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곽정 (문단 편집) === 16년 후의 곽정 === 여전히 양양성에 머무르며 몽골군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났으나 [[곽부]]가 [[양과(사조삼부곡)|양과]]에게 저지른 일이 언급되기만 하면 이제 다 클 대로 큰 딸이나 사위가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로 격노해서 호통을 치는 바람에, 집안 사람들은 양과에 대해 아예 언급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덕분에 [[곽양]]이나 [[곽파로]]는 양과와 곽씨 집안의 과거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자라나게 되었다. '''아직도''' 정식 관직에 오른 것은 아니지만, 오랜 세월 동안 양양성을 앞장서 지켜온 대협으로서의 명성이 너무나 높은 나머지 민심과 군심을 확 휘어잡고 있다. 과장 좀 섞어서 '''양양 태수는 없어도 되지만 곽정은 없으면 안 되는''' 수준. 신분은 어디까지나 양양성의 빈객이나, 양양성 안무사 여문환의 이름을 써서 성 내의 온갖 군사적 명령을 도맡아 내리고 있고 병사들도 이를 잘 알고 있다. 겸손한 인품은 여전해서, 황용이 이름 모를 누군가가 자신들이 영웅대연에 초청했는데도 거절한 고수들을 양양성으로 불러모으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주자 '''"그렇게 발이 넓은 사람이라면 우리도 잘 사귀어둡시다!"''' 같은 말을 하며 자존심이 다친 모습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심지어 그 수수께끼의 인물이 여러 군웅들을 이끌 수 있다면 아예 그를 중원 무림의 맹주로 추대하면 되겠다고 좋아하기까지(…). 사파의 무리들이 만일 좋지 못한 꿍꿍이로 방문하면 무공으로 상대하면 그만이라는 호기로운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아는 것도 많고 근심도 많은 황용에 비하면 ''''옳은 일을 하는 중이니 거리낄 것도 없고, 나쁜 놈들이 오면 맞서 싸우고, 좋은 이들이 오면 벗으로 사귄다.'''' 같은 단순한 마음가짐을 유지하는 중. 하긴 몽골의 대군과 10년도 넘게 줄다리기를 하려면 그 정도로 심플한 자세가 적절할 것이다(…). 이후 [[양양성 전투]]에서도 원숙한 무공 실력을 선보이며 대활약을 했다. 황약사의 이십팔수대진(二十八宿大陣)[* 잘 숙(宿)자는 별자리의 뜻으로 읽을 때 '수'로 읽는다.]의 일익을 맡아 지휘하였으며, 금륜법왕이 곽양을 인질로 삼아 투항을 종용하였을 때도 대의를 중요시하여 곽양에게 사죄하면서 투항을 거절한다. 이후 양과가 곽양을 구해오자 곽양을 구한 것보다도 오히려 양과가 공을 세운 것에 더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양과를 칭찬한다. 이에 양과는 울먹거리며 수십년이 지난 끝에야 겨우 말할 수 있게 되었다면서 '이는 모두 백부님께서 어린 시절부터 저를 깨우쳐 주신 덕택입니다'라고 진심을 말한다. 제3차 [[화산논검]]에서는 [[천하오절]]의 한명이 되며, [[주자류]]의 발상으로 홍칠공의 제자로서 북개의 별호를 이어받아 북협(北俠)의 별호를 가지게 된다. 참고로 곽정 때문에 여문덕-여문환 형제의 이름값이 많이 깎였다는 인식이 있는데, 이는 반만 맞는 말이다. 실제 역사에서 두 사람은 유능한 편이라 몽골군에 맞서 양양을 6년이나 지켰고(여문덕은 도중에 병사), 몽골군조차 이들의 능력을 인정하고 '저렇게 뛰어난 장수를 죽게 하기엔 너무 아깝다. 항복시켜서 우리가 귀하게 써야 한다.'라는 논리로 항복을 권하였을 정도였다. 병력과 물자의 부족으로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여문환이 결국 항복한 것도 사실 큰 잘못이라고 따질 수는 없지만… 유능한 것과는 별개로 인성적으로 문제가 많아서 간신 [[가사도]]에게 아부하며 결탁하였고, 남송의 다른 명장인 유정을 배척하여 그가 원나라에 투항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이 사람이 남송 공략에 관한 전략을 내놓았고 실제 지휘를 맡았다는 걸 생각하면[* 몽골군은 기마민족이라 원래 수전에 능하지 않았다.] 여씨의 삽질은 공로 이상이다. 게다가 양양 수비에서 여문덕은 다른 실책을 저지르기도 했는데, 몽골인들이 뇌물을 주면서 양양성 근처에 장터를 짓겠다고 하자 그걸 허락한 것. 당연히 장터는 훼이크였고, 실제로 지어진 것은 양양성을 공략하기 위한 거점이었다.[* 당시 여문환조차도 이 사태를 어느 정도 예견하고 두 번이나 편지를 보냈지만 여문덕의 부하들이 그걸 씹었다. 결국 거점이 거의 지어진 시점에서야 그 편지를 알게 된 여문덕은 자신이 나라의 일을 망쳤다고 한탄한다.] 이때문에 후세 명나라에서는 "양양의 화는 여문덕이 자초한 것이니 싸그리 멸족해도 시원치 않다"는 흡좀무한 평가가 나올 정도. 이쯤 되면 여씨 형제의 포지션은 유능한 [[원균]] 정도가 되시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