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관롱집단 (문단 편집) === 발흥 (북위에서 북주까지의 시기) === [[북위]] [[태무제]] 연화 연간([[432년]] ~ [[435년]])에 [[유연]]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수도인 평성(平城, 현재의 [[산시성(산서성)|산시성]] [[다퉁|다퉁시]]) 이북의 장성연선(長城沿線, 현재의 [[내몽골 자치구]] 남쪽에서 [[허베이성]] 북부 일대)에 여러 개의 진(鎭)을 설치하였다. 그중 비교적 중요한 진은 회삭진(懷朔鎭), 무천진(武川鎭), 무명진(撫冥鎭), 유현진(柔玄鎭), 옥야진(沃野鎭), 회망진(懷荒鎭)의 육진(六鎭), 또는 북진(北鎭)이었다. 북위 조정은 일부 선비 귀족들을 육진으로 옮겨 그들로 하여금 진민(鎭民) 및 무사(武士)가 되도록 하였고, 진민 위에는 진장(鎭將)을 두어 해당 지역의 군사 및 정치를 관할하게 하였다. 당시 육진의 지위는 높아 육진의 진민인 자는 상당한 영예를 누렸으며, 또한 사환(仕宦), 복제(復除, 부역을 면제함) 등의 특권을 누렸다. 그러나 북위 [[효문제]] 때 수도를 [[뤄양시|낙양]]으로 옮기자 육진의 중요성은 예전만 못하게 되었다. 멀리 변경에 있는 육진의 진민들의 한화는 지체되었고, 경제나 문화 부분에서도 점차적으로 약세를 보였다. 또한 효문제의 개혁 정책에 따라 육진이 누리는 특권은 취소되었고, 사회에서 차지하는 계급 또한 대폭 하락하니 도리어 남쪽으로 옮겨가 한화된 선비인들에 비해 차별 대우를 받게 되었다. 조정은 심지어 범죄자를 육진의 병사로 배치시켜 육진을 유배지와 같이 취급하였고, 해당 지역에서 개혁에 반감을 가진 자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북위 [[선무제]] 때 육진에 기근이 들자 마침내 [[육진의 난]]이 일어났으며, 북위 전국이 심각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육진의 난에서 이득을 취한 회삭진 출신의 한화된 선비인 [[고환(남북조시대)|고환]]과 무천진 출신 선비인 [[우문태]] 두 사람은 각자 황제를 옹립하여 북위를 [[서위]]와 [[동위]]로 분할하였다. 우문태는 같은 무천진 출신을 금군(禁軍)으로 편성하고 [[부병제]]를 실시하였으며, 무천진 출신 인물에게 팔위주국대장군(八位柱國大將軍, 약칭 [[팔주국]])과 막하의 십이대장군통령(十二大將軍統領)의 직위를 부여하니 서위의 정권은 완전히 무천진 사람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서위는 관중과 농서 지역을 주요 근거지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우문태는 관중을 위주로 한 정책을 실시하였고, 이에 서쪽으로 옮긴 선비 귀족과 원래 산동(山東, 현재의 [[산시성(산서성)|산시성]], [[허베이성]], [[허난성]])에 본적을 둔 일부 사족들로 하여금 관롱으로 본적을 고치도록 하였고, 또한 해당 지역에 원래 있었던 사족들을 중용하여 점차적으로 하나의 새로운 관중사족(關中士族)을 형성하였다. 관중사족은 경조(京兆) 위씨(韋氏), 하동(河東) 배씨(裴氏), 하동 류씨(柳氏), 하동 설씨(薛氏), 홍농(弘農) 양씨(楊氏), 경조 두씨(杜氏)를 대성(大姓)으로 하였다. 팔주국과 관중사족이 바로 관롱집단의 시초이다. 팔주국 가문은 우문씨 일족을 따라 동위에 대항하였으며, 마침내 [[북주]]를 건국하여 [[북제]]를 멸망시키고 북방을 통일하는 큰 전공을 세웠다. [[당나라]] 대에 이르러서도 사람들 사이에서는 팔주국 가문의 영예가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가 되어, "현재 문벌이라 칭하는 자들은 모두 팔주국 가문을 받드는구나. 당시의 영광이여, 이와 비교할 수 없으리!"[* 주서 기재(記載), 今之稱門閥者, 咸推八柱國家。當時榮盛, 莫與為比。]라는 말이 있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