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관학파 (문단 편집) == 몰락 == 관학파는 [[계유정난]] 이후 [[훈구파]]와 은둔 세력(절의파, 청담파 등)으로 갈라지고, 이후 훈구파와 [[사림파]]로 대표되는 관료간의 힘싸움이 시작된다. 계유정난 이후에 [[집현전]]이 혁파되고, 세조 시절때 정체당하다가, 1463년에 [[홍문관]]이 설치되고 1478년에 홍문관의 기능을 확대함으로써 [[성종(조선)|성종]] 시절에 관학이 다시 한번 전성기를 맞았다. 하지만 1504년에 [[갑자사화]]에 대한 여파로 [[연산군]]에 의해 홍문관이 폐지되었고, 1506년에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고 홍문관이 부활했다. 그러나 [[중종(조선)|중종]]은 정치 판단력이 낮은 편이라 잦은 옥사로 재위기간 내내 불안정했고,[* 물론 중종은 연산군때 갑자사화처럼 신하를 많이 죽이지 않았으나 옥사가 자주 일어났다는 것은 사실이고, 정치적으로 안정 기간이 10년 내외 수준이라서 중종 재위 내내 정치가 불안정했다.] 훈구파들도 자기네끼리 서로 편을 나눠, 정치 투쟁을 벌였던 지라, 관학이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중종 시절에 홍문관이 성종 시절때처럼 국왕 자문과 학술 연구 기관으로 제대로 된 기능을 활약하지 못했으며, 연산군과 중종 시절에 이어진 관학에 대한 관심 부재로 관학은 암흑기에 빠졌다. 관학이 정체되다 보니, [[성균관]]과 [[향교]]는 점점 성리학을 연구한 사림파들이 차지했다. 그리고 관학을 발달시키기 위해 왕이 학문을 좋아하는 능력이 필요한데, 왕들이 아무리 관학 진흥책을 펼쳐봐야 결국 태종이나 세종이나 문종이나 성종처럼 학문에 관심있는 왕이 아니고서야 관학은 쇠퇴되거나 몰락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전제왕조의 국가의 특성상 왕과 신하들은 서로 간의 한통속으로 굴러가는데 성종을 뒤를 이은 연산군은 홍문관을 폐지해 관학의 줄기를 잘랐고, 중종은 홍문관을 부활하나 중종 자신이 정치 능력이 한참 모자라 옥사와 같은 사건이 자주 벌어졌고 정국이 불안정해서 관학이 부활할 틈을 막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훈구파는 연산군과 중종 시절에 이어진 정치 혼란, 자신의 학문적 기반이었던 관학 쇠퇴, 자신들끼리도 다툰 정치 투쟁으로 스스로 쇠퇴했다. 그리고 중종 시절에 혼란한 정국을 피해 은퇴한 관리와 [[과거 시험]]을 통한 관리 출사를 거부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성리학에 빠지게 되었고 성리학에 대한 이해와 연구가 본격화되면서 급기야는 조선에 성리학에 대한 독자적인 이론과 학설이 만드는 경지에 이르렀다. 여기에 [[서원]]이 설치되면서 자신들이 내놓은 학설을 바탕으로 제자들을 양성할 수 있었다. 학문적 중심이 사림파로 가는 상황에서 훈구파는 결국 [[명종(조선)|명종]] 시절에 사림파의 정치 진출을 허용했고 자연스럽게 소멸하면서 사림파는 [[선조(조선)|선조]] 시절에 정권을 잡아 이후에 [[붕당]] 정치를 이끌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