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광서제 (문단 편집) == 여담 == 광서제는 개인적으로도 매우 불행한 황제였다. 광서제는 서태후의 압박 때문에 그녀의 조카인 [[효정경황후|효정경황후(융유황태후) 예허나라씨]](隆裕皇后 葉赫那拉氏)[* 1868년 ~ 1913년. 본명은 예허나라 징펀(葉赫那拉 靜芬). 서태후의 조카로, 광서제에게는 사촌 누나가 된다. 광서제 사후 태후로 봉해졌고 선통제 때 섭정을 맡았다.]와 결혼해야 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불행했는데 광서제는 고집 세고 성격도 나쁜 황후를 싫어해서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면서 애정을 주지 않았다. 특히 융유황후는 후비들을 괴롭히고 남편인 광서제를 감시하는 역할도 했기에 광서제가 더욱 미워했다. 서태후를 모셨던 궁녀의 증언에 따르면, 문안 인사를 온 황후가 이제 나가보라는 광서제의 말을 듣고도 침전에서 나가지 않고 버티자 격노한 광서제가 황후의 머리채를 잡고 침전 밖으로 끌어냈을 정도였는데, 이게 광서제가 붕어하기 10일 전의 일이었다. || [[파일:external/img.tv.cctv.com/IMAG1239844275894863.jpg|width=100%]] || || 진비 || 결국 애정없는 결혼에 지쳐가던 광서제는 후궁인 [[각순황귀비 타타랍씨|각순황귀비 타타라씨]](恪顺皇贵妃 他他拉氏), 즉 진비(珍妃)를 총애하게 된다.[* 1876년 ~ 1900년. 본명은 타타라 서설(他他拉 瑞雪).] 진비는 서태후가 정해준 후비로, 처음엔 뛰어난 재능으로 서태후의 총애를 받았지만 광서제에게 강한 황제가 되라고 부추기는 등 서태후와 갈라지면서 미움을 받게 되었다. 서태후의 그녀에 대한 미움은 엄청나서, 조카인 융유 황후를 시켜 진비의 뺨을 서슴없이 때리는가 하면, 나중에는 진비를 아예 창문 하나 외에는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곳에 감금시켰다. 게다가 매달 초하루와 15일, 그리고 축제 분위기로 온통 들떠있는 명절 점심 시간에 태감들을 보내 그녀를 욕하고 괴롭혔다. 특히 진비를 증오하는 융유 황후도 같이 괴롭혔다. 또한 진비는 하도 어른스러워서 "진비 할망구"라는 조롱을 서 태후에게 들었을 정도. 사실 진비는 남장을 자주하는 여장부이기도 했기에 서태후가 더욱 싫어했다.[* 당시 성차별이 심한 시대인터라 남장을 하는 여성을 좋게 보지 않았다.] 게다가 진비는 사진 찍기를 좋아했으며[* 당시에는 사진을 찍으려면 20분이나 걸렸고 20분 동안 부동자세로 있어야 하기에 사진 찍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다.], 황제가 외국어를 배우거나 개혁을 추진하는데도 많은 부분을 조언했다. 광서제는 그런 진비를 더욱 총애했고, 그녀에게 "천자인 내가 있으니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라며 큰소리를 뻥뻥 쳤다고 한다. 광서제는 1900년 [[의화단 운동]]으로 열강 연합군이 베이징을 습격할 때 잠시 시안(西安)으로 탈출했지만, 그 사이에 진비가 서태후에게 살해된다. 이때 진비 역시 유폐되어 있었는데, 서태후는 진비를 죽일 생각으로 "너무 예뻐서 함께 탈출하다가 외적에게 강간을 당할 수 있다."는 이유를 내세워 진비에게 자결을 강요했다. 일설에는 진비가 황제를 자금성에 남겨 연합군과 협상을 통해 서태후 일당을 일소할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하며, 이를 우려한 서태후가 '''"너 먼저 우물에 빠지면 나도 따라서 빠지 마"'''라고 설득한 다음 유유히 피난길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아니며 설득하기는커녕 진비가 자살 강요를 거부하자 빡친 서태후가 쟤 죽여버리라며 고함을 지르자 반항하는 진비를 환관 최옥귀가 강제로 우물에 밀어넣어 죽였던 것이다. 이때 그녀의 나이 향년 24세였다. 후일 서태후는 뻔뻔하게도 "내가 화낸 건 맞지만 죽이라고 했던 건 아닙니다"라며 딱 잡아뗀 뒤, 최옥귀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고 정작 최옥귀는 처벌하지 않고 그를 출궁시키는 것으로 끝냈다. 진비의 가족들이 슬퍼하며 우물에서 그녀의 시신을 건져올릴 때도 광서제는 유폐당한 신세라서 차마 나타나지 못했다. 광서제의 시종이 현장에서 진비가 생전에 썼던 낡은 휘장 하나를 슬쩍 가져와서 그에게 갖다주었을 때 이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이 광서제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고 한다. [[타이완]]의 [[국립고궁박물원]]에서 제일 유명한 유물 중 하나인 '''취옥백채'''가 광서제의 결혼 때 혼수품으로 들어온 것이라는 전설이 전해진다. 다만 국립고궁박물원 측에서는 해당 전설을 소개하면서도 청조의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며 후대에 창작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한다. 청나라 황제 중 [[선통제]]와 함께 사진을 찍은 황제다. 문서 최상단의 가마에서 내리는 사진을 포함해 꽤 사진자료가 남아있는 편이지만 아쉽게도 공식적으로 확실하게 광서제의 모습을 찍은 것으로 인정받은 사진은 가마에서 내리는 사진 딱 한장 뿐이다.[[https://www.aboluowang.com/2020/0121/1398825.html|#]] [[파일:광서제의 사진.jpg]] 레지널드 존스턴의 《자금성의 황혼》에 나온 광서제의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이다. [[파일:광서황제.png|width=400]] 광서제의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자료이다. [[http://www.yuanfeng0758.com/zuixin/7542.html|출처]]를 참고하면 사진 아래에 '광서황제형상'이라는 설명이 적혀있다. [[파일:3307_RZHAnM_YI833ES.jpg!r800x0.jpg|width=400]] 마찬가지로 광서제의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자료로, [[미국]] [[유타]] 주 오그던(Ogden)에서 1894년부터 1907년까지 판매된 담배 카드 (Ogden's 'Guinea Gold' Cigarette Cards) 등에서 광서제의 것으로 사용되었다. 다만, 해당 카드에서는 앉아 있는 인물이 아닌 좌측의 어린 인물을 광서제로 적시하였다. 어린 광서제 옆에 앉아있는 인물은 광서제의 친부인 순현친왕 혁현이라고 한다. [[https://itw01.com/YI833ES.html|출처]] 허나 이 사진이 광서제일 리 없다는 지적도 있는데, 3세에 즉위해서 어린아이였던 시절에도 광서제는 공식적으로는 청나라에서 제일 높은 사람인 황제였다. 아무리 부자간의 정과 의리가 있다고 하나 감히 친왕만 앉고 황제를 세워둔 채 사진을 찍을 일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사진을 본 푸이는 이것이 광서제의 사진이 아니라 혁현이 둘째 아들인 자신의 부친, 즉 2대 순친왕 재풍과 찍은 사진이라 지적하였다고 한다. [[파일:光緒帝.jpg]] 프랑스 출신 기자가 가마에서 내리는 광서제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으며 현재까지는 학계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광서제의 모습을 찍은 유일한 사진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정면에서 찍은 사진은 아니기 때문에 광서제의 얼굴은 초상화로만 알 수 있다. 37세에 안타깝게 요절한 것 때문에, 전형적인 전근대 중국 황제 이미지로 기억되는 마지막 인물이 되었다.[* 중국의 마지막 황제는 후임자인 [[선통제]]이지만, 이쪽은 전형적인 전근대 중국 황제로서의 삶은 어린 나이에 짧게 경험했고 이후에는 불안정하게나마 근현대적인 삶을 살았다.] 마치 [[클레오파트라 7세]]가 전형적인 [[고대 이집트]] [[파라오]] 이미지로 기억되는 마지막 인물이고 [[잔 다르크]]가 중세 [[프랑스 왕국]] 명장으로 명성을 떨치는 마지막 인물인 것과도 비슷하다(둘 다 요절했음). 만약 그가 천수를 누렸다면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봤을 수도 있으며, 변수에 따라서는 말년에 [[제2차 세계 대전]]이나 [[냉전]]에 휘말리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동갑인 인물들 중 [[요안니스 메탁사스]]는 1941년까지, [[피에트로 바돌리오]]는 '''1956년'''까지 살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