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광서제 (문단 편집) === 청일 전쟁 === 1890년대 동아시아의 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특히 [[일본 제국]]이 메이지 유신 이후 힘을 키우고 아시아 유일 열강으로 떠오르며 기존의 중화 중심 질서를 위협하고 있었기에, 이를 두고만 볼 수 없었던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통제력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온갖 애를 쓰고 있었다. 이와중에 조선에서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고, 청나라와 일본은 각각 반란을 진압해준다는 명분으로 조선 내부로 들어왔다. 조선 조정과 동학군은 외세 침략을 막기 위하여 [[전주 화약]]을 맺었으나, 청나라와 일본은 본국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했고 계속 조선에 주둔했다. 일본은 점차 조선을 먹어버리겠다는 야심을 드러내며 [[경복궁]]을 점령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청나라에 선제공격을 퍼부으며 본격적인 전투에 들어갔다. 그러나 무기만 서구식이었지 훈련과 기강은 바닥이었던 청나라 군대는 대대적인 근대화를 거친 일본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결국 1894년 6월부터 1895년 5월까지 벌어진 [[청일전쟁]]은 [[이홍장]]이 체결한 [[시모노세키 조약]](下關 條約)을 끝으로 청의 완패로 끝났다. 청은 [[일본]]에게 1년 예산의 2.5배나 되는 배상금과 함께 [[타이완 섬]]과 펑후(澎湖) 섬, [[요동]] 등을 할양했다. 특히 이 전쟁에서 청나라가 심혈을 들여 키워온 [[북양함대]]가 전멸했다는 점에서 그동안 진행되었던 양무 운동이 사실상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할 수 있었다. 청일 전쟁의 패배는 청나라 조정과 국민들에게 단순히 승패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동안 서양 열강들에게 당했던 것은 듣도보도 못한 서구 오랑캐들에게 역습당한 것이라고 치더라도, 전통적으로 중국이 해적 근거지 정도로 취급해오던 일본 따위에게까지 패했다는 것이 더더욱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이때문에 청나라는 청일전쟁의 패배 이후 심각하게 개혁을 고려하기 시작했고, 한편 한족이 대다수인 국민들의 민심을 갈수록 들끓어만 갔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Guangxu-Emperor.jpg|width=100%]] || [clearfix]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