릉에 안장되었다. 위씨는 아들 고종과 호화로운 잔치를 열면서 남편 휘종이 어쩌다가 나라를 잃었는지 생각하지 않았다. 죽은 후에도 호화로운 장례로 영우릉에 합장되었다. 고종은 [[1162년]]에 양위했으며 [[1187년]]에 죽을 때까지 25년 동안 상황으로 지내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겼다. 죽은 후에는 영사릉에 안장되었는데 다른 남송의 황릉들처럼 남송이 망하고 [[1285년]] [[양련진가]]가 [[도굴]]했다. 당연히 이때 황제와 후비들의 유해는 황야에 버려졌는데 휘종과 위씨가 합장된 영우릉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만 이건 [[원나라|원]]에서도 문제가 되었고 양련진가는 결국 처형당했다.[* 원나라 황실의 입장에서도 황족의 무덤을 맘대로 도굴하는 짓은 곧 자신들의 황권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를 사전에 처단하기 위해 도굴꾼들을 적발하여 수시로 처형시켰다.] 자칭 유복공주라는 사람이 자신이 금나라에서 탈출한 고종의 누이라고 사칭했다는 이야기가 인터넷에 있는데 정사가 아니라 야사이다. 송사 환관 풍익전에 유복공주를 사칭한 사람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나머지 자세한 이야기는 그냥 민담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