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교황/역사 (문단 편집) == 근대 == [[르네상스]] 이후 근대까지도 여전히 이탈리아 중부에 드넓은 [[교황령]]이 존재하였고, 이를 지키기 위한 군대 역시 보유하고 있었다.[* 그냥 '존재하고' 정도가 아니라,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5대 강국 가운데 하나로서 군림하고 있었다. (다른 넷은 밀라노, 베네치아, 피렌체, 나폴리.) 이 시대 지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중부 이탈리아에 오늘날의 [[바티칸]] 시국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넓은 영토를 보유했기 때문. 따라서 이 시기의 교황들은 성직자로서는 물론 정치가로서의 역할도 해야 했으며, 상술된 바와 같이 '워낙 막장인 교황들이 많았던 점이 비판받는' 것도 성직자인 동시에 정치가여야만 했다는 점을 보지 않고 '교황은 당연히 성직자 아님? 근데 엉뚱한 짓만 하네?' 라는 생각만으로 평가하기 때문.] 하지만 [[프랑스 혁명]] 이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프랑스 제1제국]] 시기를 거치며 많이 위축되었다. 당시 프랑스 혁명 정부와 이후 나폴레옹 정부는 가톨릭 교회에 다소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고, 교황 또한 구체제의 상징 같은 존재로 타도 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으나, 당장 프랑스 국민의 절대 다수가 독실한 가톨릭 신도라는 현실 또한 무시할 수는 없어서, 프랑스 내에서 교황의 힘을 크게 빼고 교황령을 축소시키는 정도로 끝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이끄는 공화정·제정 프랑스는 지속적으로 바티칸에 압력을 행사하였고, 이는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영국]]과 [[오스트리아 제국]] 등이 주축이 된 동맹 세력이 프랑스 제1제국을 몰락시키며 끝이 났다. 이후 [[빈 회의]]에서 교황령은 어느 정도 회복됐고, 유럽의 질서도 다시 강제로 원래대로 돌아갔으나, 변화는 이미 유럽 전역으로 번졌고, 이탈리아 반도는 그 중심에 있었다. 북부 이탈리아의 지식인들과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통일에 대한 여론이 거세졌고, 그 중심에는 [[사르데냐 왕국|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이 있었다. 그리고 교황령을 지켜야 하는 교황의 입장에서 로마까지 포함하는 통일을 추구하는 이탈리아의 통일 운동은 큰 위협이었다. 이를 막기 위해 오스트리아 제국이나 부패한 [[양시칠리아 왕국]]과 연대하며 [[이탈리아 통일]] 세력과 맞섰고, 어느 정도 오랜 기간 이탈리아 통일 세력과 맞설 수 있었다. 하지만 꾸준한 확장과 [[가리발디]]의 활약으로 말미암아 시칠리아, 나폴리를 비롯한 남부 이탈리아. 베네토를 제외한 북부 이탈리아가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령으로 편입됐고, 이때 이탈리아 왕국으로 이름을 바꿨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을 틈 타 베네토까지 흡수한 이탈리아 왕국의 기세 앞에, 이탈리아 동부 해안에 넓게 닿아있던 교황령도 오늘날의 [[라치오]]의 영역과 비슷하게, 로마를 중심으로 한 중서부 이탈리아 지역까지 밀렸다. 하지만 이후 이탈리아의 통일을 원하지 않던 프랑스 제2제정의 정책 변경으로, 루이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의 지원 아래 이탈리아 왕국이나 가리발디 등 이탈리아 통일 세력으로부터 남은 교황령을 지켜낼 수 있었으나, 결국 보불전쟁으로 프랑스 제국이 붕괴되는 사이 결국 이탈리아군이 교황청으로 진주하여 로마를 함락시켰다. 이렇게 1870년 [[이탈리아 통일]]로 로마 시내에 있는 바티칸 언덕을 제외한 이탈리아 반도 내에 남아있던 교황령이 완전히 [[이탈리아 왕국]]에게 넘어가며 교황의 실질적 세속 권력은 소멸되었다. 이후 19세기 후반 동안 교황들은 [[바티칸 포로]]를 자처하며 바티칸에 은거하며 슬픔과 분노를 삭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시기 동안 [[프랑스 제3공화국]]과 [[독일 제국]] 등 서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 정교분리 운동 혹은 반가톨릭 운동이 일어나며 서유럽 각지에서 가톨릭 교회와 교황의 권위는 크게 위축되었다. 가톨릭 교회와 교황이 가장 신뢰하던 프랑스에서 급격한 정교분리가 이뤄지고, [[프로이센 왕국]]이 주도하여 통일한 독일 제국 내에서 [[문화 투쟁|가톨릭 교회와 프로이센 세력의 대대적 대립과 이에 따른 독일 제국 정부의 가톨릭에 대한 탄압]]이 이뤄졌고, 이탈리아 내에서는 슬픔과 분노에 찬 교황과 신생 이탈리아 왕국 사이의 미묘한 갈등이 지속되었다. 그리고 [[스페인]]과 [[라틴 아메리카]], [[필리핀]] 또한 교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세속 국가로 변모하거나, [[미국-스페인 전쟁]] 이후 미국의 식민지로 넘어가 교황의 정치적 지원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만이 남게 됐다. 이후 교회의 방향을 놓고 보수파와 진보파가 대립하던 와중인 1903년 이뤄진 콘클라베에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오스트리아의 황제 자격으로 개입하는 사건이 터졌다. 사실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입장에서도 콘클라베에 개입하는 건 정치적으로 큰 부담이 가는 행위였으나, 선종한 교황 [[레오 13세]]의 교회 개혁 정책과, 그의 지도 아래 이뤄진 교회의 헝가리 왕국의 슬로바키아에 대한 가혹한 탄압 정책에 대한 비판과 개입에 단단히 삐진 그는 어떻게든 마리아노 람폴라 추기경 등 진보적 성향의 인사가 교황으로 선임 되는 것을 막고, 보수적 성향의 교황으로 올리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비오 10세]]가 교황직에 올랐다. 직후 이런 사태가 또다시 발생할 것을 우려한 [[비오 10세]]는 오스트리아 황제의 콘클라베 간섭권을 폐지하고 개별 국가들의 콘클라베 간섭을 막기 위한 조치들을 제정하며, 거의 1500년의 우여곡절 끝에 교황의 선출 과정이 세속 국가들의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졌다. 또한 이 시기부터 미국과의 충돌 또한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미국은 그 근원에서부터 철저한 개신교 국가이자 반가톨릭 정서가 깊게 뿌리 내려있던 국가였으며, [[남북전쟁]]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유럽 열강 세력으로부터 미국 본토의 안전을 확보하고 미국의 정치-경제-군사적 국익을 실현하기 위해 라틴 아메리카를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 두고자 하였다. 이런 미국의 성향과 라틴 아메리카로의 진출 정책은 가톨릭 교회와의 충돌을 빚었다. 남북 전쟁 이후에는 정치와 사회가 안정되고 급속한 산업화가 이뤄지며 모든 분야에서 미국의 급격한 대외 팽창이 이뤄졌는데, 이에 뒤따라 미국의 라틴 아메리카와 태평양으로의 진출이 이뤄졌고, 이는 필연적으로 라틴 아메리카와 태평양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유럽 열강 세력과 가톨릭 교회와의 더 큰 갈등을 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교황들은 바티칸에서 유럽과 세계의 주도권을 놓고 세계 패권국이던 영국과 정교회 제국이던 [[러시아 제국]], 그리고 교황청과 적대적인 관게에 있던 독일 제국과, 교황청과는 애증 관계에 있던 가톨릭 국가들인 프랑스 제3공화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 왕국]] 등이 충돌하여 처참한 살육전으로 이어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형제 자매여야 할 가톨릭교도들이 국적에 따라 갈려 서로가 서로를 마치 짐승을 도살하는 것처럼 잔혹하게 대량 살해하는 참상을 지켜봐야 했다. 직후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사회주의자들이 건설한 [[소련]]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세력이 점차 현실에서 힘을 얻는 모습과 동시에, 앞서 언급했듯 종교적 문제나 [[먼로 독트린]]과 [[미국-스페인 전쟁]]으로 대표되는 라틴아메리카와 필리핀 지역에서의 패권과 관련된 여러 문제로 가톨릭 교회 그리고 교황청과는 복잡미묘한 불편한 관계의 개신교 국가 [[미국]]이 서방세계의 새로운 패권국으로 떠오르는 모습을 바라봐야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