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광둥성 (문단 편집) == 역사 == [[중원]]과 물리적 거리가 멀어서 정통 중국 문화와 바다를 통해 들어온 외국 문화가 융합된 독자적인 문화가 형성되어 있다. 특히 [[유럽]] 여러 나라들과 무역을 하게 된 뒤부터는 반체제적인 사고 방식이 형성되어, 중국 내부의 정치 상황이 급변하는 변수가 생긴다면 이 곳이 변화의 중심이 될 것이라는 예상도 있다. [[진나라]]의 장수였던 임오(任囂)와 [[조타]](趙佗)가 진나라 조정의 명으로 광둥성 일부 지역과 [[베트남]] 북부 지역을 평정하고 머무르다가 진나라가 멸망하자 [[남월]](南越)이라는 국명으로 나라를 건국하기도 했다. 월(越)이라는 명칭은 당시 [[중원]] 지역에서 강남 이남을 부르는 광범위하고 가변적인 명칭이었으며, 후에 베트남의 국명에도 들어가게 된다. 월(越)이라는 명칭 때문에 [[춘추시대]]의 [[월나라]]와 모종의 관계를 염두에 두는 시각도 있으나 애초에 남월은 진나라의 장수였던 조타가 건국한 나라이고, 건국 당시에 으레 쓰이던 월(越)이라는 명칭을 국명으로 사용한 것 뿐이다. 애초에 월계 주민들이라 해도 서로 정체성이 달랐기 때문에 [[반랑]]과 [[월나라]]가 관계가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후 남월은 중원과는 다른 독자적인 세력을 이루다가 [[한나라]]의 군사력이 절정에 달해 [[흉노]]나 [[고조선]] 등 주변지역을 마구 침공한 [[한무제]] 때 정복당하여 한나라에 복속되었다. [[한나라]] 시절에도 이 지역은 산맥과 밀림으로 막힌 미지의 영역이었으며 베트남 북부 교지, 중부 일남군 등과 함께 간접적인 통치가 이뤄지다가[* [[삼국지]]에 나오는 사섭이 교지와 일남을 다스렸다.] [[서진]]이 몰락하고 [[남북조]]시대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개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나라]]까지는 이곳의 개발이 그다지 진척되지 않았고, 인구 밀도도 높지 않았다. 하지만 [[명나라]] 이후 기후가 좋고 해양 세력과 접촉하는 데 상당히 유리했기 때문에, 점점 부유한 지역이 되었다. 그리고 [[만주족]] [[청나라]]가 들어선 후에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중국 남부 해안에 위치하여 오랜 기간 유럽인들과 접촉이 많았던 까닭인지 유럽인들의 [[조차지]]/[[식민지]]가 유독 많이 세워진 지역이기도 했다. 철도 연선이나 도시 내 소규모 구획들의 조차 사례를 제하고도 [[프랑스령 광저우만]], [[포르투갈령 마카오]]와 [[영국령 홍콩]]으로 셋이나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