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공군항공과학고등학교 (문단 편집) === 역사와 미래비전 === '''1968년 [[1.21 사태|1·21사태]]'''로 국군에 급격한 병력소요가 생기게 되었다. 군 내부적으로 공군에 [[실미도 사건]]으로 유명한 [[684부대]]가, 또한 육해공군 '''[[제2사관학교|2사관학교]]'''와 '''공군간부학교'''가 창설되었고, 외부적으로는 [[예비군/대한민국|향토예비군]]이 생기게 되었다. 공군2사관학교와 조종간부후보생 제도를 통해서 조종사 수급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지만 보다 근본적이고 원천적인 문제의 해결이 시급했다. 즉 전투기의 작전통제와 관제 업무를 담당하는 통제사(기사)와 관제사, 최첨단 전투기와 각종 통신장비의 운용과 유지보수를 책임지는 정비사 등의 전문기술인력 소요 또한 엄청나게 늘어났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문기술인력을 안정적으로 양성하기 위해서 전국의 중학교 졸업자(예정자 포함)를 대상으로 ''''하사 임관 2년 후 중사진급''''이라는 당시로서는 대단히 파격적인 여러 가지 우대조건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여 전국에서 구름같이 모여든 수많은 지원자 중에서 우수한 인재를 엄격하게 가려서 선발하였고, 이들을 '''1·21사태''' 이듬해인 1969년 5월에 공군간부학교 제1기 을종간부후보생으로 입교시켜 공군의 항공기술전문인력으로 양성하여 배출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학교를 얼마나 급하게 만들었는지 1970년이 되어서야 '''공군기술고등학교 설치법'''이 제정·공포되었고, 이 법에 따라 1971년 2월에 간부학교를 해체하고 공군기술고등학교로 개명했다. 그래서 학교 설치법 제정·공포 이전에 선발절차가 진행되었던 1~3기생을 과거 초창기에는 '을종간부후보생'으로 호칭했으며, 약칭으로는 '을간'이라고 했다. '을간'이라는 약칭은 1970년대 후반기인 1977년경까지 공군의 각 부대에서 비공식적으로 통용되기도 했다. 1988년에 [[공군교육사령부]] 예하의 모든 소속 부대가 경남 진주시로 이전하면서 공군기술고등학교 역시 대전에서 진주로 이전하여 18기생부터 진주에서 졸업하게 되었다. 2006년에는 학교 명칭이 공군항공과학고등학교로 변경되어 오늘에 이른다. 초창기 공군간부학교 시절에는 항공전문기술인력 양성을 위한 기반시설이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은 아주 대단히 열악한 교육환경이었다. 그러나 공군장교 중에서 특별히 엄선되어 구성된 매우 우수한 능력을 갖춘 교수진의 엄청난 열정과 헌신으로 항공전문기술 인력을 양성하는 엄격하고도 훌륭한 양질의 교육과 훈육이 잘 이루어져 1~3기 초창기 졸업생의 강인한 군인정신과 우수한 자질이 튼실하게 배양되었다. 당시의 엄정함을 넘어서 일견 혹독하기까지 했던 을종간부후보생의 군기와 교육훈련은 반백 년의 세월이 흐르고 있는 현재 공군 내에서는 누구나가 인정하는 조금은 아릿하면서도 아름다운 '전설'이 되고 있다. 이러한 공군항과고의 초기 역사와 배경에서 배출된 1~3기 졸업생의 항공전문 지식을 갖춘 유능한 자질과 강인한 군인정신 그리고 성실한 군복무 자세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후배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고 있으며, 21세기 최첨단 과학기술전쟁에서 대한민국 국가안보의 핵심 주력인 공군과 공군항공과학고등학교의 성장과 발전에 절대적인 기여를 하였고 또 그 밑거름이 되었다. 이와 같은 역사와 배경에서 공군항공과학고등학교는 '''21세기 항공우주시대 軍 기술분야 전문인력 양성'''이라는 교육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비전체계를 설정하여 한 단계 더 높은 성장과 발전을 향해서 전체 교직원과 재학생 그리고 졸업생이 합심하여 총력을 다하고 있다. [[파일:공군항과고 비전체계.png]]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