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과천시/역사 (문단 편집) == 개관 == 과천이라는 지명은 조선 시대 당시 '''과천현'''에서 유래되었는데 [[1914년]] [[일본 제국|일제]]에 의해 [[부군면 통폐합|시흥군에 흡수당했다]]. 이때의 과천현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부(노량진, 사당동, 동작동, 흑석동), [[서초구]] 대부분[* 내곡동을 행정동으로 하는 3개 법정동인 내곡동, 염곡동, 신원동을 제외한 서초구 전역이었다.], [[관악구]] 남현동과 [[경기도]] 과천시 전역, 그리고 [[안양시]]와 [[군포시]]의 대부분을 점하고 있었다. "겁많은 [[선비]]는 ([[과거]]시험 보러갈 때) 과천부터 긴다"라는 [[속담]]처럼 서울의 관문으로 여겨지나 그 과천이 지금 과천이 아니라는게 함정. 물론 [[인덕원역|인덕원]]-[[선바위역|선바위]]-[[남태령]]길을 넘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말이다.[* 참고로 문제의 인덕원이 있는 안양시에서 편찬한 안양시지에서는 안양시가 옛 금천현과 과천현의 결합이라고 적고 있다.][* 다만 정조 때 남태령길(과천군쪽)이 아닌 시흥동([[시흥군]]쪽) 경유 길이 별도로 개설되었다. 이 길이 현재의 [[시흥대로(서울)|시흥대로]]-[[경수대로]]와 선형이 비슷하다.] 조선시대에는 과천현감은 평안(평양)감사, 나주목사와 함께 지방관으로서 3대 요직 중 하나였다고 한다. 옛 과천군은 남태령 고개를 기준으로 남, 북으로 갈라져있었지만 조선후기 [[시흥행궁]] 건설 이전까지 남부지방에서 서울(한양)으로 가는 주요 길목에 있던 고을이었기에 남태령 이북이 다른 고을로 분리 합병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사실 한강 건너편에 있는 [[용산구]]도 고려 초기까지엔 과천(과주)의 일부였다. [[공무원 시험]] 한국사 강사들이 조선시대 군현의 예시로 과천현을 빗대는 경우가 많은데, 공시족의 성지인 [[노량진동|노량진]]이 과천현 소속이었기 때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