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공민왕/생애 (문단 편집) == 위기 == 하지만 공민왕의 시대는 그야말로 내우외환의 난세였다. 북쪽에서는 원의 쇠퇴로 말미암아 일어난 한족 반란군인 [[홍건적]]이 침입해 들어와 수도 개경을 함락하면서 위세를 떨쳤다. 이때 공민왕은 왕비 노국공주와 함께 [[안동]]까지 파천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남쪽에서는 왜구가 극성을 부려 남해안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수도 개경 근처까지 침략했다. 내부적으로는 [[권문세족]]의 전횡과 가뭄이 겹쳐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이쯤 되면 그냥 난세가 아니라 '''헬게이트 수준'''으로 봐야할 정도. 이럴 때 군주가 굳건한 태도로 일관되게 정책을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지만, 예술가적인 예민한 기질을 타고났던 공민왕은 이렇게 급박하고도 엄청난 압박이 가해지는 국제 정세와 국내 상황을 견뎌낼 수가 없었다. 원 - 명 교체기를 틈타 제도를 개혁했지만 원이 제동을 걸면 곧바로 다시 원위치되거나 무마되는 등 상당한 난항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존 기득권 세력이었던 [[권문세족]]들의 반발은 실로 엄청나서 [[기황후]]의 오빠인 기철이나, 딸들을 원 고관에 바치고 권세를 누리던 부원배 일당들과 지독하면서도 힘겨운 싸움을 해야 했다. 이들은 [[충목왕]]과 [[충정왕]] 때 추진된 개혁을 무산시켰던 장본인들이었으며, 막대한 토지와 노비,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결국 왕은 원이 혼란스러운 틈에 기습적으로 이들을 주살하고 토벌한 끝에야 간신히 숙청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곧바로 대규모의 기근과 [[홍건적]]·[[왜구]]의 침입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졌다. 왜구는 고려 수군을 궤멸시키고 [[개경]] 인근까지 북상하여 대살육을 벌였고, 홍건적은 2차 침입 때 수도 개경을 함락시킨 후, 궁을 불사르고 노략질을 일삼는 등 온갖 만행을 자행했으며, 공민왕은 [[안동]]까지 몽진해야 했다. [[정세운(고려)|정세운]], [[안우]], [[김득배]], [[이방실]]의 활약으로 간신히 개경을 수복하며 홍건적을 몰아내는데 성공하기는 했지만 그들마저도 간신 [[김용(고려)|김용]]이 꾸민 모략으로 인해 살해당했다. 군사권이 무장들의 손에 놓였던 상황에서 심복으로 믿고 있던 김용의 반란은 공민왕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더군다나 김용의 반란, 즉 [[흥왕사의 변]]으로 공민왕의 최측근 세력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이때 공민왕의 큰 신임을 받고 있었던 김용마저 최영의 손에 죽음을 맞이하는데, 이것은 공민왕에게 매우 치명적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