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교현 (문단 편집) == 생애 == 젊었을 때 군의 공조가 되었으며, 예주자사 [[주경]]이 양국에 이르자 교현은 주경을 찾아가 땅에 엎드려 진국의 재상 [[양창]]의 죄악을 고발해 부진종사가 되어 그 간악함을 남김 없이 다스리게 해 달라고 빌었다. 주경이 교현의 뜻이 굳센 것을 보고 그를 임명해 진국으로 보내줬으며, 교현은 부임하자마자 양창의 빈객들을 모두 잡아들여 뇌물 죄로 조사했다. 양창은 평소에 대장군 [[양기(후한)|양기]]와 관계가 두터웠으므로 양기는 격문을 보내 그를 구하려고 하자 주경이 그의 말에 따라 교현을 불렀는데, 교현은 격문이 돌아가 아직 출발하기 전에 재판을 더욱 급하게 처리했다. 마침내 양창이 죄를 얻어 함거로 끌려가자 교현이 이로 인해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 그 후 효렴으로 천거되어 낙양좌위를 보필했는데, 이 때 양불의가 하남윤이라 교현은 공문을 하남부에 가서 받아야 했지만 이를 수치스럽고 욕되게 여겨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나중에 네 번 승차해 제국(齊國)의 재상이 되었다가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성을 쌓거나 절구질을 하는 형벌을 받았으며, 형이 끝나자 상곡태수로 승진했다. 상곡태수에서 한양태수로 옮겨졌다가 상규현령 [[황보정]]이 뇌물죄를 저지르자 교현이 잡아들여 조사해 곤형과 태형을 집행해 기현의 시장에서 죽이자 한양군 사람들이 모두 두려움에 떨었으며, 한양군 상규현 사람 강기는 도를 지키면서 숨어 살아 서주에서 이름이 높자 교현이 그를 불러 관리로 삼으려 했지만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았다. 이에 화난 교현이 독우 [[윤익]]에게 칙서를 내려 그를 위협하길 >만약 강기가 나오지 않으면 그 어미를 시집 보내버리겠다. 윤익이 굳게 쟁론했으나 끝내 이길 수 없자 급히 가서 강기를 깨우쳐 이끌려고 했지만 강기는 굳게 누워 일어나지 않았으며, 군 안의 사대부들이 다투어 와서 간하자 교현이 마침내 포기했다. 이 때 그를 나무라는 이가 아주 많았으며, 뒤에 병으로 사임하고 물러났다가 다시 공거로 부름을 받아 사도장사가 되었다가 장작대장으로 임명되었다. [[환제(후한)|환제]] 말에는 선비, 남흉노, [[고구려]]의 태자 백고([[신대왕]])가 함께 변방을 노략질하자 교현이 황월을 받아 도료장군에 임명되어 군진에 이르렀고, 곧 군대를 쉬게 하면서 병사들의 사기를 높였다. 이후 여러 장수들을 독려해 오랑캐 및 백고 등을 토벌하여 모두 흩어져 달아나게 했다. 그가 변방의 수비를 맡았던 3년 동안에는 변경이 편안하고 조용했다. [[영제(후한)|영제]] 초에는 조정에서 불러 하남윤이 되었으며, 소부와 대홍려로 옮겼다. 170년에 는 사공으로 승진했다가 이듬해인 171년에는 사도로 옮겼다. 이 때 교현은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던 남양태수 [[진구]]를 추천해 정위로 삼는 등 노력했지만 국정의 상황이 좋지 않자 교현은 병을 핑계로 상소를 올려 천재지변들이 일어난 것을 이유로 스스로를 탄핵하면서 견책을 받아 파직되었다. 한 해 남짓 지나자 상서령으로 임명되었다가 이 때 태중대부 [[개승]]은 과거에 황제에게 은혜를 베푼 일이 있었는데, 그가 남양태수로 있을 때 수억 냥 이상 뇌물을 받은 것이 있어 교현은 개승을 면직하고 금고를 내려 그의 재산을 압수하자고 상주했다. 그러나 황제는 교현이 올린 청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개승을 시중으로 승진시키자 교현은 병을 빌미로 삼아 면직하여 광록대부로 임명되었다. 176년에 황룡이 초현[* [[조조]]의 고향이다.]에 출현해 [[단양(삼국지)|단양]]에게 무슨 징조인지 물어보니 >그 땅에서 왕자가 흥할 것이 틀림이 없소. 50년이 지나기 전에 용이 다시금 나타날 것인데, 이는 그에 상응하는 전조일 것이오. 이후 [[조비]]가 선양을 받을 때 황룡이 다시 나타났다고 한다. 178년에 태위로 승진했다가 몇 달 후 다시 병을 이유로 파직했다가 곧 태중대부로 임명되었는데, 치료를 위해 집에 머물러 있다가 이 때 혼자 문 앞에서 놀던 교현의 열 살 짜리 막내아들이 몽둥이를 든 세 명에게 유괴되어 집안의 누각으로 끌려가자 인질범은 교현에게 돈을 달라고 했다. 하지만 교현은 이를 내주지 않고 사예교위 양구가 하남윤과 낙양령과 동행하여 교현의 집을 포위하고 교현의 아들이 살해당할 것을 두려워해 그들에게 접근하지 않으려 하자 교현이 눈을 부릅뜨고 소리치길, >이 간악한 인간들의 죄가 형언할 수 없는 지경이거늘 어찌 나 교현이 한갓 자식의 목숨 때문에 나라의 도둑들을 풀어 줄 수 있겠는가! 그러면서 병사들이 진격하도록 재촉해 도적들을 공격하자 교현의 아들은 도적들의 칼부림에 죽었으며, 이에 교현이 궁궐에 이르러 자신의 아들로 말미암아 일어난 일에 용서를 빌면서 천하에 호소했다. >무릇 인질을 데리고 협박하는 경우가 있을 때에는 차라리 그들을 모두 함께 죽여야 합니다. 재물을 주고 인질을 구하는 것은 간악한 길을 더 크게 열어 줄 뿐입니다. 이에 조서를 내려 그 뜻을 널리 알렸으며, [[안제(후한)|안제]] 이후부터 법이 금하는 바가 점차 느슨해져 서울 낙양에서 인질을 잡고 협박할 때 권세 있고 귀한 집안조차 피하지 않았지만 이 때부터 드디어 사라졌다. 183년에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교현은 성품이 까다로우면서도 고집이 세고 또한 매우 급했다. 커다란 도리는 알지 못했지만 겸손하고 검소해 아랫 사람들에게 잘 대해 자제나 친척들 중에서 큰 관직을 얻은 자가 없었으며, 엄격하고 공정하면서도 재략이 있거나 인물평에 뛰어났다고 한다. 세상을 떠날 때 집안에 가업이 없어 장례에 빈소를 차리지 못할 정도라 세상 사람들이 그를 칭송했다고 한다. [[조조]]가 아직 미약했을 때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는데, 일찍이 조조가 교현을 찾아가 문안한 적이 있어 교현이 그를 보고는 뛰어나다고 생각해 이렇게 말했다. >지금 천하는 어지러워지고 있다. 백성들을 평안하게 하는 것은 아마도 그대에게 달려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교현은 >내가 천하의 명사들을 많이 보았지만 그대와 같은 사람은 본 적이 없소! 군은 스스로를 잘 보중하시오. 나는 늙었으니 내 처자를 부탁하오. 라며 그를 지원하면서 >군은 아직 명성을 얻지 못했으니 자장(허소)과 교류하시오. 라고 하자 조조는 덕분에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다. 조조는 늘 교현이 자신을 알아주었다는 사실에 감격해 나중에 교현의 묘 앞을 지날 일이 있을 때마다 번번이 슬픈 마음이 들어 제를 올렸는데, 202년에 [[관도대전]] 직전에는 제문인 사고태위교현문을 직접지어 말했다. > 죽은 태위 교 공께서는 아름다운 덕의 자취가 높았으며, 백성들을 널리 사랑하셨고 크게 포용하였으므로 나라에서는 그 밝은 가르침을 생각하고 선비들은 그 훌륭한 계책을 깊이 사모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공의 영혼은 희미해지고 모습은 멀리 사라져 버렸네! 나 조조가 어린 나이로 조정의 당실에 오른 것은 특히 완고한 기질을 타고 났음에도 군자가 보고 받아들여준 덕분이요, 갈수록 영예가 더해져 더욱 뚜렷해진 것은 모두 교공의 장려와 도움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중니(공자)가 [[안연]]을 칭찬하고, 이생이 가복에게 두텁게 찬탄한 것도 아마 이에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으며, 그를 가슴에 품고 잊지 않는 법이라 했습니다. 게다가 한가한 틈을 타서 둘이 약속한 말도 있습니다. '나중에 내가 죽은 후에 길 가다 내 무덤을 지날 때 술 한 말과 닭 한 마리를 마련해 술을 부어 제사하지 않으면 수레가 세 걸음이 지나기 전에 복통이 일더라도 원망하지 말라.' 비록 그 당시에는 웃자고 한 말이었지만 지극히 가까운 사이의 두터운 정이 없었더라면 어찌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옛 일을 품고 돌이켜 생각하니 마음이 쓸쓸하고 구슬플 뿐입니다. > 명을 받들어 동쪽을 정벌하러 와 고향 마을에 군대를 주둔하고 나서 북쪽으로 공의 고향 땅을 바라보다가 문득 공의 묘를 마음에 품었습니다. 이에 변변찮은 제물을 마련해보내 제사하니 공께서는 이를 상향하소서! 225년에는 조비가 황제가 된 다음에도 제사를 한 번 더 지냈는데, 이는 황룡 출현 사건으로 인한 제사로 생각된다. [[삼국지집해]]에서 심흡한이 한나라의 제도에 따르면 삼공에 오르면 공이라고 불렀다는 점을 들어 강동이교의 아버지인 [[교공]]이 교현과 동일인이라고 주장했지만, 노필은 삼공이 아닌데도 장소와 정보 등을 장공 또는 정공이라 부른 예를 들어 이를 반박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