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관학파 (문단 편집) == 특징 == 존재시기가 너무 짧았지만(불과 50년) 태조 대에서 문종 대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조선 초기 찬란한 문화적 성취 대부분에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업적은 [[세종대왕|세종]] 시기로 대표되는 왕권과 신권의 적절한 조화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새 왕조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서 민심을 얻으려 노력했으며, [[고려]]/[[불교]]를 [[조선]]/[[유교]]([[성리학]])으로 갈아치우며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구시대의 악풍습 쇄신이 병행된 덕택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실무에 있어서도 후대의 [[사림파]]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세종대왕 시대의 양전 정리 사업을 후대에는 도저히 이런 걸 어떻게 했는지 [[수학]]적으로 감도 잡을 수 없었다고 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들은 이름부터가 관학(館學)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실무능력을 중심으로 성립된 집단일 뿐 아직 성리학은 초기단계에 불과했던지라 사상적으로는 유학에 깊지는 못했다. 때문에 겉으로는 숭유억불을 주장하고 유교를 국시로 삼아야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실제로는 유학을 깊이 익히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더 문장을 아름답고 완벽하게 만들 것인가를 궁리하고, 스님이랑 놀거나 하는 경우가 수두룩했다.[* 이런 경향은 신진사대부 출신 관학파보다는 문벌귀족에서 관학파로 흡수된 케이스에서 심했다. 대표적으로 진주강씨 출신인 강회백이 대표적.] 물론 후기 사림파 뺨치게 유교원리주의자였던 [[정도전]]이나 [[윤소종]] 같은 인물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이 그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