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과인 (문단 편집) == 寡人 == > 惟予'''寡人''', 非敢曰憫恤我元元, 懷保我元元, 克盡憂民之方, 而至若時雨、時暘之或愆, 冬寒、夏暑之曰咨, 耿耿一念, 實未嘗暫弛于中。 > >오직 [[정조(조선)|나]] '''과인(寡人)'''은 감히 나의 백성들을 돌보아 구휼하고 나의 백성들을 잘 보존시킬 것을 생각함에 있어 능히 백성을 위해 걱정하는 방도를 극진히 했다고 할 수 없지만, 때로 비와 햇볕이 정상에 어긋나거나 겨울의 추위와 여름의 더위가 이변을 일으키는 데 대해서는 잊지 않고 걱정하는 한 마음이 실은 일찍이 잠시도 가슴 속에서 해이된 적이 없었다. >---- >[[https://sillok.history.go.kr/id/kva_10301001_002|《정조실록》 7권, 1779년(정조 3년) 1월 1일 병술 2번째 기사.]] {{{+1 [[寡]][[人]]}}} [[조선왕]] 또는 [[춘추전국시대]] [[제후]]들이 스스로를 가리켜 사용한 1인칭 대명사. [[맹자]] 양혜왕편에 나오는 "寡德之人"(과덕지인)의 준말로 '덕이 적은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백성을 잘 돌보지 못하여 곡식보다 못하다'는 불곡(不穀)과도 일맥상통한다. 고(孤) 또한 마찬가지로 왕과 제후들이 스스로를 낮추어 이르는 겸칭이다. 마찬가지로 임금이 자신을 가리키는 [[짐(대명사)|짐(朕)]]과 혼동되기도 하나, 짐은 [[천자]]인 [[황제]]가 사용하는 호칭이었으므로 제후국 왕은 사용할 수 없는 말이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로. [[신라]]나 [[고려]] 때는 [[외왕내제]]를 했으므로 과인과 짐을 혼용해서 사용했고[* [[진흥왕 순수비]] 중에 짐이라고 적은 경우와 과인이라고 적은 경우가 모두 전한다. 고려사 성종9년의 기록을 보면 [[성종(고려)]]이 스스로를 칭할때 과인과 짐을 혼용하였다. [[예종(고려)]]은 자신의 동생인 왕효의 묘지명에 스스로를 칭할때 짐과 과인을 혼용해서 사용하였다. [[https://cafe.naver.com/booheong/88414|출처]] ] 고려 말 [[원간섭기]]와 [[조선시대]]에 과인을 쓰게 되었다. 다만 조선의 영조는 말년에 짐이란 표현을 공공연히 썼다. 그만큼 왕권이 강력했다는 상징으로 받아들여진다. 이 외의 왕과 제후들은 앞서 말한 과인, 불곡, 고와 같이 자신을 겸손히 낮추는 표현이어야 비로소 사용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를 낮춰 부르는 말인만큼 한국 사극에 나오는 것처럼 무분별하게 조선의 국왕들이 과인(대한제국 이후로는 짐)이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자주 쓰는 것은 아니었다. 주로 자책을 하거나 겸양할 때 등 스스로를 낮춰야 하는 상황에서 주로 쓰고, 평소에는 '나' 를, 정확히는 나 여(余) 자나 고(孤)를 많이 썼다.[* 중국 사극에서는 이를 잘 반영하여 제후왕들이 스스로를 낮출때만 과인이라 칭하고 평소에는 고(孤)를 많이 쓴다. 비슷하게 [[청나라]] 황제들도 일상적으로는 짐보다는 현대 일반인의 중국어와 같이 나(我)라고 말했다.] 다만 余는 '나'라는 뜻을 가진 한자식 표현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나라고 말하고 기록할 때 여라고 했는지 혹은 말 할 때도 여라고 했는지는 알기 어렵다. 대한제국의 고종은 황제 즉위 전에는 스스로를 고(孤)라고 칭하기도 했다. 참고로 왕후가 본인을 낮추어 부르는 1인칭 대명사로는 '고과(孤寡)'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